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토르 빌라 로부스 ①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9월 1일 12:00 오전

내가 브라질의 포크 뮤직이다!

1887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출생

1915첫 작품 발표회

1917‘우이라푸루’ 작곡

1926‘루데포에마’ 완성

1938‘브라질풍의 바흐’ 5번 작곡

1939‘뉴욕 스카이라인 멜로디’ 작곡

1959사망

라틴아메리카는 이베리아 반도의 옛 영광과 원주민의 찬란한 문명, 그리고 비극적인 역사를 간직하며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그 삶의 모습은 브라질 작곡가 에이토르 빌라 로부스(1887~1959)의 음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빌라 로부스는 제오르제 에네스쿠(‘객석’ 8월호에 실린 이달 주목해야 할 화제의 작곡가)처럼 오직 한 곡, 여덟 대의 첼로와 소프라노를 위한 ‘브라질풍의 바흐’ 5번(1938)만이 유명하지만, 무려 1000곡(리자 페페르코른은 1200곡, 존 두아트는 2000곡이라고 언급) 이상을 작곡했다. 그는 힌데미트처럼 어떤 상황에서든 빠르게 작곡하는 능력이 있었다. ‘브라질풍의 바흐’ 2번(1930) 1악장은 한 시간 동안의 기차 여행 중에 완성됐고, 피아노곡 ‘뉴욕 스카이라인 멜로디’(1939)는 뉴욕의 풍경을 보고 순간적으로 작곡했다. “공기 중에 떠도는” 음악을 찾는다는 엘가의 말은 빌라 로부스에게도 들어맞는다.

빌라 로부스의 음악은 바흐의 음악형식과 뒤카·드뷔시·댕디 등 프랑스 작곡가들의 오케스트레이션과 바그너·푸치니·스트라빈스키의 극적 표현력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 브라질 민속음악적 요소가 휘감고 있다. 정글 속에서 들릴 법한 새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한마디로, 그의 음악에는 그가 접한 모든 것이 녹아 있다. 풍부한 관현악의 색채와 역동적인 멜로디, 리듬이 발산하는 힘찬 에너지로 기분을 한껏 고조시킨다. 하지만 빌라 로부스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파리 체류 시절, 기자들이 브라질 포크 뮤직이 무엇인지 질문했을 때 했던 대답에 있다. “내가 포크 뮤직이다.” 빌라 로부스는 브라질 음악을 사용해 클래식 음악을 작곡한 것이 아니라 브라질 음악을 작곡한 것이다.

초원과 정글 속에서 익힌 음악

빌라 로부스는 1887년 3월 5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국립도서관 수석 사서였으며,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다. 6세부터 아버지에게 음악이론기초와 첼로·클라리넷을 배우기 시작했고, 기타와 피아노를 독학으로 익혔다. 이중 전공한 악기는 첼로였지만, 선호하는 악기는 기타였다. 어릴 때부터 기타를 들고 연주단과 함께 거리 연주를 했으며, 완벽하게 즉흥 반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기타 실력이 뛰어났다. 민속음악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체득됐다. 피아노 실력도 자신의 곡을 곧잘 연주하고 녹음할 정도로 뛰어났다. 마지막 부인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아르민다 민디냐는 빌라 로부스가 독학을 했음에도 상당한 기교를 갖춘 데 대해 놀라워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곡은커녕 C장조 음계도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다.

1899년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빌라 로부스는 생계를 위해 극장 오케스트라에서는 첼리스트로, 길거리 밴드에서는 기타리스트로 생활했다. 인디언계였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핏줄의 영향일까. 유럽 고전음악보다 민속음악에 더 큰 흥미를 느낀 그는 결국 음악원을 그만두었다. 어려워진 집을 뛰쳐나가 18~25세 사이 기타 하나를 메고 브라질 여러 지역의 초원과 정글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민속음악을 들었다(여행 중 식인종에게 쫓겼다지만 그리 믿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여행으로 어디에서 공부했느냐는 질문에 지도에서 브라질을 가리키며 “여기가 내가 다닌 음악원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빌라 로부스는 민속음악을 단 한 번도 인용한 적이 없는데, “좋은 민속 선율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 버르토크의 언급이 빌라 로부스에게도 적용된다. 하지만 자크 메렐은 빌라 로부스가 이렇게 광범위하게 여행한 적이 없으며, 민족학자인 호케치 핀투의 수집물에서 정보를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작곡을 시작하다

