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초 부소니 ①

고전에 불어넣은 새로운 숨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6월 1일 12:00 오전

1866년 이탈리아 엠폴리에서 출생
1873년 첫 공개 연주회 개최
1875년 빈 음악원 입학
1881년 볼로냐 아카데미아 필하모니카 회원 선출
1884년 ‘쇼팽 C단조 전주곡에 의한 변주와 푸가’ 작곡
1888년 헬싱키 음악원 부임
1890년 모스크바 음악원 부임 바흐의 2·3성 인벤션 편곡집 출판
1892년 뉴잉글랜드 음악원 부임
1910년 ‘대위적 환상곡’ 작곡

우리가 부소니를 무대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다. 간혹 있는 바흐의 피아노 편곡 연주에서 그의 이름을 보는 정도가 대부분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피아니스트 문지영이 제60회 부소니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하며, 올해 부소니 탄생 150주년에 앞서 그의 이름을 알린 것은 다행스럽다.

생전 부소니는 작곡가보다 피아니스트로 더욱 잘 알려져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리사이틀에서조차 본인의 작품을 드물게 연주했을 정도로 작곡가로서 자존감도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정반대였다. 그는 자신의 음악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어우러지기를 원했고, 스스로 자신의 음악적 특징을 ‘시간의 편재’(The Omnipresence of Time)라 정의했다. ‘편재(遍在)’라는, 신에 쓰이는 표현을 자신에게 사용했을 정도로 작곡가로서 부소니의 정체성은 매우 고상했다.

아버지의 가르침 아래 거둔 이른 성공

페루초 단테 미켈란젤로 벤베누토 부소니(1866~1924)는 1866년 4월 1일 일요일, 피렌체에서 남서쪽으로 20km 떨어진 엠폴리에서 태어났다. 얼마 후 그와 가족은 이탈리아 북동쪽 끝자락에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항구도시 트리에스테로 이주했다.

부소니는 자신의 생일에 여러 의미를 부여했다. 우선 자신을 ‘만우절 바보’로서 신의 어릿광대라 여겼으며,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일요일의 어린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음악가로서 임무와 음악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으며, ‘소리의 우주’에 대한 고찰로 이어져 나라와 민족, 시대, 양식, 악파 등을 아우르고 뛰어넘는 음악을 추구하게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의 음악은 자연스럽게 ‘시간의 편재’로 발전했다.

부소니의 아버지 페르디난도는 지역에서 상당한 실력을 자랑하던 클라리넷 연주자이자 작곡가였으며, 어머니 아나 바이스는 독일계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부모에게서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는 라틴적인 감수성과 상상력을, 어머니는 지성적이고 구조적인 게르만적 기질을 복합적으로 물려주었다. 부소니의 양식 복합적 경향에는 부모의 다양한 문화도 한몫했을 것이다.

주로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배운 부소니는 7세이던 1873년, 트리에스테에서 모차르트·슈만·클레멘티의 곡으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졌을 정도로 신동 기질을 보였으며, 8곡의 자작곡을 완성하며 작곡가로서도 첫발을 내디뎠다. 이러한 이른 성공에는 아버지의 공이 컸다. 그러나 부소니가 “내게는 어린 시절이 없었다”고 회상한 점을 미루어보건대, 여러 차례 이어진 상업적 연주회로 인해 부소니 부자의 인간적 친밀감은 부족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도 훗날 부모에게 적지 않은 생활비를 꾸준히 송금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추모곡을 쓰는 등 아버지에 대한 속마음이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당시 부소니의 작품은 피아노를 위한 소품이 대부분이다. ‘주제와 변주’(1873), ‘이노 변주곡’(1875) 등은 모차르트의 초기 작품 같은 인상을 풍긴다.

빈의 신동, 헬싱키의 교수가 되다

부소니는 1875년에 빈 음악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저명한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로부터 격찬을 받았을 정도로 그의 연주 실력은 이미 유럽에서 인정받고 있었다. 1881년에는 15세란 나이로 볼로냐 아카데미아 필하모니카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예도 얻었다. 이는 13세에 회원이 된 모차르트 이후 가장 어린 나이였다.

