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자극의 필요성
에머슨 현악 4중주단 내한 공연
1월 29일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
“연주자가 이렇게 오래 쉼 없이 연주한다는 건 각 악기들의 음률이 맞지 않게 된다는 의미야.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지!”
영화 ‘마지막 4중주’ 도입부에서 첼리스트 피터는 단호하게 말한다. 이 영화는 25년간 단 한 번의 단원 교체 없이 이어온 현악 4중주단 ‘푸가’의 숨겨온 갈등을 그린다.
비올라를 배우던 학부 시절, 실내악만 하면 정답던 친구들도 옥신각신 의견이 맞지 않았다. 극도의 심리 싸움 끝에 ‘네 명의 음악’은 마침내 하나가 됐다. 덕분에 ‘사이좋은 실내악단’이란 말은 믿지 않는 편이다. 4중주를 연습하며 각자의 소리가 귀에 익을 즈음, 악기간의 음률이 더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서로 잘 맞는다고 확신하여 ‘하나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긴장감의 부재로 나오는 치명적 결함이다.
1976년 결성 이후 오랫동안 멤버 교체가 없던 에머슨 현악 4중주단은 2013년에 첼로 주자가 폴 왓킨스로 바뀌었다. 폴 왓킨스가 입단한 후, “새로운 접근 방법을 가지고 위대한 곡들을 다시 만나는 작업들은 정말 흥미로웠다”고 단원들은 고백한다. 폴 왓킨스는 전 멤버인 데이비드 필컬보다 깊은 음색을 지녔지만, 이번 내한을 통해 아직 네 명의 단원이 음악에 대한 의견 합치가 부족함을 확인했다. 비단 새로운 첼리스트 영입으로 생긴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첫 곡 슈베르트 현악 4중주 13번 ‘로자문데’에서부터 단원들은 지나치게 편해 보였다. 섬세함이 결핍된 편안함이었다. 악상이 커질 때마다 음색에선 각자 다른 성격이 튀어나왔고, 음정에 대한 꼼꼼함도 부족했다. 이어진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10번은 한결 탄력적이었다. 합치된 음색과 음량은 쇼스타코비치의 작풍(作風)에 균일하게 녹아들었다. 마지막 곡인 드보르자크 현악 4중주 12번 ‘아메리카’는 명징한 원작 해석에 따라 작품의 경건함과 경쾌함이 나타났다. 공연 전반적으로 작품의 세세하고 미묘한 부분까지 다듬지 않은 점은 큰 아쉬움이다.
에머슨 현악 4중주단은 40년을 달려왔다. 창단 초기부터 제1·2바이올린을 바꿔가며 연주하며 ‘모두가 리더’라는 이념을 지키고 있다. 또한 현악 4중주가 연주자들의 직업이 될 수 있다는 점도 보여줬다. 이 실내악단의 견고한 과거는 클래식 음악계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하지만 40년을 함께하며 서로 너무 잘 알아버린 그들에게, 배려하고 절제하는 모습이 필요한 시점이다. 새로운 첼리스트 영입이 신선한 자극제가 되길 바란다. 영화 ‘마지막 4중주’에서 나온 엘리엇의 시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친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도 모두 미래의 시간 속에 있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들어 있네.” 장혜선
삶의 다양한 노래, ‘사계’
이무지치 내한 공연
1월 3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1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진 이무지치의 비발디 ‘사계’와 피아졸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를 감상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 아닐 수 없다. 1952년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을 졸업한 음악가 12명이 마음을 모아 창단한 바로크 체임버 오케스트라 이무지치는 바이올리니스트 6명, 비올리스트 2명, 첼리스트 2명, 더블베이시스트와 쳄발리스트 1명으로 각각 구성되어 64년간 꾸준히 연주 활동을 이어왔다.
이들은 당시 잘 연주되지 않던 비발디의 ‘사계’를 꾸준히 연주하며 관심을 모았고, 1955년부터 지금까지 비발디 ‘사계’를 7장의 음반으로 발매하며 음악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날 연주 역시 비발디의 ‘사계’가 빠질 수 없었다. 하지만 피아졸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 연주는 정통 클래식 음악과는 다른 기존 탱고 음악에 클래식 음악과 재즈를 접목한 탱고의 리듬과 오리지널 반도네온의 음색이 어우러져 색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비발디의 ‘사계’는 정통적인 해석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안정된 템포와 유려한 화성, 그리고 기품 있는 진행으로 이 곡의 멋을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바로크적 단아함과 고전적인 기품이 돋보인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피아졸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에서 반도네오니스트 파사렐라는 현악으로만 연주되던 피아졸라의 ‘사계’를 오리지널 반도네온으로 들려주었는데, 특유의 자유로운 음악적 감각과 다양한 음색, 리듬이 만들어내는 악기 사이의 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신선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비발디의 ‘사계’와는 다른 정열적인 탱고 리듬과 화려한 선율이 변화무쌍한 사계를 새롭게 해석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두 ‘사계’가 갖는 매력은 무엇일까? 봄의 부드러움, 여름의 뜨거움, 가을의 풍요로움, 겨울의 차가움을 전혀 다른 색깔로 이야기했던 무대. 한 해의 여행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이날의 연주는 삶의 진중함과 삶의 역동성을 동시에 말해주는 듯했다. 국지연
보편성과 특수성, 그 사이에 서서
TIMF앙상블의 나실인 음악극 ‘비욘드 라이프(Beyond Life)’
1월 30일 통영국제음악당 블랙박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오작교 프로젝트에 선정된 TIMF앙상블이 전속작곡가 나실인에게 위촉해 세계 초연된 이번 음악극은 혼수상태에 빠진 여성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방황하는 짧은 여정을 주제로 삼았다. 소프라노(이지현)와 무용수(정혜정)가 각각 분리된 영혼과 육체로 분했고, 이병욱의 지휘에 바이올린(김지원), 비올라(라세원), 첼로(오주은), 기타(김우재), 퍼커션(김은혜·한문경)으로 구성된 앙상블의 연주가 극을 이끌어갔다.
