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면에서 올해 금호아트홀 상주 음악가로서 네 차례 무대를 기획한 조진주의 공연은 시작부터 기자의 관심을 끌었다. 각 공연의 주제는 ‘시작’ ‘청춘’ ‘방황’ ‘추억’으로, 음악가로서 자신의 인생을 그리는 듯한 주제의 선택이 대담하게 느껴졌다. 레퍼토리도 신선했다. 지난 1월의 ‘시작’에서는 찰스 아이브스·조지 거슈윈 등 미국 작곡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하여 ‘신세계’의 이미지를 통해 그녀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4월의 ‘청춘’은 청춘의 낭만을 연상시키는 작품들 사이에, 각 악장마다 ‘집착’ ‘우울’ ‘그림자의 춤’ ‘격노’라는 표제를 지닌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을 심어놓은 프로그램이 참신했다. 청력의 상실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베토벤과 정신분열로 괴로워하던 슈만 등의 작품으로 구성한 7월의 ‘방황’도 인상 깊었다.
10월의 첫날, 조진주가 금호아트홀 상주 음악가로서의 마지막 무대에 올랐다. 피아니스트 김현수와 함께 연주하던 지난 세 차례의 공연과는 달리, 피아니스트 토머 게비르츠만, 첼리스트 조예은과 함께한 트리오 구성이었다.
이날 공연에는 ‘추억’을 주제로 슈베르트와 피아졸라, 스메타나의 작품을 연주했다. 말년에 작곡한 피아노 3중주 D898에서 슈베르트는 짧았던 생애를 추억하며 삶의 여러 풍경을 작품에 담으려는 듯 다양한 음형의 모티브를 사용했는데, 조진주는 시시각각 음색을 변화시키며 각 풍경에 어울리는 색채를 연주했다. 피아졸라의 ‘겨울’ ‘망각’ ‘천사의 죽음’은 안정감 있고 확신에 찬 연주로 망설임이 없었고, 맞춤옷을 입은 듯 조진주의 풍부한 감성이 빛을 발했다.
2부에는 스메타나의 피아노 3중주 Op.15를 연주했다. 스메타나의 첫딸이 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시름에 잠겨 쓴 작품이다. 딸을 잃은 비통함과, 함께했던 아름다운 추억이 교차하는 3악장에서 조진주는 때로는 거센 바람으로, 때로는 그 바람에 흔들리는 가냘픈 나뭇잎으로 모습을 바꿔가며 드라마틱한 연주를 선보였다.
조진주는 내적으로 더욱 견고해진 듯하다. 마치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을 얻은 듯 자신감에 찬 연주였다. 여기에 ‘잘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자’는 결심이 참신한 기획과 완성도 높은 무대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임형준
10월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기돈 크레머의 첫 번째 코드를 꼽는다면 ‘현대음악’이다. 로치버그·헨체·슈니트케 등 현대음악가들에게 다투어 작품을 헌정 받은 크레머. 그의 손으로 많은 바이올린 작품이 초연됐지만, 편향에 치우치지 않고 고전부터 현대까지 음악사 전반을 골고루 섭렵했다. 특히 낭만주의 음악에서는 슈베르트 작품에 남다른 애착을 갖는다. 그가 제안한 이번 내한 프로그램에서도 슈베르트와 슈니트케가 중심이 됐다. 공연의 부제였던 ‘1828년 11월 19일’은 슈베르트가 타계한 날이며, 2부의 첫 곡인 존 하빈스 피아노 4중주곡의 표제였다.
기돈 크레머의 두 번째 코드는 ‘실내악’이다. 크레머는 오스트리아 작은 산간 마을에서 로켄하우스 앙상블을 만들었고, 1981년 로켄하우스 체임버 뮤직 페스티벌을 창설했다. 1997년에는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젊은 음악가들을 선발해 크레메라타 발티카를 발족했다. 이번 내한에서는 한국 실내악 역사에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앙상블 디토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첫 곡으로 슈베르트 ‘다섯 개의 미뉴에트와 여섯 개의 트리오’를 선보였다. 하이든이 떠오르는 명량함 가운데서도 묵직하던 음량은 실로 놀라웠다. 숨결 같은 비브라토부터 폭풍 같은 다이내믹까지 동시에 호흡하는 모습은 오랫동안 함께한 멤버처럼 안정감 있었다. 크레머의 제1바이올린은 명료했고, 제2바이올린 스테판 피 재키브와 비올라 리처드 용재 오닐의 밀접한 연주가 능수능란했다. 이어진 슈니트케 피아노 4중주와 존 하비슨 피아노 4중주 ‘1828년 11월 19일’에서는 피아니스트 스티븐 린의 탄력성이 곡의 완성도를 더했다. 하이라이트 무대는 슈니트케 피아노 5중주였다. 연주자 모두가 슈니트케 음악 어법을 인지하여 차가움 속에 우수를 끄집어냈다.
