콘서트홀 무대 그 너머, 백스테이지로 향하는 초대장을 받다
백건우와 미하엘 잔덜링/드레스덴 필 내한 공연이 열린 지난 6월 26~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로비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오후 6시를 가리켰고, 발걸음은 객석을 지나 백스테이지로 향하고 있었다. 한때 ‘금녀의 공간(?)’으로 불리던, 예나 지금이나 ‘관계자 외 출입금지’인 그곳, 백스테이지에서 예술의전당 이동조·이수미 무대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각각 13년 차 그리고 5개월 차 선후배다. 현재 예술의전당 음악당 무대감독은 총 7명. 이 외에 조명감독, 음향감독까지 총 16명이 예술의전당 음악당(콘서트홀·체임버홀·리사이트홀)에 오르는 연간 총 1,200회에 달하는 공연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무대감독은 어떤 사람들인가. 공연장 로비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하우스 매니저가 입구부터 객석까지 책임진다면, 무대감독은 무대부터 백스테이지까지 책임지는 이들이다. 또 연주자(기획사)와 공연장 그 사이에서 다양한 계획과 변수를 조율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틀 간 진행된 내한 공연에서 미하엘 잔덜링/드레스덴 필은 베토벤 ‘피델리오 서곡’을 시작으로 브람스 교향곡 1번과 베토벤 교향곡 7번을 선보였고, 백건우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과 4번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이들이 연주하는 동안 무대 너머에서 벌어진, 객석에 앉아선 보이지 않는,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생생한 이야기. 두 명의 무대감독과 이틀간 동행 취재기를 지금부터 시작한다.
오케스트라-지휘자-협연자, ‘밀당’의 트라이앵글
지휘자나 오케스트라마다 그만의 취향, 그리고 익숙함이 있다. 이것은 심지어 의자며, 지휘대에도 적용된다. 드레스덴 필은 이번 투어에 미하엘 잔덜링을 위한, (그의 큰 신장을 반영한 게 아닐까 싶은) 단을 챙겨왔다. 리허설을 하는 동안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의자의 종류며 높이, 쿠션 상태 등을 놓고 무대감독에게 필요한 사항을 요청한다. 무대감독에게 이 모든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무대감독으로서 지휘자·오케스트라·협연자의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인 필요를 모두 만족시키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각적으로 서로 부딪히거나 겹치지 않으면서, 각각의 소리를 발휘하되 또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는 것은 기본이다. 지휘자·오케스트라·협연자의 각기 조합에 따른 변수를 감안하면, 매 공연이 새롭고 또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각각의 요구를 수용하고 조율하면서 결국 최선의 무대를 마련하는 것은 경험과 시간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
공연 이틀 전, 백건우는 협연에 사용할 피아노가 최적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를 먼저 체크하기 위해 콘서트홀을 찾았다. 날마다 공연 스케줄로 빽빽한 콘서트홀에서, 공연 며칠 전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 무대에서 음향을 체크해볼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문 경우다. 이번 공연에서 그는 피아노를 최대한 무대 안쪽에 두려 했다. 하지만 처음에 그가 피아노를 세운 지점은 오케스트라, 지휘대와 부딪히는 자리였다. 이번에 협연 피아노 전환을 담당한 이수미 감독은 백건우가 원하는 위치, 그가 구현하고자 하는 소리가 맞아떨어지는 자리를 함께 찾기 위해 콘서트홀 무대를 구성하는 폭 13cm의 나무판 수를 일일이 세었다. 크고 작은 변동과 변수가 거듭된 끝에 피아노의 위치가 결정됐다.
“무대의 18번째 나무판, 객석과 가장 가까운 무대 끝부터 중앙으로 2m 34cm 만큼 들어간 위치에 피아노를 놓았을 때, 마음에 드는 소리를 찾았다고 하셨어요.”
피아노 등장, 객석의 시선은 어디로?
6월 26일, 백건우에게 간택받은 예술의전당 스타인웨이 피아노 318은 피아노 창고에서 연습실에 머물다, 리허설 때부터 콘서트홀 무대에 올랐다. 이동 과정뿐 아니라 공연 중 무대 한쪽에 있던 피아노를 중앙으로 옮기는 것까지 모두 무대감독의 몫이다.
