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베르너 헨체

COMPOSER OF THE MONTH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0월 1일 12:00 오전

인사이드의 아웃사이더

1926 독일 귀테르즐로에서 출생
1949 ‘발레 변주곡’ 작곡
1953 첼로 협주곡 ‘서풍의 송가’ 작곡
1968 오라토리오 ‘메두사 호의 뗏목’ 초연
1970 음악극 ‘엘 시마론’ 초연
1976 몬테풀차노 국제예술워크숍 설립
1981 뮈르츠탈 워크숍 설립
1988 뮌헨 비엔날레 개최 및 초대 예술감독
2012 독일 드레스덴에서 사망

아웃사이더의 대명사로 불리던 독일 작곡가 한스 베르너 헨체가 올해 탄생 90주년을 맞았다. 그는 말러처럼 이민족도 아니었고 리게티처럼 변방에서 온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의 신념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다. 그럼에도 헨체의 영향력이나 활동무대만큼은 인사이드였다.

혼란 속에서 음악을 꿈꾸다

한스 베르너 헨체(1926~2012)는 독일 중앙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베스트팔렌 지역의 귀테르즐로에서 태어났다. 헨체의 아버지는 빌레펠트에서 교사로 일했는데, 이 학교가 진보적 성향을 띤다는 이유로 1935년에 정부에 의해 폐쇄되자 가족은 뒤네로 이주했다.

이후 열혈 나치 당원이 된 아버지는 기독교인이나 유대인 저자의 책을 모두 없애고 나치의 관점에서 서술한 책들로 책장을 채웠다. 10대의 헨체는 ‘히틀러 소년단’의 멤버로 활동해야 했다. 유일하게 그를 위로한 것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었다. 헨체가 학교에서 음악 이외의 과목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1942년에 그를 브라운슈바이크 국립음악학교로 보냈다. 그제야 비로소 한스는 피아노와 타악기, 음악 이론을 비롯한 체계적인 음악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43년 군대에 자원한 그의 아버지는 동부 전선에 배치된 후 실종됐고, 이듬해엔 헨체 마저도 징집에 응해야 했다. 통신병으로 복무하던 한스는 곧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종전까지 포로수용소에 갇혀 지냈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헨체는 빌레펠트 시립극장의 반주자로 활동하던 1946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당대 거장 중 한 사람이던 볼프강 포르트너를 사사했다. 헨체는 12음 기법(한 옥타브를 이루는 12반음에 동등한 중요성을 부여한 현대 기법)의 추종자인 그를 따라 음렬 음악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포르트너는 구시대의 방식이라는 이유로 정작 헨체에게 이 기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12음 기법에 대한 헨체의 열망은 바이올린 협주곡 1번(1947)에 잘 나타나 있다. 작품은 전치, 역행, 전치역행 등의 12음 기법 체계가 전혀 갖춰지지 않은, 단지 12음으로 구성된 주제를 통해 청각적으로 비슷하게 들리게끔 작곡한 일종의 무조 음악이다.

헨체는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기 위해 12음 기법에 정통했던 르네 레이보비츠, 쇤베르크의 제자인 요제프 루퍼 등을 만나 이 기법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첼로 협주곡 ‘서풍의 송가’(1953)는 이 노력의 결정체다. 곡은 다섯 악장에 영국 낭만주의 시인 셸리의 시를 한 편씩 선정해 멜랑콜리한 시상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헨체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관심과 함께 신고전의 흐름을 탔다. 헨체의 신고전주의는 스트라빈스키의 ‘3악장의 교향곡’(1945) 같은 후기적 경향에 가깝다. 앞서 언급한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3개의 교향곡(1번 1947, 2번 1949, 3번 1949~1950)이 헨체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1948년 콘스탄츠 극장의 음악 어시스턴트가 된 헨체는 2년 후 비스바덴의 헤센 극장 발레단의 지휘자로 임명됐다. 기간이 그리 길진 않았지만, 이 경험은 ‘발레 변주곡’(1949)을 작곡하는 등 그가 무대음악의 매력에 깊이 빠져든 계기가 됐고 음악 전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극장은 나의 영역이다. (…) 제스처가 있는 나의 음악은 구체적이며 시각적이다. 그 자체로 삶과 은밀히 연결된 드라마다.”