임동혁과 함께한 슈베르트 변주곡 ‘시든 꽃’에서는 솔리스트적 기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크레머의 연주는 화려했고, 임동혁의 연주는 진중했다. 작곡가 본연의 뜻에 맞닿은 쪽은 임동혁이었다. 격정적인 연주를 선보인 크레머는 색다른 매력을 보였지만, 속도감 있는 프레이징에서 분명하지 않은 움직임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이전 내한에서 슈베르트의 가슴 저미는 선율을 끄집어낸 연주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솔리스트로서 기량은 떨어졌지만, 실내악에서의 연륜은 더욱 무르익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바이올리니스트. 현대사회의 단면을 그려낸 크레머의 발자국을 확인하기 위해 다음 내한에도 분명 많은 청중이 그의 무대를 찾을 것이다. 장혜선
그러나 화려한 쇼도, 복잡한 화음도, 칼 군무도 없는 절제되고 담담한 감성 그대로 방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뮤지컬 ‘원스’는 영화 ‘원스’의 분위기와 감수성을 무대에 그대로 재현했다. 무대는 따뜻한 노란색 조명과 낡은 거울들로 채워진 원 세트가 전부였다. 테이블과 의자 등 평범한 소품들의 위치만 옮겨가며 스토리를 전개했다. 작품 속 인물들이 음악으로 소통하며 감정을 교류하는 내용이기에 무대 위 배우들은 자연스럽게 오케스트라의 역할까지 맡았다. 가이와 걸은 기타와 피아노를 각각 연주하고 피아노 가게 주인, 은행원, 걸의 룸메이트들은 기타·만돌린·우쿨렐레, 바이올린, 아코디언, 드럼 등을 번갈아 연주했다. 화려한 사운드는 없었지만 탄탄한 스토리가 감정 몰입을 도왔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안무다. 특히 뮤지컬 넘버 ‘If You Want Me’에서 걸과 두 명의 친구가 함께 추는 춤은, 춤보다는 동작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소박했지만, 매우 강렬했다. 걸이 가이의 부탁으로 가사를 쓰며 처음으로 예술적 욕망과 자유를 느끼는 장면은 절제된 동작과 함께 그녀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원스’는 2011년 아메리칸 레퍼토리 시어터에서 초연되었고, 이듬해 브로드웨이로 진출해 많은 관객을 모았다. ‘뉴욕 타임스’지에서 ‘미국 뮤지컬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방식의 노래와 안무를 선보인다’는 평을 받았으며, 2012 토니 어워즈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포함한 8개 부문을 수상했다. 원작의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연출가의 창의적 연출 방식을 믿고 지지한 프로듀서와 작품의 정서를 깊이 있게 이해한 연출진, 그리고 브로드웨이의 전통 어법과 매우 다름에도 개성 있는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관객들 덕에 ‘원스’는 빠른 속도로 세계무대에 진출해 사랑받고 있다. ‘원스’ 덕에 브로드웨이는 더 다양해졌다. 김호경
이들은 단체 역사상 손꼽히는 레퍼토리인 ‘마에스트로’를 비롯해 총 5개 작품을 재해석해 엮은 ‘이미지들’을 무대에 올렸다. 무대 한쪽에는 플라멩코에서 빠질 수 없는 기타연주자들과 보컬리스트가 자리했고, 무대 전면을 도화지 삼아 펼쳐지는 비주얼 아트와 함께 각각의 테마별로 군무와 독무, 2인무 등이 번갈아 이어졌다.
내게 이날 공연은 생애 두 번째로 본 플라멩코였다. 스페인이나 안달루시아, 그곳의 산물인 플라멩코에 대해 막연하거나 매우 기초적인 지식만 있는 관객으로 객석에 앉았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그들의 공연을 보면서 ‘우리네 전통 무용 단체의 재창작 공연을 외국인이 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고백하건대 제목도, 테마도, 구성도 다른 5개 단편들 사이에서 나는 공통점만 발견했을 뿐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기타 조건들(무대미술, 인원, 소품 등)의 다름이 공연 중심에 있는 춤을 결정짓는 데 얼마나 작용했을지 의문이 들었다. 리드미컬한 손뼉도, 화려한 발동작도 그저 ‘반복+반복’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다만 모든 공연을 마친 뒤 플라멩코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외국인 관객이 된 기자의 눈에 ‘저것이 재해석된 것이라면, 오리지널은 어떨지 궁금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공연은 최소한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 아닐까. 공연에 등장한 각각의 테마를 구분하지도, 딱히 뇌리에 남은 것도 없었지만 어쨌든 호기심이라도 남았으니 말이다.
우리의 전통예술을 동시대 예술가들이 재해석해 외국 관객에게 소개할 때, 문화나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 없는 그들이 공연에서 느껴야 할 것, 반대로 놓칠 수밖에 없는 것들은 무엇일까. 본질적인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물량 공세 혹은 ‘쿨’해 보이는 새로움을 더했다고 해서 그것이 수출-성공의 가능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은연중 차별성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오리지널에서 멀어진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다름’이 언제나 ‘더 나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 김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