눈썰미 좋은 사람이라면 이번 무대에 오른 피아노의 몸체와 뚜껑의 질감이 다른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예술의전당 피아노 뚜껑에는 검은 천으로 만든 커버가 덧씌워 있다. 무대 조명을 받으면서 생기는 빛 반사 때문에 일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합창석 청중이 눈부심 현상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대감독들이 낸 아이디어다. 이후 해외 오케스트라 연주자나 스태프로부터 ‘어디서 살 수 있느냐?’는 문의를 종종 받는다고. 그때마다 무대감독들은 자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특별 제작! 돈 주고 살 수 없음”이라는 대답을 내놓곤 한다.
공연 양일의 첫 곡 베토벤 ‘피델리오 서곡’이 끝나갈 무렵, 무대 상수(객석에서 바라볼 때 무대 오른편)를 지키던 이수미 감독이 지휘자와 협연자가 드나드는 무대 하수(객석에서 바라볼 때 무대 왼편)로 넘어왔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에 쓰일 피아노를 옮기기 위해서다.
쏟아지는 조명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동조·이수미 감독은 무대 한쪽에 자리한 피아노를 무대 중앙에 미리 마킹해둔 지점까지 함께 끌고 간다. 연주자 못지않게, 수많은 관객의 주목을 받는 순간이다. 이때 쏟아지는 시선들 속에서 ‘무심한 듯 시크하게’ 피아노를 옮기고 들어오는 것이 피아노 전환에 있어 중요한(?) 포인트. 피아노 뚜껑을 올리고, 피아노 바퀴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고, 의자를 가져다놓으면 임무 완료!
피아노 협연 후 관객과 연주자에게 주어지는 인터미션도 무대감독에겐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순간이다. 관객들이 객석을 빠져나가는 사이, 두 감독은 무대 위의 피아노를 수거(?)하기 위해 재빨리 출동한다. 이렇게 무대에서 백스테이지로 돌아온 피아노는 즉시 항온·항습 시스템을 갖춘 피아노 창고로 직행한다.
신예부터 거장까지, 의외의 시간을 공유하는 공간
한편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이 끝난 후, 백스테이지에서 두 손을 맞잡은 백건우와 미하엘 잔덜링. 앙코르 박수가 한동안 이어지자, 지휘자는 “뭐라도 좋으니 들려달라”며, 마치 그네를 밀듯 무대 밖으로 백건우의 등을 가볍게 떠민다.
2부 공연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마무리되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하나둘 상수와 하수 문 앞에 줄 서기 시작한다. 시끌벅적한 주말 오후 대형 마트를 방불케 하는 풍경이 문이 열리기 직전까지 펼쳐진다. 주요 선율을 연습하며 손을 풀거나, 파트너와의 수다로 입을 푸는 모습 가운데 지극히 일상적인 공기가 한껏 부풀었다. 똑같이 공연을 기다리고 있지만, 객석에선 알 수 없는 아주 인간적인 시간이다. 이윽고 무대감독이 백스테이지의 육중한 문을 열어 당기자, 한껏 부풀었던 인간적인 공기들은 곧 무게감을 장착한 채 박수 소리를 따라 무대로 밀려나가기 시작한다.
백스테이지에서도 무대의 하수는 지휘자와 협연자들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조금 더 특별하다. 자신만의 주문을 외치며 2,000명의 관객을 향해 나가는 지휘자 미하엘 잔덜링,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며 그만의 기도를 속으로 읊조리는 백건우의 모습과 마주칠 수 있다.
무대로 향한 문이 열리기 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짧은 상념에 잠기는 음악가의 시간을 지켜주는 무대감독. 거장부터 신예까지, 음악과 관객의 물결 앞에 잠잠히 머무는, 시간의 목격자다.
▲ 콘서트홀 백스테이지 상·하수 출입문에는 가로세로 한 뼘 길이의 창이 나 있다. 이 작은 창으로 1층 관
객들의 얼굴 표정까지도 생생하게 보이고, 3층 객석까지 내다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운
풍경은, 앙코르 직전 오케스트라 악장과 지휘자가 눈빛 사인을 주고받는 순간이다.
