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토르 빌라 로부스②

COMPOSER OF THE MONTH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0월 1일 12:00 오전

브라질의 바흐가 되다

1887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출생

1915첫 작품 발표회

1917‘우이라푸루’ 작곡

1926‘루데포에마’ 완성

1938‘브라질풍의 바흐’ 5번 작곡

1939‘뉴욕 스카이라인 멜로디’ 작곡

1959사망

‘브라질풍의 바흐’ 5번 중 1악장 ‘아리아’ 한 곡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브라질의 작곡가 에이토르 빌라 로부스(1887~1959). 하지만 그는 1000곡 이상을 남긴 다작가였으며, 브라질을 음악원 삼고 스스로 브라질 음악의 화신임을 자처했다. 그리고 현재는 브라질 음악 그 자체로 추앙받고 있다.

빌라 로부스는 어린 시절 기타를 독학하여 리우데자이네루의 대중음악인 소로를 마스터했으며, 20대 초 브라질 전역을 돌며 다양한 민요를 들었다. 20대 후반부터 바흐의 음악과 뱅상 댕디의 교재로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유럽의 낭만음악을 기반으로 브라질의 토속적 향취를 갖는 요소들을 가미한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던 중 브라질을 방문한 다리우스 미요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교제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파리로 진출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빌라 로부스는 1923년부터 1930년까지 짧지 않은 파리 체류 기간에 ‘소로스’ 시리즈를 작곡하고 ‘브라질 음악가’로서 정체성을 확립했다.

정치 혼란 속에서도 굳건했던 음악적 위치

1930년 브라질에 돌아온 빌라 로부스는 성공한 음악가로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솔직히 국가적 환영에는 다른 속뜻이 숨어 있었다. 그해 쿠데타로 집권한 제툴리우 바르가스 정권이 정치적 이미지를 대내외적으로 쇄신하기 위해 그를 활용한 것이다. 빌라 로부스는 1932년 예술 및 음악교육 감독이라는 직책을 맡았으며, 필립 클라크의 표현을 빌리면, 브라질의 음악 장관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음악 분야에 막강한 권력자가 되었다. 이후 여러 쿠데타와 선거로 정권이 수차례 바뀌었지만 이 와중에 바르가스는 두 차례나 재기에 성공했으며, 빌라 로부스는 1950년대까지 약 20년간 이 직책을 유지했다. 비록 정치적인 상황으로 얻게 된 자리지만 그는 실제로 이 직책에 걸맞게 음악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상파울루 심포니의 상임지휘자였던 존 네쉴링은 “그가 학교를 위해 저술한 교본들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중략) 그는 브라질에게 노래하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그가 브라질 음악 교육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했다.


▲ 제틀리우 바르가스(왼쪽)과 빌라 로부스(오른쪽)

 

빌라 로부스의 기념비적 연작 ‘브라질풍의 바흐’는 바로 이 시기에 탄생했다. 과거에도 바흐의 영향을 여러 작품에서 보여주었지만, 이 연작은 의도적으로 바흐에 대한 오마주임을 표방하며 형식적 측면에 많은 공을 들였다. 바흐의 모음곡들이 당시 춤곡을 기반으로 했듯이 브라질의 전통춤과 노래로 모음곡을 구성하면서, 대위적인 복잡한 진행과 아리오소적 멜로디에는 빌라 로부스화한, 혹은 브라질화한 바흐의 이면을 숨겨놓은 것이다. 그래서 ‘브라질풍의 바흐’는 ‘소로스’ 시리즈보다 클래식 음악다운, 정통성에서 오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파리에서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한 1930년, ‘브라질풍의 바흐’ 1번과 2번, 4번을 비슷한 시기에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관현악곡인 2번(1930)이 먼저 완성됐다. 이후 한참 후에 첼로 앙상블을 위한 1번(1938)과 피아노 협주곡인 3번(1938), 플루트와 바순의 이중주 6번(1938)을 선보였다. 이들은 ‘소로스’에서 들려준 역동적인 리듬을 이어받은 후속작들이었다. 특히 2번의 4악장 ‘카이피라의 작은 기차’는 기차를 묘사한 작품으로 음악 속 효과가 단연 최고다.