여행 후 리우데자이네루로 돌아온 빌라 로부스는 영화관과 카페 등에서 첼로를 연주하며 생활했다. 마스네의 제자였던 프란시스쿠 브라가와 영화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이르네스투 나자레트에게서 작곡을 배웠지만, 민속음악을 고전음악의 형식에 맞출 수 없다고 생각해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고전음악 공부를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다. 바흐 연구는 음악 공부의 핵심이었고, 댕디가 파리 스콜라 칸토룸에서 가르치기 위해 쓴 작곡 논문들을 심도 있게 공부했다.

1915년 11월 13일 첫 작품 발표회 이후 정기적으로 발표회를 하면서 작곡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첼리스트 출신답게 첼로 협주곡 1번(1915)을 내놓았으며, 곧이어 두 개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우이라푸루’(1917) 등 관현악 작품도 셀 수 있을 만큼 완성됐다. 이 곡들은 대체로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유럽 낭만음악의 모습을 띠며, 특히 교향시는 브라질의 광활한 우림과 새소리·물소리 등 다양한 묘사로 브라질의 이미지를 강하게 담고 있다.

1918년은 빌라 로부스의 미래를 밝혀줄 두 거장을 만난 뜻깊은 해였다. 한 사람은 프랑스 6인조의 일원인 다리우스 미요로, 외교관 비서로서 리우데자이네루에 체류 중이었다. 미요는 빌라 로부스에게 드뷔시·사티·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알려주었고, 빌라 로부스는 미요에게 브라질의 거리 음악을 소개했다. 이 교류는 서로에게 값진 자양분이 됐다.


▲ 빌라 로부스와 교류했던 다리우스 미요

또 한 사람은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도중에 브라질을 방문했으며, 새로운 레퍼토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빌라 로부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곧 음악 동료가 됐다. 둘은 평생 가까운 친구로 지냈으며, 빌라 로부스는 루빈슈타인을 위해 ‘아기의 가족’ 1번(1918)과 2번(1921)을 썼다.

 


▲ 빌라 로부스의 음악 동료 아르투스 루빈슈타인

1920년을 전후해 빌라 로부스는 국가적 작곡가가 돼있었다. 브라질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휴전을 기념해 그에게 작품을 위촉했다. 이렇게 해서 교향곡 3번 ‘전쟁’(1919)이 탄생했다. 내친김에 교향곡 4번 ‘승리’(1919)와 교향곡 5번 ‘평화’(1920)를 작곡해 ‘전쟁 3부작’을 만들었다. 하지만 5번이 분실되는 바람에 ‘3부작’의 의미는 퇴색하고 말았다.

파리에서 보낸 시간

루빈슈타인 덕분에 유럽에 알려진 빌라 로부스는 후원을 받아 1923년부터 1930년까지 파리에 체류했다. 체류 목적은 공부보다 자신의 음악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바레즈·라벨·루셀·슈미트 등의 작곡가들을 만났고, 피카소·콕토와도 빨대와 같이 가느다란 시가를 마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친분을 나누었다. 빌라 로부스라는 용광로는 바흐와 브라질 민속음악에 파리에서 들은 프랑스 음악과 최신 작곡 기법들을 녹여 개성적인 음악을 탄생시켰다. 파리 대중은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그의 음악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아방가르드 음악가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얼마 후에 이 상황은 역전됐다. 브라질로 돌아온 이후에도 전쟁 기간을 제외하고 매년 봄에 파리를 방문할 정도로 이국적인 음악을 좋아하는 파리지앵에게 인기를 얻었지만, 평론가들은 진지함이 결여돼 보이는 그의 음악을 외면했다.

