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2막에는 일명 ‘장미 전달식’이라 불리는 이 오페라 최고의 장면이 등장한다. 메조소프라노가 노래하는 젊은 귀공자 옥타비안이 은 장미를 들고 곧 신부가 될 조피에게 혼인의 의사 표시를 대신 전하는 대목이다. 워낙 인기 있는 작품이라 수많은 음반과 영상물이 이미 나와 있다. 저 멀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전설적 모노 레코딩에서부터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지휘하는 바덴바덴 페스티벌의 최신 실황 영상까지 선택지만 수십 가지다. 그런데 평단과 애호가들은 ‘장미 전달식’에서만큼은 단 하나 공연에 만장일치에 가까운 의견으로 찬사를 보낸다. 바로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봉을 들었던 1994년 빈 국립 오페라의 공연인데, 여기서 옥타비안을 노래한 것이 메조소프라노 안네 소피 폰 오터(Anne Sofie von Otter)다. 그녀의 가창은 실로 기념비적이었다. 오페라 속 대사를 인용해 그녀의 노래를 묘사하자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마치 천국의 인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소피 폰 오터는 지금도 ‘최고의 옥타비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그녀가 7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스웨덴 태생인 소피 폰 오터는 이탈리아 출신 체칠리아 바르톨리와 함께 우리 시대 최고의 메조소프라노로 군림하고 있다.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유럽 각지에서 생활했으며, 음악 공부는 영국 런던의 길드홀 음악학교에서 시작했다. 학창 시절부터 오페라보다는 예술가곡에 심취해 특유의 단정하면서도 품위 있는 가창 스타일을 일찍부터 연마했다. 졸업 후 1982년에는 바젤 오페라의 정단원이 되는데, 이 시기의 경험이 이후 그녀가 폭넓은 레퍼토리를 가능케 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다. 직역하면 ‘앙상블 구성원’이 되는 독일 오페라의 정단원 시스템은 소속 가수들이 한 해 동안 시즌제로 공연되는 수많은 오페라에 거의 전부 순번제로 참여하는 방식이다. 이건 작품별로 별도의 오디션을 거쳐 주역을 따로 선발하는 전통적인 이탈리아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그래서 독일 오페라 극장의 정단원이 되면 비발디와 헨델의 바로크 오페라부터 모차르트, 베르디, 푸치니, 바그너를 거쳐 알반 베르크와 한스 베르너 헨체의 현대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오페라 레퍼토리를 다 경험한다. 소피 폰 오터 또한 이때의 경험이 자신의 음악적 지평을 넓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녀는 하이든의 오페라로 데뷔한 이래 몬테베르디의 바로크 오페라에서 시작해 모차르트의 고전적 작품을 거쳐 R. 슈트라우스와 현대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치우침 없고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중이다.
다채로운 빛을 띤 소피 폰 오터의 매혹적인 목소리
1980년대 중반부터 미주와 유럽의 저명한 음악 페스티벌에 초청되기 시작한 그녀는, 특히 1994년 존 엘리엇 가드너가 지휘하고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가 함께한 모차르트 C단조 미사를 통해 단숨에 최정상의 메조소프라노로 급부상한다. 맑고 부드러우면서도 담백한 힘이 느껴지는 음색, 단정하면서도 여유 있는 중성적 매력 속에 피어나는 호방한 표현력은 종교음악과 가곡, 오페라를 아우르며 어느 분야에서나 큰 찬사와 환호를 이끌어냈다.
