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후슬라프 마르티누

COMPOSER OF THE MONTH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1월 1일 12:00 오전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음악을 품다

1890 체코슬로바키아 폴리치카 출생

1906 프라하 음악원 입학

1918 칸타타 ‘체코 랩소디’ 작곡

1927 단막 발레곡 ‘부엌 레뷰’ 작곡

1934 오페라 ‘마리아의 기적’ 작곡

1940 ‘신포니에타 조코사’ 작곡

1959 목관 5중주와 현악 4중주를 위한 9중주 작곡

1959 스위스에서 사망

15년 전 로마에 갔을 때다. 서울역에 해당하는 테르미니 역에서 지하철로 한 정류장 거리인 레푸블리카 역 근처 작은 이성급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가 다 되어서다. 짐을 풀기도 전에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발코니에 색색의 화분을 놓은 옛 스타일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영화에서 보았음직한 거리 풍경은 시간 여행을 온 듯 착각마저 들게 했다. 게다가 여행 기분을 더욱 들뜨게 하는 청명한 가을 하늘! 그때 성당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바로 호텔을 뛰어나가 종소리가 나는 성당으로 향했다. 지금도 이 순간을 로마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 중 하나로 기억한다. 정오마다 단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종소리와 함께 태어난 보후슬라프 마르티누(1890~1959)는 이 종소리를 통해 신으로부터 위대한 음악가가 될 약속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까.

시골 출신의 낙제생 바이올리니스트

마르티누가 태어난 곳은 프라하와 슬로바키아 국경의 중간에 자리한 보헤미아의 작은 시골 마을 폴리치카였다. 아버지는 제화업을 했지만 시간마다 성 요한 교회의 종을 치는 일도 겸하고 있어, 마르티누는 이 교회의 작은 종탑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큰 키에 마르고 허약한 체질의 마르티누는 종종 아버지의 도움으로 193계단이나 되는 종탑에 올라가곤 했다. 종탑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린 마르티누에게 깊이 각인됐고, 어른 마르티누의 추억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마르티누는 십대 시절 공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그의 부모가 마을의 음악 교사에게 그를 의탁한 것이 전부였다. 다행히 이 시골 교사는 마르티누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며 곧 그의 천재적 음악 재능을 발견했고, 그에게 작곡을 권했다. 마르티누는 작곡가를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딘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했다.

15세였던 1905년 고향에서 공개 연주회를 연 후,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위해 자신이 작곡한 작품과 바이올린을 들고 프라하로 향했다. 프라하에서는 당시의 현대 작곡가였던 R. 슈트라우스,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버르토크 등의 작품이 연주됐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작곡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하던 마르티누를 크게 고무시켰다.

이듬해 입학한 프라하 음악원은 무대의 신선한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닌 마르티누는 곧 ‘통제 불가’로 낙인찍혔고, 결국 2학년 마지막 시험에서 낙제하여 음악원을 나와야만 했다. 마르티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여러 서적을 읽으며 음악을 독학했고, 많은 음악회에 참석했을 뿐 아니라 매일 작곡을 할 정도로 열의를 불태웠다. 낙제가 오히려 마르티누의 의지를 북돋운 셈이다. 훗날 마르티누는 폴리치카의 옛 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리고 인내심을 갖는다면 이루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최선을 다했던 마르티누의 모습은 이 시절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고향에서 조용히 바이올린을 가르치며 지낸 마르티누는 전쟁이 끝난 후 체코 필하모닉의 제2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면서 대규모 관현악을 위한 작품을 쓰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 결과 바리톤과 합창, 관현악을 위한 칸타타 ‘체코 랩소디’(1918)가 1919년 체코 필하모닉에 의해 초연돼 호평을 받았다.

드보르자크를 잇는 체코의 심포니스트

마르티누는 33세였던 1923년, 본격적인 작곡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나면서부터 작곡가로서 삶을 시작한다. 지역의 음악가로 일생을 편히 살 수도 있었지만, 큰 어려움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한 경험이 있는 그에게 안정은 오히려 불편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프랑스의 원로 거장이던 알베르 루셀의 제자가 된 마르티누는 현대적 음악 언어와 신고전주의, 재즈 등 당시 프랑스에서 접한 다양한 스타일로 수많은 작품을 작곡하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더욱 세련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체코의 민속음악적 특징도 빼놓지 않고 음악적 재료로 활용했다. 이러한 성과는 고국에서도 인정을 받아 1935년에 오페라 ‘마리아의 기적’(1934)으로 체코슬로바키아상을 받았다.


▲ 마르티누의 스승이자 당시 프랑스의 원로 거장이었던 알베르 루셀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인 1940년 나치가 파리로 진격하면서 그에게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특히 마르티누는 체코의 레지스탕스와 연결됐기 때문에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 더욱 위험했다. 마르티누는 우선 프랑스 남부의 엑상프로방스로 피신한 후, 1941년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개월을 가슴 졸이면서도 하루도 작곡을 쉬지 않았다. 피아노와 체임버오케스트라를 위한 ‘신포니에타 조코사’(1940)는 이 기간에 작곡한 대표작으로, 현실과는 반대로 희망의 꿈을 꾸는 듯 생기발랄하고 밝은 분위기로 가득하다.