캡션 : 콘서트홀 백스테이지 상·하수 출입문에는 가로세로 한 뼘 길이의 창이 나 있다. 이 작은 창으로 1층 관객들의 얼굴 표정까지도 생생하게 보이고, 3층 객석까지 내다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운 풍경은, 앙코르 직전 오케스트라 악장과 지휘자가 눈빛 사인을 주고받는 순간이다.
그들의 음악이 바로, 여기서 구현될 수 있도록
2015년 상반기 주요 내한 공연 중 하나였던 백건우 협연의 미하엘 잔덜링/드레스덴 필의 연주가 이뤄진 이틀 간, 앞서 등장한 세 사람은 각자의 ‘처음’을 나름대로 겪었다.
13년 차 경력의 이동조 무대감독은 ‘여자 후배’와 (대형 공연에서 처음) 호흡을 맞췄고, 입사 5개월 차 이수미 무대감독은 피아노 전환을 처음 맡았다. 취재를 위해 공연 내내 백스테이지에 머물며, 그 모든 광경을 곁에서 지켜본 것은 기자로서도 처음이었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두 무대감독을 예술의전당에서 다시 만났다.
짧은 기간 동안 백스테이지를 지켜보면서 ‘무대감독은 선행학습이 불가능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침이 있더라도, 결국 ‘직접’ 겪어야 하는 일들의 총집합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동조 저도 클래식 음악 애호가이지만, 콘서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여기 와서 처음 알게 됐죠. 콘서트홀 편성부터 덧마루가 어떻게 쌓이는지, 연주자를 어떤 태도로 맞이해야하는지, 공연장 매뉴얼은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이수미 감독도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질문이 참 많았는데, 그냥 차근차근 따라오라고 했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시간에 경험으로 배우는 편이 더 낫거든요.
이수미 공연장에서 만나는 분들이 언제, 어디서 질문을 던질지 모르니 늘 긴장하게 돼요. 다른 선배들이 그동안 쌓은 노하우를 가지고 늘 최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시는데, 전 아직 경험이 부족하니 못 미더워 하는 연주자들의 시선을 느끼죠. 무대감독마다 각각 스타일이 있는데, 다양한 경험을 빨리 쌓아서 저도 제 방식을 세워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커요.
무대감독과 연주자 간 신뢰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나요.
이수미 이동조 감독님이 제게 해주시는 말이 있어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왔을 때조차, 너는 이 홀의 디렉터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디렉터는 연주자의 음악적 표현을 위해 그 밑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홀의 특성을 잘 알고, 그것으로 연주자에게 조언하고 돕는 사람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것이죠.
이동조 연주자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와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아무개 감독이 해결해줄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 무대감독은 신뢰를 얻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래전 피아니스트 스타니슬라프 부닌이 왔을 때, 우리에게 없는 피아노 의자를 찾은 적이 있어요. 그때 선배 무대감독이 그런 의자가 한국의 어느 피아니스트 집에 있는지를 기억하고 있어서 빌릴 수 있도록 도와줬죠. 그 선배의 20년 노하우 덕에 가능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 일이 한번 생기면, 다른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그가 해결해줄 것!’이라는 공식이 성립하고, 실제로 공연장과 무대감독과 연주자 간 신뢰가 쌓이는 거죠. 만약 3년, 5년 된 감독만 있었다면 부닌이 원하는 의자는 찾을 수 없었을 겁니다.
지난 4월, 베토벤 사이클 공연을 가진 이반 피셰르/RCO 공연 역시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이동조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있던 마지막 날이 가장 지독하게 고민했던 공연일 겁니다. 한 무대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솔리스트를 위한 덧마루 때문에 공연 하루 전날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건 처음이었어요. 덧마루엔 연주자와 지휘자가 그리는 음악을 얼마나 정확하게 구현해줄 수 있느냐가 달려 있어요. 이반 피셰르가 요구한 세세한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 예술의전당 창고에 있는 모든 덧마루를 다 꺼내야 했죠. 마지막에 지휘자가 덧마루의 높이 15cm를 양보하면서 모든 게 가능해졌죠. 여러 의미에서 클래식 음악 공연사에 남을 법한 공연이었다고 말하고 싶네요(웃음).