파리 체류 중 빌라 로부스는 많은 성과를 냈다. 기타를 위한 12개의 연습곡(1929)과 20분이 넘는 피아노 대작 ‘루데포에마’(1921~1926)는 숨 막히는 걸작이다. 연습곡의 헌정자인 세고비아는 이 곡을 높이 평가했다. “빌라 로부스는 기타 역사에 재능의 결실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스카를라티와 쇼팽에 견줄 만큼 역동적이고 기쁨을 지니고 있다.” 세고비아는 한 연주회에서 전곡을 모두 연주하지는 않았다. 대중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루빈슈타인을 위한 ‘루데포에마’는 ‘루빈슈타인의 시’ 혹은 ‘거친 시’라는 의미로, 댄 데이비스는 “‘봄의 제전’과 브라질의 정글이 만났다.”라고 표현했다.

‘소로스’, 브라질 향토색을 살린 음악

‘소로스(Chôros)’ 연작은 브라질 향토적 특징을 반영하면서도 그만의 형식을 도입해 빌라 로부스의 가장 독창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로’는 19세기 후반 리우데자이네루에서 시작된 브라질 대중가요로서 즉흥적인 반주가 곁들여진다. 빌라 로부스는 “내가 곧 ‘소로스’다. 이 형식을 창조한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했다. 상파울루 심포니의 상임지휘자였던 존 네쉴링은 이 언급에서 빌라 로부스라는 인물을 간파한다. “자신이 민속음악보다 더 중요하고 큰 인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브라질의 모든 음악이 그의 몸을 통해 흐른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1929년 한 인터뷰에서 “나는 민속음악 작곡가가 아니다. 민속음악은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다. 나는 사용할 멜로디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지 않는다.”라는 빌라 로부스의 언급은 네쉴링의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빌라 로부스의 ‘소로스’는 모자이크 형식과 유사하다. 음악 블록을 연결하는 형태이며, 한 음악 블록은 앞선 블록의 변주일 수도 있고, 대비되는 특징을 가질 수도 있다. ‘소로스’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즉흥연주와 유사한 효과를 낸다. 길거리에서 연주하는 ‘소로’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이 곡이 지닌 독특한 화음과 복잡한 복합 리듬, 화려한 기교 등으로 아방가르드 음악가들에게 주목을 받았지만, 프랑스와 브라질 음악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교양 있는 세련미와 거친 야성미의 공존으로 곧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소로스’는 번호가 붙어 있는 열두 곡과 다른 두 곡을 더해 모두 열네 곡이 있다. 규모 측면에서는 기타 독주곡 1번·피아노 독주곡 5번부터 피아노 협주곡 11번과 대관현악과 합창을 위한 대곡 10번까지 다양한 규모를 아우른다. 특히 ‘소로스’ 10번 ‘마음이 찢어지네’는 브라질 전통 타악기를 다수 포함해 총 열다섯 가지 타악기가 등장하며, 관현악곡 12번도 브라질 전통 타악기가 대거 등장한다.

앞 번호의 실내악곡들은 감성적인 선율을 지녀 대중적 측면이 강하지만, 후반부의 대규모 작품들은 대조적으로 구성이 복잡하고 바흐의 영향이 엿보이며 현대적 요소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일부는 1940년대 쓰였을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실제로 빌라 로부스는 여러 스타일로 작곡하고 작곡 순서를 의도적으로 바꾸곤 한 데다, 1929년 작곡됐다는 12번이 1945년이 돼서야 초연된 것은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어쨌든 빌라 로부스의 주장에 따르면, 1920년 작곡된 1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리 체류 중에 작곡됐다. 13번과 14번도 있었는데, 빌라 로부스의 가까운 친구였던 피아니스트 아나 스텔라 쉬크의 회고록 ‘빌라 로부스, 백인 인디언에 대한 추억’에 의하면, 귀국하는 과정에서 분실되고 말았다. 작곡가에 의한 분석이 남아 있지만, 악보를 본 사람은 없는 것 같다.

 


▲ 브라질에 있는 빌라 로부스 박물관 ©Villa-Lobos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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