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LG아트센터
인간미 머금은 고음악 무대
한 예술가를 오랜 시간을 두고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더없는 행복이다. 소프라노 임선혜의 무대를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가을이었다. 대학 졸업 연주회에서 임선혜가 선곡한 노래는 도니제티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 나오는 ‘광란의 아리아’였다. 초절 기교의 테크닉은 물론 다양한 감정 변화까지 표현해야 제대로 된 연주가 나오는 난곡 중의 난곡을 무리 없이 소화하는 그녀를 보면서 전율을 느꼈다. 그로부터 18년이 흘렀다. 그동안 음반과 오페라, 콘서트로 다시 만날 때마다 임선혜는 조금씩 업그레이드를 해갔다. 또한 언제나 서글서글한 인간미를 발산하며 더한 감동을 주었다.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와 함께 내한한 임선혜는 청중에게 음악 외에 사랑과 휴머니즘을 덤으로 선사했다. 새 앨범 ‘오르페오’를 중심으로 꾸민 알찬 레퍼토리로 신비롭고도 애절한 사랑을 객석에 흩뿌렸다. 공연날은 우리에게는 하늘이 열린 개천절이요, 동베를린 출신 악단에게는 독일 통일 25주년을 맞은 뜻깊은 날이었다. 베를린과 고조선의 공통분모인 ‘곰’ 인형을 무대로 들고 와 통일을 염원하는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의 리더와 임선혜의 마음씨에서 진한 인간미가 풍겼다. 앙코르로 헨델의 ‘울게 하소서’와 ‘아그리피나’ 중 포페아의 아리아 ‘귀한 진주여, 훌륭한 꽃이여’를 부를 때 객석은 무한한 행복감에 젖었다.
오르페오·에우리디체·텔레만·라모·페르골레시…. 신화와 역사에서 길게는 1000년, 짧게는 300년 전의 인물들이다. 201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토록 오래된 음악과 시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더구나 연주 도중 자주 조율을 해야 하는 시대 악기의 반주와 우리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옛 독일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로 노래하는 ‘오르페오’는 초심자에게 한없는 인내심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고리타분한 인문학’은 임선혜의 기지 넘치는 프로그램 진행으로 현재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우선 쳄발로 외에 류트와 실내오르간을 추가로 장착한 통주저음은 곡마다 다르게 등장하면서 듣는 재미와 보는 재미를 동시에 만족시켰다. 노래 사이사이 배치된 바로크 작곡가들의 실내악은 감초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다. 국내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비올라 다 감바와 류트의 신비로운 음색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고색창연한 옛 성에 있는 듯, ‘오르페오’의 매력을 더욱 진하게 했다. 여기에 낯선 언어를 정성껏 번역해 한글 자막으로 비춘 주최 측의 배려로 스토리를 한층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불혹, 임선혜의 목소리는 더욱 무르익었다. 고음악이 그저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격정과 기쁨, 그리고 슬픔을 적시적소에 구사하며 청중을 쥐락펴락했다. 마지막 곡으로 부른 페르골레시의 칸타타 ‘오르페오’에서 ‘에우리디체, 어디에 있나요’를 반복하며 절규할 때 단장의 고통은 조각조각 흩날렸다. 현악기와 목소리에서 동시에 울려나오는 절제된 비브라토는 절묘한 궁합을 보이며 고음악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공명점이 높게 설정된 발성은 소리 향연의 ‘벨칸토’에 지친 필자의 귀를 단비처럼 씻어주며 노래의 기본으로 돌아가게 했다.
임선혜가 직접 쓴 프로그램 노트에 오르페오를 ‘가수의 시조’로 표현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음악의 근원을 아카데믹하게 파고들어가 우리에게 고전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느끼게 해준 이번 내한 공연은 두고두고 가슴 속에 남을 것 같다.
사진 E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