이수미 RCO 공연 둘째 날까진 객석에 앉아 들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날 ‘합창’이 끝나고는 백스테이지에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청 눈물이 많이 났어요. 정말 많이 고민하고 걱정한 공연이거든요. 제가 객석에 앉아 공연을 봤다면 그렇게 울 수는 없었을 것 같아요.
공연장을 찾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 하더라도, 무대감독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 텐데요. 무대감독으로 일하면서 겪는 오해나 편견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수미 무대감독이라는 직업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대적으로 몸을 써야 하는 건 맞아요. 저는 여성이고 아직 젊다 보니, 백스테이지에 있으면서 무대감독이 아니라 기획사 직원으로 오해하는 분이 많아요. 그래서 늘 사원증을 목에 걸고, 매번 ‘무대감독 이수미’라고 소개하면서 인사하죠(웃음). 리허설 때 무대 위 피아노 뚜껑을 열거나 이동할 때 지휘자와 연주자 분들이 걱정 어린 말을 건넬 때도 있어요. 무거운데 할 수 있느냐는 내용이 상당수인데,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 눈길을 피하긴 어렵죠. 처음엔 피아노 의자도 들기 힘들었는데, 이제 방법을 터득하고 나니 힘이 없어서 못하는 일은 거의 없더라고요.
이동조 남성 감독과 함께 일하면 힘을 잘 써서 좋은 점도 있죠. 그런데 성별을 떠나 무대감독은 음악과 연주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게 기본 마인드입니다. 10년 넘게 많은 사람과 함께 일하면서 그 생각이 더 짙어졌어요.
이수미 처음엔 잘 몰랐는데, 무대감독은 공연장을 오가는 많고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요. 특히 기획사와 연주자 사이에서 많은 부분을 조율하죠. 그래서 막연히 말을 잘하고, 또 많이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잘 듣는 것이 무대감독에게 중요하다는 걸 느껴요.
이동조 과거와 달리 요즘 무대감독을 지망하는 사람들 중에는 음악 전공자가 점점 늘고 있어요. 제가 처음 일을 시작했던 13년 전과 비교했을 땐 달라진 풍경이죠. 휴일과 저녁 시간을 포기하고서라도 이곳을 첫 직장으로 택할 만큼 인식의 변화가 생겼다는 걸 느낍니다.
이번 드레스덴 필 내한 기간 동안 무대감독으로서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이수미 ‘연주자를 볼 때 공연을 앞두고, 긴장하거나 떨고 있는 사람, 사랑하고 감싸안아야 하는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이동조 감독님이 늘 하세요. 머리로는 알지만 그렇게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어요. 제겐 아직도 다 어려운 분들이시죠. 대가들이 지나가는 걸 보면 지금도 여전히 신기하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어요. 백건우 선생님이 피아노를 고르러 처음 오셨을 때부터 연습과 리허설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선생님을 지켜보니, ‘명연주자’라는 마음에 앞서 ‘사랑스럽다’는 기분이 들더라고요(웃음). 날씨가 더워서 러닝셔츠 바람으로 연습하는 순간조차 모든 부탁을 다 들어드리고 싶고, 더 편안하게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연주가 되도록 도와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이동조 제가 하는 일이 취재 대상이 될 줄 몰랐는데, 늘 기사로 보던 것을 직접 겪으니 한편으론 놀랍기도 합니다. 이수미 감독이 이번에 처음 피아노 전환을 맡아서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처음 일할 때가 생각났어요. 저 역시 갈 길이 먼, 무대감독이라 생각하는 터닝 포인트가 됐습니다.
글 김선영 기자 사진 심규태
아주 개성적인 덧마루를 아세요?
“계단 아닌가요?” 평소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관악·타악 연주자들이 올라가 있는 나무 패널을 기억하는가. 덧마루로 불리는 이것은 의도에 따라 공연장 바닥의 일부를 높이기 위해 일정 규격의 마루를 겹치도록 쌓는 것으로, 음악 외 연극 무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이 덧마루의 기능을 묻는 질문에 당신이 위와 같은 답을 내놓을 생각이라면, 잠시 이동조 무대감독의 말에 귀기울여보길 바란다.
