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츠하크 펄먼

운명을 짊어진 비르투오소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1월 1일 12:00 오전

70세를 맞이한 ‘현역’ 바이올리니스트. 그가 걸어온 길은 음악사에 기록될 찬란한 유산이다

펄먼은 영웅이었다. 바이올린을 배우던 학생 시절, 고작 한 마디를 두세 시간 연습하며 ‘낑낑’대던 소녀에게 “손에 ‘깡깡이’를 들고 태어났다”고 비유되는 펄먼의 자유로운 연주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굉장히 어려운’ 부분을, ‘굉장히 어렵지 않게’ 연주하는 그를 닮고 싶었다. 펄먼이 두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연주자라는 것은 그의 음악보다 늦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래서 펄먼이 더 좋아졌다.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자기의 운명을 짊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영웅이니까.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중)

펄먼, 알을 깨뜨리다

이츠하크 펄먼은 1945년 지중해 해안을 따라 길게 자리한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폴란드 이주민의 외아들이었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야사 하이페츠의 바이올린 연주에 매료된 그는 아버지를 졸라 ‘장난감’ 바이올린을 구입했지만, 하이페츠와 똑같은 선율이 나오지 않는다며 불평했다고 한다. 펄먼 나이 네 살 때 일이다.

바로 그해에 유행성 소아마비가 이스라엘 전역을 휩쓸었다. 네 살의 펄먼도 그 병을 피하지 못했고, 2년을 병상에 누워 보냈다. 그때 앓은 병으로 펄먼은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다. 평생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아픔을 겪었지만, 바이올리니스트의 운명은 타고난 모양이다. 병의 흔적이 두 팔은 비껴갔다.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 하는 아들을 위해 ‘진짜’ 바이올린을 선물했다. 열세 살이 된 펄먼은 텔아비브 음악원에서 제1바이올린 주자가 됐고, 아이작 스턴, 레너드 번스타인 앞에서 연주할 수준의 실력을 갖췄다.

올해 70세를 맞이한 펄먼은 한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쌓아온 커리어 중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 열세 살에 출연한 에드 설리번 쇼를 제일 먼저 꼽았다. 설리번은 명망 높은 자신의 프로그램에 출연할 아티스트를 찾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했고, 펄먼이 그에 눈에 들어온 것이다.

“아마 나는 최상의 후보였을 거예요. 매우 어렸고, 목발을 짚고 걸었으며, 나름 귀여운 면도 있었으니까요. 연주도 꽤 잘했고요. 방송에 소개하기 좋은 휴먼 스토리까지 곁들어지니 여러 모로 흥미로운 조합이었겠지요.”

방송 출연으로 유명세를 탄 펄먼은 줄리아드 음악원의 도로시 딜레이 교수 앞에서 오디션을 치렀다. 또래 아이들보다 월등한 기교를 구사하는 펄먼을 보고 딜레이는 두 눈과 귀를 의심했다. 펄먼은 장학금을 받으며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수학하는 기회를 얻었다. 1963년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번으로 카네기홀에 데뷔했고, 1964년에 레번트릿 콩쿠르 1위에 입상했다. 펄먼의 시대가 열린 순간이다.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

“줄리아드에서 공부하던 시절이 제 인생에선 참 중요한 시기였어요. 더구나 갈라미언 교수와 딜레이 교수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객석’ 1999년 10월호)

이반 갈라미언과 도로시 딜레이의 교수법은 전혀 달랐다. 갈라미언은 다소 강압적으로 자신의 음악관을 주입시켰고, 딜레이는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상하게 음악을 가르쳤다. 펄먼은 여러 인터뷰에서 갈라미언의 레슨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갈라미언은 말보로를 피우며 레슨했는데, 집에 돌아온 펄먼은 옷에 밴 담배 냄새만 맡아도 레슨 받을 때처럼 덜덜 떨었다고 한다. 어찌됐든 다른 개성을 지닌 줄리아드의 두 교수에게 채찍과 당근을 받으며 성장한 펄먼. 1999년 가을부터 줄리아드 교수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쳤고, 2005년 5월 줄리아드 100회 졸업식에서 명예박사와 100주년 기념 메달을 수여받았다. 펄먼은 학생들에게 “메이저 오케스트라 협연과 리사이틀 기회를 얻지 못한다고 움츠러들지 말라”고 말한다. 펄먼이 성장하던 시기와 비교하면 음악산업이 많이 변했으니, 앙상블이나 체임버 오케스트라 등 여러 연주를 하며 시야를 확장시킬 것을 강조한다.

