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두 핀란드 남자의 열기
클라리넷은 과연 어디까지 진화하는가! 카리 크리쿠, 이 유쾌한 핀란드 남자는 클라리넷의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드넓은 3옥타브 반의 음역을 다 쓰고도 모자랄 판이었다. 3악장에서 한참 연주에 정신없는 악장에게 마이클 잭슨식 스텝으로 능청스럽게 다가가기도 하고, 4악장에서 전문가 뺨치는 탭댄스를 추며 또 한 명의 타악기 주자가 됐다. 마지막에는 무대를 휘저으며 ‘문워크’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오스모 벤스케의 베토벤 교향곡 5번’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으나, 오히려 키모 하콜라의 클라리넷 협주곡이 메인이었다. 전반부는 ‘핀란드 삼총사’의 무대였다. 하콜라의 협주곡을 벤스케가 지휘하고 크리쿠가 협연했으니 연주의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1악장 도입부, 둔탁한 큰 북 연타에 이어 하프가 맹렬히 악구를 누비는 사이 크리쿠는 멋들어지게 음표를 헤치며 저음에서 고음으로 비상했다. 클라리넷 벨을 들어 올릴 때 다리를 같이 올리는 것은 예사였다. 카덴차는 그야말로 클라리넷을 ‘가지고 논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크리쿠의 손가락은 키를 짚기보다 두드리는 것으로 보일 만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현악기의 하모닉스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오버블로잉, 가래 끓는 소리를 유발하는 그로우링, 특별한 운지 없이 입술을 조였다 풀었다 하며 마우스피스만으로 해내는 글리산도 등 기상천외한 기교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2악장에서 나긋나긋한 가요풍의 ‘은폐된 선율’을 읊조린 크리쿠는 3악장에서 충만한 리듬감으로 반전을 거듭했다. 돌연 퇴장한 협연자를 두고 왁자지껄 떠드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재입장시 ‘안녕 마에스트로’를 외치며 반기는 호른 주자의 퍼포먼스는 보는 즐거움을 더했다. 피날레 악장에서는 클래식 음악에서 금기시하는 클라리넷의 비브라토를 보란 듯이 연주했다. 벨을 높이 치켜들고 강렬한 음향을 퍼붓는 그에게 한계는 없었다. 음악성보다는 소리의 효과에 천착하는 현대음악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들려줬다. 연주자와 작곡가만 이해하는 ‘그들만의 현대음악’이 아닌, 함께 즐기며 청중을 음악 본연으로 돌아가게 한 놀라운 시간이었다.
오스모 벤스케의 시벨리우스 시리즈 음반(Bis)은 애호가 사이에서 최고로 평가받는다. ‘포욜라의 딸’은 첼로가 물레 모티브를 도드라지게 노래하는 도입부터 감동이었다. 벤스케는 핀란드의 국민 서사시를 차근차근 낭독하듯 세밀하게 음화(音畵)를 그렸다.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처음 시도해 널리 퍼졌던, 고음 악기와 저음 악기가 분리된 오케스트라 편성이 요즘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배치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벤스케는 ‘스토코프스키 편성’을 채택해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음향 효과를 극대화했다. 오른쪽으로 치우진 저음 현악기의 울림은 강력했다. 시종일관 거침없이 몰아붙인 1악장의 템포와 느린 2악장의 대비도 좋았고 3악장에서 4악장으로 연결되는 부분도 꽤 설득력 있었다.
무엇보다 3악장 중 더블베이스에서 제1바이올린으로 옮겨가는 대위법적 경과는 압권이었다. 지휘자 헤르베르트 케겔의 실황 녹음에서 느껴지던 타오르는 열기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고요함과 침묵’을 강조하는 벤스케에게 다이내믹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하콜라의 협주곡이 완전히 이질적인 베토벤 교향곡으로 옮겨가는 중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호연을 들려준 서울시향과 벤스케에게 경의를 표한다.
사진 서울시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