“덧마루의 사용법에 따라 음향 효과가 달라집니다. 과거 사이먼 래틀과 베를린 내한 공연 때 일이에요. 콘트라베이스는 보통 15cm 높이의 단 위에 올라가는데, 30분 정도 리허설을 한 후, 래틀이 콘트라베이스의 높이를 15cm만 더 높여달라더군요. 그 후에 래틀의 만족스러워하던 표정이 지금도 기억나요. 반면 뉴욕 필을 포함한 몇몇 미국 오케스트라는 아예 덧마루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현악·관악·타악 편성 모두 일렬로 평면 높이에 자리하죠. 그 악단의 관습, 그 편성의 사운드, 지휘자의 스타일이 오롯이 투영된 것이 바로 덧마루 높이죠.”
참고로, 덧마루의 위치와 높이는 매 오케스트라 공연마다 늘 바뀐다. 콘서트홀에 고정으로 설치된 것이 결코 아니며, 모든 덧마루는 음악당 무대감독들이 매번 100% 손으로 쌓아올린다.
REVIEW | 백건우 협연, 잔덜링/드레스덴 필 공연
대숲 같은 치밀함과 풀 같은 부드러움
베토벤 님께. 올해 들어 당신의 음악과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이반 피셰르/RCO에 이어 6월 26~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미하엘 잔덜링과 드레스덴 필하모닉, 그리고 백건우가 노래한 당신의 피아노 협주곡 3번과 4번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보통 미술을 공간 예술에, 음악을 시간 예술에 비유합니다. 2013년 처음 내한한 잔덜링과 드레스덴 필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을 통해 음악이야말로 진정한 시간 예술임을 증명했습니다. 그가 지휘한 평소 느끼던 박동과는 전혀 다른 심박 수로 뛰었던 것입니다. 변화가 큰 연출력과 설득력이 강한 해석. 그래서 당신의 피아노 협주곡 3번과 4번이 백건우와 어떻게 만날지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많은 이가 백건우를 ‘건반 위의 구도자’라고 합니다. 구도자, 깨달음의 경지를 구하는 이를 뜻하죠. 그런데 저는 ‘구도자’ 하면 ‘걸음’이 떠오릅니다. 구도를 위한 ‘걸음’을 떼기 전, 피아노로 자신이 빠져들었던 작곡가에게 말을 ‘걸음’으로써 여정을 시작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는 어떤 곡이든 늘 진지하게 시작합니다.
협주곡 3번. 잔덜링의 서주 후에 말을 거는 구도자의 음성은 포효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면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당신의 악곡을 파고들었죠. 그러고는 그 특유의 터칭으로 선율과 음들을 올올이 세웠습니다. 꼿꼿한 대숲처럼 말입니다. 잔덜링은 강한 바람으로 그 대나무와 잎을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구도자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걸었습니다. 저돌성이 돋보였죠. 그런가 하면 라르고로 노래하는 2악장에서 두 사람은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피아노가 읊조리듯 부르는 느린 노래를 듣는데, 이상하게도 제 심장이 빨리 뛰었습니다. 음악이 느리게 울 때 심장은 빨리 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협주곡 4번. 전날과 달리 구도자는 편안하게 말을 걸었고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그의 터칭은 당신의 음표들을 풀처럼 세웠습니다. 김수영 시인이 말한 대로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처럼. 그리고 그는 잔덜링이 불어 보내는 바람과 나긋이 이야기했습니다. 치밀한 구도자라기보다는 넉넉한 방랑자 같았습니다.
베토벤 님. 이렇듯 당신이 남긴 두 협주곡을 통해 그날 모인 이들은 구도자의 양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나무 같은 꼿꼿함과 풀 같은 부드러움을 말입니다.
이튿날 잔덜링은 당신의 교향곡 7번을 노래했습니다. 2013년 파보 예르비가 당신에게 착 붙는 스키니 진을 입혀 날렵한 몸매가 드러나게 했다면, 올 봄 피셰르는 이음매가 매끄러운 고급 정장 바지를 입혀 고급스러움을 연출했고, 잔덜링은 당신에게 면바지를 입힌 듯했습니다. 편안하면서도 활력 있었던 연주였습니다. 다가올 11월 게르기예프와 뮌헨 필, 그리고 백건우가 당신의 협주곡 5번을 노래합니다. 그 구도자의 말 ‘걸음’과 발 ‘걸음’은 어떨까요.
글 송현민(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