이후 헨체의 많은 작품이 춤이나 문학과 결합한 자유로운 형식의 드라마로서 진행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독일인


▲ 1960년 BBC 라디오 출연 당시. 오른쪽부터 헨체, 대본가 위스턴 휴 오든과 시인 체스터 칼먼 ⓒBBC

탄탄대로일 것만 같던 20대 헨체의 앞길에 차츰 어둠이 드리워졌다. 당시 독일은 사회주의에 경도된 헨체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을뿐더러, 동성애자인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헨체는 1953년 ‘서풍의 송가’ 작곡을 마친 후 독일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탈리아로 영구 이주를 결행했다.

처음 정착한 곳은 나폴리 해안가의 이스키아 섬이었다. 이곳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영국 작곡가 윌리엄 월턴 부부는 새로 이주해온 젊은 작곡가에게 큰 관심을 갖고 친분을 쌓았다. 3년 후 섬에서 나온 헨체는 5시간에 이르는 장대한 오페라 ‘사슴 왕’(1956)을 비롯한 여러 작품의 흥행에 실패하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점차 이탈리아의 색채에 물들어가면서 인기를 얻었다. 이탈리아의 영향은 ‘5개의 나폴리 노래’(1956) 같은 성악곡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독일 거주 시절 무대음악에 집중하면서 아방가르드 음악의 범주에서 조금씩 벗어났던 헨체는, 이주 후 이탈리아 음악의 영향을 받으며 아방가르드와의 결별에 가속도를 붙였다. 결국 그는 1958년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4개의 시’(1955)가 연주될 당시 불레즈와 슈토크하우젠이 퇴장하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 이후 카라얀을 위해 작곡한 ‘안티포네’(1960)에서 다시 독일식의 엄격한 형식을 갖춘 무조 음악을 선보였으나, 헨체는 이 곡에 대해 작곡 실력을 다듬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1961년 로마 근교의 마리노로 거처를 옮긴 헨체는 보다 부드럽고 서정적인 스타일을 추구했다. 현을 위한 환상곡(1966)에서 이런 작풍이 두드러지는데, 감상적인 선율과 분위기 있는 반주에선 더 이상 새로운 작곡 기법을 좇던 시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대담한 사회주의적 행보

독일에서부터 사회주의 성향을 갖고 있던 헨체는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정치 행보를 보였다. 1968년 함부르크에서 오라토리오 ‘메두사 호의 뗏목’이 초연될 당시의 소동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사회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레퀴엠으로 작곡됐는데, 초연을 맡은 RIAS 카머콰이어가 무대에 걸린 체 게바라의 초상화와 혁명기를 보고 “붉은 깃발 아래서 노래할 수 없다”며 연주를 거부한 채 퇴장한 것이다. 초연 직전에는 학생들이 체 게바라의 포스터와 ‘혁명’이라고 쓰인 플래카드, 공산화된 북베트남의 깃발을 들고 나타나 경찰들이 강제 해산을 시도하기도 했다. 헨체는 청중에게 “경찰의 방해로 연주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알리며 ‘호치민’을 연호하도록 유도했다.
이러한 주제는 유사한 장르인 ‘목소리들’(1973)에서도 나타난다. 모더니즘부터 대중음악까지 광범위한 전반기 음악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대작으로, 헨체는 이 곡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종과 계층 간의 대립을 언급한다. 이 소재는 ‘엘 시마론’(1969~1970), ‘나타샤 웅게호이어의 집으로 가는 고된 길’(1971), ‘우리는 강으로 간다’(1974~1976) 등 음악극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다뤄졌다. 1976년 코번트 가든에서 있었던 ‘우리는 강으로 간다’ 초연을 위한 해설에서 헨체는 예술가의 역할을 “노동자 계급의 이미지와 의식의 창조”라 규정했다.