오랫동안 손대지 못한 피아노곡이기도 하고 관현악곡이기도 한 4번(1941)도 드디어 완성했고, 관현악곡인 7번(1942)과 8번(1944)도 순조롭게 진행했다. 관현악 3부작이라고 부를 만한 이 세 곡은 앞서 완성된 곡들과는 달리, 두터운 화음과 세련된 멜로디가 돋보인다. 특히 바흐의 아리오소적 선율을 연상케 하는 멜로디는 세레나데에 견줄 수 있는 브라질의 감성적인 노래 모지냐에 투영됐다. 빌라 로부스는 서정적인 작품을 쓸 때 대부분 모지냐를 염두에 두었으며, 그만큼 그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유럽의 낭만적인 감성도 비교적 강하게 느낄 수 있는데, 신고전으로 변화를 준비하는 발판으로 보인다.

3·6번과 비슷하게 시작한 소프라노와 여덟 대의 첼로를 위한 5번(1945)도 뒤늦게나마 완성했고, 마지막으로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9번(1945)으로 연작을 마무리했다. 5번은 빌라 로부스의 모든 곡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첫 악장은 유럽의 낭만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서정적 선율을 갖고 있으며, 빌라 로부스는 첼로에서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움을 뽑아낸다. 2악장은 브라질의 전통 춤을 연상케 하는 빠른 리듬과 지극히 기교적인 보컬을 들려주어 1악장과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1940년 전후 모습을 각각 한 악장씩 나눠 담은 경계의 작품이다.

‘브라질풍의 바흐’가 바흐에 대한 오마주라면,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브라질의 발견’(1937)은 그의 땅 브라질에 대한 오마주다. 순수한 인디언들과 1500년에 브라질을 발견한 포르투갈인들, 그리고 후에 브라질로 들어온 스페인인과 무어인의 음악을 사용하여, 피에르 비달의 표현을 빌리면, “마법처럼 당시의 분위기를 시적으로 만들어냈다.” 자크 메렐은 “사랑하는 조국의 풍경을 카메라로 찍은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마지막 곡 ‘브라질에서의 첫 미사’는 인디언의 야성적인 리듬을 배경으로 부르는 라틴어 성가로, 빌라 로부스의 음악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곡은 본래 한 해 전에 완성된 움베르토 마우로의 동명의 영화를 위해 작곡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경험이 그리 탐탁지 않았는지, 이후 영화 음악은 전혀 손대지 않았다. 그러다가 20년 후인 1958년에 ‘그린 맨션’이라는 영화의 음악을 위촉받았는데,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가 간곡한 요청에 승낙을 했다. 하지만 원작 소설의 분위기는 고려하겠지만 영화 대본은 무시하겠다는 희한한 조건을 달았다. 이 곡이 ‘아마존의 숲’으로, 음악적 측면뿐 아니라 브라질을 탐험한다는 내용의 측면으로도 ‘브라질의 발견’과 쌍을 이룬다.


▲ ‘아마존의 숲’이 삽입된 영화 ‘그린 맨션’

 

교향곡과 협주곡에 나타난 조국애

빌라 로부스는 최후 10여 년 동안 시대의 아이콘으로, 그리고 국가의 아이콘으로 동상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후기의 그의 음악은 비슷한 시기의 두 작곡가, 이웃나라 아르헨티나의 히나스테라와 같이 신고전의 경향을 띠었으며, 미국에 이주해 있던 스트라빈스키와 같이 현대적으로 발전했다. 현대적인 효과를 배가하기 위한 극한의 기교를 요구하는 것은 덤으로 따라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협주곡의 등장이다. 고전적 형식과 비르투오소적 독주를 겸비한 협주곡은 이 시기의 빌라 로부스에게 가장 매력적인 장르였을 것이다. 사이먼 라이트는, 빌라 로부스는 독주악기에 자신과 그의 정신을 투영했으며, 관현악은 바탕 혹은 배경이라고 말한다. 즉, 협주곡은 브라질의 정글과 초원, 산, 강 등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이것이 그가 협주곡에 집중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협주곡은 피아니스트였던 루실리아 기마랑이스와 결혼한 1913년에 그녀를 위해 작곡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에서 출발한다. 이후 바이올린과 첼로, 바순이 독주악기로 등장하는 곡들을 쓰기도 했지만, ‘카니발의 왕’이라는 뜻의 ‘모모프레코체’(1929·31)와 ‘소로스’ 11번(1928), ‘브라질풍의 바흐’ 3번 등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작품들이 단연 돋보인다. 하지만 첼로 협주곡 1번(1915)을 제외하고는 모두 ‘협주곡’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나름대로 독특한 형식을 추구했다.