콘서트 가수로도 대단히 뛰어난 역량을 보였는데, 특히 시어를 해석하는 능력이 정교하고 뛰어나 다수의 언어를 넘나들며 수많은 가곡에서 최고의 해석을 들려주었다. 말러와 브람스, 후고 볼프의 가곡에서는 독일 가곡 특유의 담담하고 이지적인 서정과 분석적 면모를, 그리그와 시벨리우스의 곡들에서는 북유럽의 투명한 신비감이 넘치는 아름다운 가창으로 멜랑콜리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바로크부터 현대까지 광범위한 클래식 음악 레퍼토리는 물론이고,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고 팝과 재즈를 서슴없이 부를 정도로 자유분방한 면모를 과시하기도 한다. 록 스타 엘비스 코스텔로와 함께 싱글을 발표해 큰 화제를 모았고, 거장 재즈 피아니스트 브래드 멜다우와도 레코딩을 남겼다. 특히 2013년에는 ‘부드러운 프랑스’를 통해 프랑스 레퍼토리에 대한 압도적 자신감을 과시했다. 소피 폰 오터는 이 음반에서 19세기 프랑스 작곡가인 포레·생상스·라벨·드뷔시의 감미로운 가곡과 ‘빠담빠담’ ‘장밋빛 인생’ 등 20세기 프랑스 불후의 샹송들을 특유의 유려한 음색으로 멋들어지게 소화했고, 해당 음반은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따뜻한 온기가 있고 담백함 속에 짙은 멜랑콜리와 강렬한 열정이 살아 있으며 우아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섬세한 표현, 자연스러운 딕션으로부터 이어지는 이지적인 분석력과 품격 있는 무대 매너 등으로 관객을 매혹시키는 소피 폰 오터의 매력은 실로 ‘찬란한 오후의 햇살’에 비유할 만하다. 무대 위 디바는 소프라노라는 공식을 깨고 메조소프라노의 전성시대를 개척하며 지난 30년간 정상의 자리를 단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그녀. 그 아름다운 신비의 목소리가 우리 앞에서 직접 펼쳐질 그 시간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섬세하고 깔끔한 카밀라 틸링의 음색
2013년,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한 ‘마태 수난곡’은 21세기 공연사에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거장 연출가 피터 셀라스의 극화 작업을 통해 움직임과 연기가 더해진 공연 예술로 재탄생한 이 작품에서 솔리스트들과 합창단, 그리고 오케스트라는 바흐의 장대한 종교음악을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오페라’로 만들어놓았다. 특히 각 성부의 솔리스트들은 절제되면서도 극적인 노래로 커다란 감동을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소프라노 독창자로 출연해 찬란하면서도 성스러운 노래를 들려준 카밀라 틸링(Camilla Tilling)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스웨덴 태생인 카밀라 틸링은 예테보리 대학교와 런던 왕립음악원을 졸업한 후 ‘호프만의 이야기’ 중 올랭피아 역으로 데뷔한다. 2002년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된 ‘장미의 기사’에서 조피 역을 노래한 것을 기점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후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밀라노 라 스칼라 등에 연이어 출연하며 격찬을 받았다.
절제된 비브라토와 담백하고 직선적인 음색은 모차르트와 R. 슈트라우스, 바로크 시대 오페라 등에서 활약하는데, 특히 수전 그레이엄과 함께 녹음한 ‘디도와 에네아스’에서 그녀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섬세하고 깔끔한 목소리 덕에 오페라 외에도 훌륭한 콘서트 가수로도 인정받고 있는데, 베를린 필, 파리 오케스트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NDR 심포니, 보스턴 심포니 등과 협연해왔으며, 특히 최근에는 뉴욕 필과 함께 베르크의 ‘7개의 초기 가곡’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가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R. 슈트라우스의 ‘4개의 마지막 노래’를 불러 큰 박수를 받았다.
이미 다수의 음반과 영상을 남겼는데 베를린 필의 ‘마태 수난곡’을 비롯해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지휘 아래 소프라노 독창자로 참여한 말러 교향곡 4번 등이 유명하다. 그 밖에 메시앙의 오페라 ‘아시시의 성 프랑시스’와 R. 슈트라우스와 슈베르트의 가곡을 녹음한 두 개의 리사이틀 음반과 폴 매크리시가 지휘한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 거장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의 꼼꼼한 지휘봉 아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한 하이든의 ‘천지창조’ 등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지닌 매력을 충분히 살필 수 있다.