맥박 신호가 점차 떨어지듯 비브라폰의 규칙적인 금속음이 사그라지는 가운데 시작된 극에서 여주인공은 삶도 죽음도 아닌 제3의 영역을 헤매다 세 천사들을 만난다. 고통과 불안을 호소하지만 바이올린(김지윤)·플루트(이인)·클라리넷(선우지현)으로 대변된 세 천사는 인간의 언어 대신 오로지 선율로 자신들의 뜻을 전하며 인간과 대화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설정들은 청중이 ‘극’에 감정적으로 개입할 여지를 열어둔 동시에 전후로 연결된 ‘음악’까지 집중의 끈을 붙들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소프라노의 노래와 연주 사이에 등장한 대사들은 그 자체로 시선을 끌었지만, 동시에 노래와 분리되어 표류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노래와 대사의 상호보완성을 두고 다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재연을 염두에 둘 때 드라마투르기나 연출가를 별도로 두어 서사 구조나 무대 위 동선 등 극 전반의 연출 영역이 보강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절반의 성공이었다. 현대음악, 그리고 현대음악극이 어려울 것이라는 막연한 편견을 거둬낼 수 있었지만, ‘극’에 온전히 사로잡히긴 어려웠다.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 의식,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동시에 납득할 수 있는 음악 전개가 흥미로웠으나, 결국 객석을 떠나면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어 아쉬웠다. 김선영
김준수의 결심
뮤지컬 ‘드라큘라’
1월 23일~2월 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김준수는 잘한다. 김준수는 뮤지컬을 잘한다. 독특한 음색 탓에 발성이나 가사 전달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지만, 또 일상적이지 않은 연기에 어색함을 느끼는 이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잘한다. 개성이 있고, 에너지가 있고, 장악력이 있다. 인기는 원래부터 많았지만 뮤지컬을 하면서 더 많아졌고, 티켓 파워로 치면 현재 따라올 자가 없다. 김준수는 뮤지컬을 시작한 2010년부터 지금까지 쭉 잘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최근 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난 1월 26일, 뮤지컬 ‘드라큘라’ 기자 간담회에서 “개성 있는 목소리지만 장시간 들으면 피로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한 기자의 말에 김준수는 살짝 발끈하며 “내 목소리는 뮤지컬계뿐 아니라 대중음악계에서도 특이한 편이었다. 뮤지컬 장르를 시작하며 성악적 발성과 음색을 표현하려 노력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매력을 관객들에게 설득하기로 마음먹었고, 앞뒤 볼 것 없이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2010년 첫 뮤지컬 ‘모차르트!’에서 김준수는 화려하고 정신없는 무대에서 다소 숨이 차 보였다.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건 ‘엘리자벳’. ‘죽음’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그를 보며 그동안 한국 뮤지컬계에 풋풋하고 정력적인, 20대 초·중반 주연급 남자 배우가 없었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 2015년 ‘데스노트’에서는 연기에 깊이를 더했다. 캐릭터를 섬세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2014년에 이어 재공연된 올해 ‘드라큘라’ 무대는 그동안의 고민에 해답을 낸 듯하다. 김준수는 자신의 매력을 스스로 마음껏 활용하고 있었다. 빨간 머리, 마른 몸매의 김준수는 섹시하고 매혹적이며, 한편으로는 유약하기도 한 판타지적 인물을 훌륭히 소화했다. 감정은 깊었고, 극이 끝날 때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물론 ‘드라큘라’ 무대에 아쉬운 점이 없던 건 아니다. 드라큘라와 여주인공 미나 머레이와의 호흡은 아쉬웠다. ‘이제서야’ ‘그댄 내 삶의 이유’ 등 서로를 이해하는 장면이나 감정을 교류하는 넘버에서 서로 소통하는 느낌이 없었다. 각자 다른 방향성을 두고 연기하는 듯했다. 임혜영이 연기한 미나 머레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없이 여성스러울 뿐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표현되지 못했는데, 이는 작품의 설정 자체에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백작의 성, 정신병원, 기차역 등 전환되는 공간마다 무대 연출이 탁월해 몰입도를 높였다.
커튼콜에서는 역시 폭발적인 함성이 터졌다. 이는 김준수의 소녀 팬들이 내는 것이기도 했지만, 작품에 감명을 받은 일반 청중의 것이기도 했다.
김준수는 스스로 한국 뮤지컬계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 ‘드라큘라’를 관람한 사람이라면 그동안의 뮤지컬 언어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를 비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준수는 잘한다. 앞으로 더 잘할 것 같다. 김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