마르티누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미 전쟁을 피해 건너온 예술가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들은 전쟁을 피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유럽에서 얻었던 명성을 이어가지 못했다. 영어를 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뉴욕에서 예술가가 활동할 기회가 갑자기 늘어날 리도 만무했다. 이러한 상황은 곧 생활고로 이어졌는데, 마르티누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마르티누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후원으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고난을 이겨내는 특유의 생활력으로 현실에 빠르게 대처해갔다. 특히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선보인 작품이 유럽에서 한 번도 쓰지 않던 교향곡이었다는 것은 절묘한 전략이었다. 뉴욕이 지난 세기 3년간 뉴욕에서 활동하던 체코 출신 드보르자크를 기억하고 있던 터라, 마르티누는 곧바로 드보르자크를 잇는 체코의 심포니스트로서 주목받을 수 있었다. 스위스의 지휘자 에르네스트 앙세르메도 그를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로 추켜세웠다. 이 외에도 여러 중요한 작품이 미국에서 탄생했고, 그는 1948년 매네스 음대에 자리 잡으며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말년에 암 투병의 고통과 조국에 대한 향수로 우울한 나날을 보낸 마르티누는 1953년 프랑스 니스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1955년 미국으로 돌아가 매네스 음대의 교수직 등 미국 생활을 완전히 정리한 후 이듬해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로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고, 결국 그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1959년 스위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생을 마감한 후에도 그의 음악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생명력을 얻고 있으며, 지구 반대편 이 땅의 무대에도 오르고 있다.


▲ 체코 폴리치카에 위치한 마르티누 센터

민속음악과 현대적 발상의 산물

마르티누는 프라하와 파리에 체류하며 현지에서 접한 새로운 음악 기법을 빠르게 흡수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약 400곡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 속에서 그가 받은 다양한 영향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중에서도 마르티누는 자신의 음악에 영향을 준 요소로 체코의 민속음악과 드뷔시, 그리고 영국 마드리갈을 꼽았다.

체코 민속음악의 영향은 주로 리듬에서 나타난다. 마르티누는 체코 음악의 특징을 강렬하면서도 유연한 리듬으로 규정하며,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의 독특한 당김음 리듬을 들을 수 있다. 이 외에도 주제 선율로서 민요를 직접 사용하거나 민속적인 스타일의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드뷔시의 영향은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활동한 작곡가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는 드뷔시가 음색을 사용하는 방법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드뷔시의 관현악을 위한 녹턴을 좋아했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음악을 대하는 드뷔시의 정신에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영국 마드리갈을 언급한 것은 특이하다. 마르티누는 프라하 시절에 들었던 잉글리시 싱어즈의 연주에 강한 인상을 받았으며, 거기에 매혹됐다. 그는 영국 마드리갈의 자유로운 다성 음악이 바흐의 것과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했으며, 알지 못하던 새로운 음악을 듣게 됐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또한 마드리갈에서 발견한 체코 음악을 연상케 하는 민속적 요소는 그에게 모종의 동질감까지 느끼게 했다. 이러한 감흥은 ‘마드리갈’이라는 이름을 지닌 네 작품에 특히 반영됐다. 이들 모두 성악이 아닌 기악을 위한 작품이라는 사실 또한 특이하다.

고전적 형식미에 대한 애착도 빼놓을 수 없다. 체코에 있을 때부터 협주곡·소나타·현악 4중주 등 고전적인 형식을 갖춘 작품들을 즐겨 작곡한 마르티누는 미국에서 여섯 개의 교향곡을 발표하며 고전주의자로서 정점을 찍었다. 그런데 말기에 이르러 형식에 대한 구속이 느슨해지며 곡을 자유롭게 전개하는 경향을 보인다. 교향곡 6번 ‘교향적 환상곡’(1953)은 자유로우면서도 자연스럽게 음악이 진행되는 또 하나의 경지를 들려준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마르티누의 대부분의 관현악곡에 피아노가 등장한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마르티누는 피아노를 관현악곡의 필수 요소로 취급했고, 음악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

그런데 정작 마르티누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가장 자주 연주되는 작품은 재즈, 탱고, 찰스턴 등 대중적 요소를 가미한 단막 발레곡 ‘부엌 레뷰’(1927)다. 다리우스 미요의 ‘세상의 창조’(1923)나 에른스트 크레네크의 ‘조니가 연주하다’(1926)처럼 1920년대 유럽에서 재즈를 도입하던 유행을 따른 것이다. 이 곡은 본래 열 부분으로 구성된 6중주곡이지만, 이 중 네 악장을 정리한 모음곡만이 초연 후 즉시 출판됐고, 전곡은 분실되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1990년대 초에 전곡 악보가 파울 자허 재단의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됐다. 이 악보는 고음악 지휘자이자 마르티누 전문가이기도 한 크리스토퍼 호그우드가 편집한 후 2004년에 출판하여 오늘날 다시 연주할 수 있게 됐다.


▲ 마르티누 곡의 전문 지휘자인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Marco Borggreve

다양한 편성의 수많은 실내악곡도 숨어 있는 보고다. 마르티누의 실내악곡은 전 생애에 걸쳐 작곡된 만큼 각 시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그 성격이 뚜렷하고 음악적 효과가 강렬하다. 자신의 악기였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들과 일곱 개의 현악 4중주곡들은 마르티누 음악 세계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만년의 걸작인 목관 5중주와 현악 4중주를 위한 9중주(1959)는 교향곡에 버금가는 규모로 국내에서도 종종 연주된다. 마르티누의 작품 목록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하프시코드나 테레민 등 특이한 악기가 편성된 실내악 작품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유행에 민감하던 기질과 끊임없이 솟아나는 새로움을 갈망하는 호기심에 대한 또 하나 증거가 된다.

마르티누는 이렇듯 천부적 재능과 활동적인 성향, 과감한 도전 정신으로 체코 출신 작곡가로서, 예술의 중심지 파리의 음악가로서, 미국에 망명한 이방인으로서 경계를 넘나들며 한 시대를 포용하는 대작곡가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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