색다른 레퍼토리, 시적인 무대
북구를 대표하는 두 성악가의 이번 무대는 그녀들의 조국인 스웨덴의 전설적인 여가수 두 명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19세기 ‘스웨덴의 나이팅게일’로 불리던 소프라노 예니 린드(1820~1887)와 역사적인 바그너 가수로 불리며 지금도 수많은 이에게 사랑받고 있는 20세기의 대표적인 프리마 돈나 비르기트 닐손(1918~2005)이 그들이다.
예니 린드는 안데르센을 비롯하여 멘델스존, 쇼팽 등 당대 최고 예술가들의 뮤즈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영국에서 전설적인 명성을 쌓았는데, 빅토리아 여왕까지도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전성기에는 예니 린드의 이름이 붙은 모자, 장갑, 가구, 피아노 등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는 섬세한 기교와 아련한 음색으로 유명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기억되고 있다.
한편 비르기트 닐손은 20세기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였으며, 뛰어난 R. 슈트라우스 오페라 해석가였다. 동시에 푸치니의 ‘투란도트’에서 폭발적 가창과 서늘한 카리스마로 무대를 지배하며 ‘스웨덴의 암사자’로 불린 대표적인 드라마틱 소프라노였다. 이번 내한 공연에서 소피 폰 오터와 카밀라 틸링은 이들이 과거에 불렀거나 이들과 인연이 많은 작곡가들의 가곡을 솔로와 듀엣으로 들려줄 예정이다.
1부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그리고 독일의 노래가 연주된다. 특히 아돌프 린드블라드와 에드바르 그리그의 가곡이 기대를 모은다. 린드블라드는 200곡이 넘는 스웨덴어 가곡을 남긴 ‘스웨덴의 슈베르트’였다. 특히 그의 곡 중에는 예니 린드를 위해 헌정하거나 그녀를 염두에 두고 작곡된 곡이 많다. 소피 폰 오터와 카밀라 틸링은 ‘어느 여름 날’ ‘경고’ ‘어린 소녀의 아침 명상’을 부른다.
이어 카밀라 틸링이 그리그의 ‘6개의 노래’ Op.48 전곡을 연주한다. 노르웨이 태생의 그리그는 젊은 시절 베를린 등지에서 유학하며 리트에 관한 탄탄한 기초를 쌓았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노르웨이어 가곡과 독일어 가곡을 섞어 여러 곡 썼는데, 북유럽 특유의 서정을 투명하게 표현하면서도 리트풍의 단정하고 소박한 감동이 살아 있어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번 공연에서도 ‘어느 날, 내 마음이’ ‘나이팅게일의 비밀’ 등 그리그 가곡 특유의 담백한 아름다움을 전해줄 노래들이 연주된다. 이어서 슈베르트의 유명한 리트가 소피 폰 오터의 목소리로 불리며, 멘델스존의 듀엣곡도 예정되어 있다.
2부는 근대 프랑스와 리트로 꾸며진다. 쥘 마스네의 화사하면서도 귀여운 프랑스어 가곡 ‘환희’와 포레의 명곡 ‘금빛 눈물’이 듀엣으로 이어진다. 프랑스어 딕션이 좋기로 소문난 두 사람의 섬세한 목소리가 기대된다. 마이어베어의 독일어 가곡도 들을 수 있다. 파리에 살며 프랑스 그랜드오페라로 일세를 풍미하던 그였지만, 고국 독일어로 쓴 세 곡의 노래도 각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흔히 듣기 어려운 레퍼토리라는 점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모은다. 마지막은 R. 슈트라우스의 아름다운 후기 낭만주의 가곡들이다. 절제된 비브라토와 담백한 서정, 투명한 은빛 목소리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명의 여가수에게는 어쩌면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쉬어라, 나의 영혼아’ ‘황혼의 꿈’ 등을 노래한다
이번 공연의 피아노는 줄리어스 드레이크가 맡았다. 그는 가곡 반주 분야의 독보적인 대가일 뿐 아니라, 성악가들과의 호흡과 음악적 대화를 대단히 중시하는 시적인 피아니스트다. 두 명의 세계적인 스웨덴 프리마 돈나들과 드레이크가 보여줄 정밀한 호흡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우리의 가을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시간이 될 것이다.
사진 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