그래서 후기의 협주곡들에 명명된 ‘협주곡’이라는 제목은 신고전적 경향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섯 개의 피아노 협주곡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위촉으로 시작된 이 협주곡들을 작곡하면서 빌라 로부스는 협주곡 형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고민 끝에 음악 블록을 연결하는 모자이크와 유사한 ‘소로스’의 형식에 접목했고, 블록들이 고전적 의미로 발전하는 모습을 띠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것은 초기작인 첼로 협주곡 1번에서 시도하던 형식을 발전시킨 것으로, 피아노 협주곡 1번(1945)에서 이렇게 형식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이후 협주곡들을 빠르게 작곡할 수 있는 돌파구를 열었다.

이외에도 색소폰·기타·하프·첼로·하모니카 등을 위해 협주곡을 작곡했다. 이 중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은 기타 협주곡(1951)으로, 앞서 파리 시절 12개의 연습곡(1929)으로 빌라 로부스를 크게 호평한 기타리스트 세고비아에게 헌정됐다. 하지만 세고비아는 이 곡에 카덴차가 없다고 항의했다. 이에 빌라 로부스는 카덴차를 삽입해주었고, 새로운 악보를 받은 세고비아는 1956년에 기타 협주곡을 초연했다. 하모니카 협주곡은 하모니카를 독주 악기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데, 하모니카 협주곡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곡으로 손꼽힌다.

교향곡의 재기도 중요한 변화다. 분실된 교향곡 5번 ‘평화’(1920) 이후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았던 교향곡은 24년이 지난 후인 1944년에 다시 새로운 번호가 이어져 12번에 이르렀다. 그런데 초기 교향곡들을 포함하여 교향곡 6번 ‘브라질의 산세(山勢)에 대하여’(1944)와 교향곡 10번 ‘아메린디아(아메리칸 인디언의 땅)’(1952)를 제외하고는 타이틀이 없는 절대 음악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후기의 교향곡과 협주곡들이 절대 음악적 외형을 갖추고 브라질 민속음악적 특징이 작곡기법에 의해 은닉되는 경향은 클래식 음악 작곡가로서, 그리고 신고전주의 작곡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17곡의 현악 4중주다. 빌라 로부스는 1920년대를 제외하고 그의 음악 인생 전반에 걸쳐 현악 4중주곡을 작곡했다. 이 곡들은 ‘소로스’ ‘브라질풍의 바흐’ 등과 달리 단 한 곡도 부제를 갖지 않고 있다. 이는 현악 4중주야말로 이들 연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작곡가의 신고전주의적 입장을 대변하는 연작임을 뜻한다.


▲ 빌라 로부스가 직접 지휘한 자신의 음반

 

빌라 로부스 말년의 초상

1954~1958년에 빌라 로부스는 파테-마르코니 EMI에서 라디오 프랑스 필과 함께 자신의 음악을 망라하는 녹음을 남긴다. 이 녹음은 ‘브라질풍의 바흐’ 전곡과 함께 ‘두 개의 소로스’, ‘소로스’ 2·5·10·11번, ‘모모프레코체’, 교향곡 4번 ‘승리’, 피아노 협주곡 5번에 이르며, 대작 ‘브라질의 발견’도 포함되어 있다. 녹음을 담당한 예술감독은 르네 샬랑으로, 빌라 로부스는 그에 대해 “그의 불같은 열정이 나를 압도했다. 그리고 관현악단으로부터 그가 원하는 것을 한결같이 얻어내는 조용한 끈기를 갖고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이 녹음은 작곡가 자신의 연주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네쉴링은 빌라 로부스의 지휘 실력이 뛰어나지 못한 탓에 그 연주들이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말한다.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여러 뛰어난 연주자들이 빌라 로부스의 작품을 녹음하고 있다.

그는 말년에 미국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고 다수의 위촉을 받는 등 국제적인 위상이 한껏 높아졌다. 소련과 일본을 방문할 계획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죽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빌라 로부스에게 “내게 음악은 ○○이다”의 질문에 답하라 한다면, 그는 ○○ 안을 무엇으로 채울까? 한 가지 예상되는 답안은 ‘자식들’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자식들’이라고 부르곤 했다. 또 하나 예상 답안은 ‘편지’다. “나의 작품은 후대에게 쓰는 편지다. 답장을 기대하지 않는다.” 후대인 우리도 그에게 감상이라는, 수취를 기대하지 않는 답장을 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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