부소니가 빈에서 조우한 음악가 중에는 브람스도 있었다. 부소니는 1883년에 작곡한 두 개의 연습곡을 브람스에게 헌정했을 정도로 그를 존경했다. 브람스는 부소니에게 라이프치히의 카를 라이네케로부터 공부할 것을 권했다. 이렇게 시작된 라이프치히 생활은 후원자가 있었음에도 금전적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불안정했다. 부소니는 돈을 벌기 위해 리사이틀을 열거나 출판사가 원하는 상업적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던 중 1888년에 헬싱키 음악원 교수로 추천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비록 2년 정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안정된 직장을 가진 헬싱키에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1889년 3월 그의 아내가 될 예르다 셰스트란드를 만났고, 음악원 학생이던 시벨리우스를 만나 평생 친분을 유지했다. 핀란드에서의 행복은 피아노 연탄곡 ‘핀란드의 민요’(1888)와 셰스트란드를 위해 작곡한, 핀란드 민요 주제에 의한 열 개의 작은 변주곡 ‘연인’(1889)에 녹아 있다. 특히 ‘연인’은 제목을 핀란드어 ‘Kultaselle’로 쓴 것에서 그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빈에서 전문적 교육을 받으면서 작곡한 곡들은 슈만의 영향이 강하다. 피아노곡 ‘전원 모음곡(5개의 성격소곡)’(1878)이나 ‘환상적인 이야기(3개의 성격소곡)’(1882)는 제목에서부터 슈만의 인상이 물씬 풍긴다. 하지만 클라리넷을 위한 ‘모음곡’(1878) 같은 작품은 슈만의 영향을 드러내면서도, 개성적인 과감한 표현 또한 숨기지 않는다. 피아노 소나타 F단조(1883)는 고전적인 형식을 유지하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조성이 매우 파격적이다. ‘쇼팽 C단조 전주곡에 의한 변주와 푸가’(1884)는 30분이 넘는 압도적인 규모의 작품으로, 초기 부소니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보아도 손색없다.

헬싱키 시절의 작품들인 ‘연인’과 바이올린 소나타 1번(1890)에는 브람스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 있다. 특히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의 진행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돌발적이며, 2악장의 극단적인 고요는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 ‘유령’ 이후 손꼽을 만큼 충격적이다.


▲ ‘대위적 환상곡’의 구조를 나타낸 부소니의 스케치

기념비적인 업적, 바흐 작품의 편곡

헬싱키 시절이던 1889년 라이프치히를 방문한 부소니는 바흐의 오르간 작품 ‘토카타와 푸가 D단조’를 듣게 되었다. 이때 그의 제자였던 카티 페트리는 작품의 피아노 편곡을 제안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바흐의 음악을 공부해 친숙했을 뿐 아니라 바흐를 음악의 시작이라 여긴 부소니는 제안에 흥미를 느꼈고, 1890년 바흐의 2·3성 인벤션을 피아노용으로 편곡하여 출판했다. 부소니의 전기 작가인 에드워드 덴트는 이 작업이 “부소니의 편곡 작업의 시작”이라 말하며 “그의 독창적인 피아노 타건과 연주 스타일의 시작”이라고 덧붙였다.

이후 부소니는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수많은 바흐 작품을 총 7권으로 정리했다. 여기에는 계기가 된 ‘토카타와 푸가 D단조’와 평균율 피아노곡집 1·2권 및 바이올린 작품인 ‘샤콘’ 등이 포함돼 있다.