음악 학도들을 향한 열정은 1995년부터 아내와 함께 이어온 ‘펄먼 뮤직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현악기에 재능 있는 학생들을 선출하여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펄먼의 아내 토비 프리들랜더의 오랜 꿈은 메도마운트에 학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의 꿈에는 재밌는 스토리가 담겨 있다. 메도마운트 여름 음악 캠프에서 펄먼은 모리스 라벨 ‘치간’을 연주했다. 이 연주를 들은 바이올리니스트 토비는 즉시 무대 뒤로 달려가 그에게 구혼을 했다. 그녀는 틈만 나면 악보를 들고 펄먼의 집으로 찾아와 연주를 해달라는 핑계로 구혼 작전을 펼쳤고, 마침내 3년 뒤 펄먼은 그녀에게 청혼했다. 그는 가정적인 연주자로 유명하다. 세계를 일주하며 연간 100회 이상 연주를 하더라도, 다섯 자녀의 생일에는 연주 일정을 최대한 피했다. 펄먼은 평범한 가정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쉬는 날은 반드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황혼기에 접어든 펄먼의 낙은 열한 명의 손자와 함께 휴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유명한 어린이 프로그램 ‘세사미 스트리트’를 비롯하여 다양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대중에게 친근한 연주자가 됐다.

달콤한 음색, 찬란한 음악

갈라미언의 레슨을 두려워하던 펄먼이지만, 사실 그의 연주는 갈라미언의 가르침을 그대로 담고 있다. 갈라미언은 펄먼에게 활의 속도와 압력, 위치까지 테크닉을 호되게 가르쳤다. 펄먼의 뛰어난 테크닉은 모두가 동의하는 입장이다. 더구나 그의 기교는 공들이는 기색 없이 자연스러운 틀 속에 자리 잡혀 있다. 그가 커리어를 쌓는 동안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라이벌로 지목됐다. 강렬한 톤을 자랑하는 핀커스 주커만, 마력적인 감성의 정경화, 날렵한 테크닉을 선보이는 기돈 크레머 등이 펄먼과 동시대 라이벌로 활약하던 연주자들이다. 펄먼 사운드도 독자적 개성을 갖고 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하이포지션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덕분에 고음에서도 소리가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안정된 기교를 선보인다. 펄먼의 연주 스타일은 고전과 낭만 레퍼토리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이번 내한 공연에서도 르 클레르 바이올린 소나타 3번, 브람스 ‘F.A.E. 소나타’ 중 스케르초,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라벨 바이올린 소타나 2번을 선보일 계획이다.

1974년, 1991년, 2010년, 2013년에 이어 다섯 번째 내한이다. 최근 2010·2013년 내한 공연은 전성기 시절의 뜨거운 연주에 못 미쳤다는 평이었다. 그럼에도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을 보기 위해 많은 이가 공연장으로 향할 것이다. 텔아비브의 고요한 집에서 라디오로 흘러나오는 하이페츠의 선율을 들으며 바이올린을 꿈꾸던 소년. 70세의 펄먼은 알고 있을까. 많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자신의 레코딩을 귀감으로 삼고, 꿈을 키웠다는 것을 말이다.


▲ Warner Classics 0825646081684 (3CD, ADD/DDD)

‘펄먼 사운드’

지난 8월, 펄먼의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출시된 음반이다. 펄먼의 워너 클래식스 음반 중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와 레코딩을 선별하여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리마스터링했다. CD1에는 멘델스존·브람스·베토벤·차이콥스키·코른골트·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낭만 레퍼토리를 전면 배치했다. 펄먼의 주 무기인 서정적인 감수성에 흠뻑 빠져 있다가 CD2를 틀어보자.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과 바흐 바이올린 파르티타 3번 등 펄먼의 비르투오소 사운드를 느낄 수 있다. 펄먼은 다른 장르의 레코딩에서도 애정을 보였는데, CD3에는 파야의 ‘스페인 춤곡’ 1번, ‘바사라바이’ 등 재즈, 민속음악, 클레즈머를 포괄하여 담았다. 펄먼의 방대한 레코딩 중 알맹이만 쏙쏙 담은, ‘펄먼 사운드’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음반이다.

사진 크레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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