교향곡 6번(1969), 바이올린 협주곡 2번(1971)도 이러한 성향을 지닌다. 교향곡 6번에서는 베트남 독립전선의 노래인 ‘밤의 별’과 그리스의 좌파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1925~)의 ‘자유찬가’ 등을 삽입하여 그 의도를 명확히 했다. 쿠바에서 작곡된 만큼 남아메리카의 민속음악과 쿠바의 전통 악기를 사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바이올린 협주곡 2번에서는 특이하게도 바리톤이 등장해 엔첸스베르거의 시 ‘괴델 예찬’을 부른다. 여기에 연주자들의 의상과 연기, 조명 등의 연출을 가미해 음악극과 같은 효과를 꾀한다.

사실 정치·사회적인 주제가 아니더라도 기악 음악이 드라마적 요소를 갖는 것은 헨체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교향곡 4번(1955)은 오페라 ‘사슴 왕’의 2막 마지막 부분을 기악으로 편곡한 것이며, 오페라 ‘바사리드’(1964~1965)의 연장선상인 피아노 협주곡 2번(1967)에 대해서는 “복수심에 불타는 디오니소스의 승리 이후 (…) 테베의 멸망에 대한 애가”이자 “사이코드라마”라고 말했다. 피아노와 테이프, 관현악을 위한 ‘트리스탄’(1973)은 바그너의 음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로부터 받은 이미지를 음악화했다.

고전으로의 귀환


▲ 2010년 오페라 ‘기젤라’ 초연 직후 ⓒUrsula Kaufmann

1970년대 후반부터는 보다 적극적으로 음악교육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76년에 이탈리아 중부의 소도시 몬테풀차노에 국제예술워크숍을 설립했고, 이곳에서 어린이 오페라 ‘폴리치노’(1980)를 선보였다. 1980년부터 1991년까지 쾰른 음악학교에서 작곡 강의를 맡았고, 1981년엔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지역에 뮈르츠탈 워크숍을 창설했다. 1984년 같은 지역의 도이칠란츠베르크에서 청소년 음악제를 열었으며, 1988년엔 극음악 축제인 뮌헨 비엔날레를 열고 초대 예술감독을 맡았다.

이 시기의 헨체는 훨씬 전통적인 음악을 표방했고, 정치 성향을 유지하면서도 논란의 여지를 줄이는 쪽으로 작품을 은유했다. 심지어 교향곡 7번(1983~1984)과 8번(1992~1993)은 베토벤으로부터 이어받은 독일의 전통적인 형식이 두드러져 초연 당시 공연장을 찾은 관객과 비평가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문학과 기악의 결합은 말년에도 계속됐다. 교향곡 7번의 4악장은 횔덜린의 시 ‘삶의 절반’에 기초하고 있고, 바이올린 협주곡 3번(1996)의 세 악장에는 토마스 만의 소설 ‘파우스트 박사’의 등장인물인 ‘에스메랄다’ ‘어린 에코’ ‘루디 S.’라는 제목이 각각 붙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앞서 언급한 ‘서풍의 송가’와 셰익스피어 희곡의 등장인물들을 그린 클래식 기타 작품 ‘로열 윈터 뮤직’(1번 1976, 2번 1979) 등 이전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곡들은 시나 소설의 서사적 스토리에 따르기보다는 이미지를 음악화한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염두에 두고 합창을 편성한 교향곡 9번(1995~1997)은 반(反) 나치 영웅과 희생자들에게 헌정됐다. 이후에도 헨체는 교향곡 10번(1997~2000)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을 발표했지만, 2012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다.

헨체는 작곡가 올리버 너슨과의 인터뷰에서 ‘엘 시마론’에 대해 “그(‘엘 시마론’의 주인공 에스테반 몬테호)가 말하는 모든 것은 오늘날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헨체의 음악은 사회에 소속된 예술가로서의 역할에 대해 오늘날에도 시사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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