부소니의 작업은 원곡의 리듬과 선율, 화음은 그대로 두고 단지 템포와 아티큘레이션, 프레이징, 다이내믹 등을 지정하는 범위에서 이루어졌다. 부소니는 “모든 기보는 이미 모호한 생각의 편곡이다 (…) 연주 또한 편곡으로, 자유롭게 연주했다 하더라도 본래의 것을 결코 파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즉, 그의 바흐 편곡은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원곡을 유지하면서 연주자 입장에서의 편곡인 ‘해석’을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1909년 아버지를 추모하며 쓴 ‘J.S. 바흐에 따른 환상곡’은 바흐에 따른 주관적인 인상을 음악화하며 부소니가 바흐를 새롭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듬해 그는 30분이 넘는 대작 ‘대위적 환상곡’을 완성했다. ‘푸가의 기법’ 등 바흐의 여러 작품과 ‘B(B♭)-A-C-H(B) 주제’를 사용한 곡으로, 부소니는 곡의 구조를 자신이 직접 그린 건축물 그림에 빗대어 설명했다. 그만큼 ‘대위적 환상곡’은 부소니의 기념비적인 피아노 작품이다.

이러한 변화는 ‘골드베르크 변주곡’ 편곡(1914)에 영향을 끼쳤다. 부소니는 “음악회 연주를 위해” 8개 변주곡의 길이를 줄이고 직접 작곡한 부분을 삽입하는 등 적극적으로 손질을 가했다. 케네스 해밀턴은 “마지막 4개의 변주곡은 바흐보다는 부소니의 스타일로 만들어진 자유로운 환상곡으로서 다시 작곡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부소니는 바흐뿐 아니라 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멘델스존·슈만·쇼팽·리스트·바그너·브람스 등 다양한 작곡가의 96곡을 피아노로 편곡했으며, 모차르트·베토벤·베버·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9곡의 카덴차를 썼다.


▲ 아내 게르다 셰스트란드와 아들 벤베누토(우), 라파엘로(좌)

방황 끝에 안착한 도시 베를린

1890년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연주회용 작품’(1889~1890)으로 안톤 루빈시테인 콩쿠르에서 우승한 부소니는 이를 계기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에 임명됐다. 셰스트란드도 부소니를 따라 모스크바로 이주했고, 둘은 곧 결혼식을 올렸다.

러시아에서의 생활은 헬싱키와 달리 힘겨웠다. 러시아의 음악가들과 어울리기는 쉽지 않았으며, 모스크바 음악원의 월급은 형편없었다. 부모에게 적잖은 생활비를 송금해야 했던 그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1892년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 제의를 받았을 때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보스턴에서 첫째아들 벤베누토가 태어나는 등 좋은 일도 있었지만, 이곳의 교수 생활도 그리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결국 이듬해 음악원을 사임한 그는 미국 동부를 중심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이것이 부소니의 마지막 교수 생활이었으며, 심란하던 이 기간에는 작곡도 거의 하지 않았다.

1894년 미국 생활을 청산한 후 정한 거처는 베를린이었다. 당시 베를린은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로 인해 국제적 영향력이 급격히 커지고 있던, 거장이 활동하기에 안성맞춤인 도시였다.

이후 부소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베를린에서 살게 된다. 9세에 빈으로 떠난 후 다시는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 그가 이탈리아 국적을 유지했음에도 이탈리아식 발음인 ‘부소니’보다 독일식 발음 ‘부조니’로 더 잘 알려진 것은 그가 전성기 시절 실질적으로 독일 음악가로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작품 이름을 대부분 독일어로 작성한 것 또한 이에 일조했다.

‘베를리너’ 부소니는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다.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리사이틀 무대에 올랐으며, 1904년부터 1915년까지 무려 네 번이나 미국 투어를 가지기도 했다. 부소니 연구가 앤터니 보몬트는 이 시기의 많은 음악회 중, 1911년 베를린에서 리스트 작품을 연주한 6회의 리사이틀을 “전쟁 전 피아니스트로서 부소니 최고의 때”라 회고한다.

어쩌면 부소니는 유목민적 생활을 선호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교수 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이후 그의 가르침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마스터클래스나 세미나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쇤베르크·바레즈·슈나벨·마리네티·보초니와 같은 다양한 미래지향적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고 수용했다. 예술가로서 만족스러운 삶 속에서, 부소니의 중요한 걸작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글 송주호
클래식 음악은 우리의 삶의 모습이라는 생각으로 기고와 강의를 하고 있다. 음악회를 위해 프로그램을 짜거나 해설자로 무대에 서기도 한다. 현재 화음쳄버오케스트라의 자문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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