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르지 쿠르타그

COMPOSER OF THE MONTH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1월 1일 12:00 오전

음악으로 그린 초상

 

1926 루마니아 루고지에서 출생
1946 리스트 음악원 입학
1959 현악 4중주 Op.1 작곡
1967 리스트 음악원에 피아노·실내악 교수로 부임
1988 ‘…콰시 우나 판타지아…’ 작곡
1989 ‘슈타인을 위한 비석’ 작곡
1990 음악극 ‘R. Sch.에 대한 오마주’ 작곡
1991 배우 모뇨크 일디코를 위한
‘사뮈엘 베케트: 무슨 말인가’ 작곡
1993 베를린 필 상주작곡가 임명
1995 빈 콘체르트하우스 상주작곡가 임명
2006 ‘…콘체르탄테…’로 그라베마이어상 수상

현대음악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고된 가시밭길을 걸어온 것일까?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낼 방법을 찾기 위해서 아닐까? 이것이 질문의 답이라면, 쿠르타그의 음악 또한 그 답이다. 20세기 모진 역사의 현장을 맨몸으로 부딪치며 우리네 삶을 진솔하고 직접적으로 그린 쿠르타그. 올해 탄생 90주년을 맞아 전 세계적으로 작품들이 조명되고 있으며, 이달 내한하는 정상급 피아니스트이자 현대음악 스페셜리스트인 피에르 로랑 에마르도 그의 작품을 연주한다.

불안한 조국과 뒤늦은 출세

죄르지 쿠르타그(1926~)는 루마니아 바나트 지역의 루고지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왜 그를 헝가리 작곡가라 말할까? 헝가리는 1920년에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트리아농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엔 영토 중 무려 72%를 주변국에 양도한다는 내용이 포함됐고, 이에 따라 바나트는 루마니아에 속하게 됐다. 그래서 쿠르타그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났지만, 실질적으론 유태계 헝가리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졌다.

1946년 부다페스트의 리스트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배필이 될 마르터와 평생지기 친구인 죄르지 리게티를 만났다. 스승은 졸탄 코다이의 후임이었던 샨도르 베레시였다. 그러나 1949년에 헝가리가 공산화되자 베레시는 자신의 발레 음악 초연을 위해 스톡홀름으로 떠났다가 그 길로 망명한다. 이후 쿠르타그는 베레시의 후임 페렌츠 퍼르커스를 사사하며 1955년에 작곡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이듬해 10월, 공산주의 정부에 대항한 대규모 민중 봉기가 옛 소련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많은 헝가리인이 서방으로 탈출했고, 12월엔 리게티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 출발하기로 한 쿠르타그는 그 사이 국경이 폐쇄되는 바람에 헝가리에 남겨졌다. 그러나 목숨을 건 탈출이 필요 없음을 직감했던 것일까? 쿠르타그는 헝가리를 벗어나지 않고도 1957년에 파리로 유학을 떠날 기회를 얻었다.

파리에서 그는 다리우스 미요와 올리비에 메시앙으로부터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유학 시절을 “세상이 진실하다고 전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절망에 빠져 있었다”고 회고했을 만큼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렸다. 심리학자 머리언네 슈타인의 도움으로 회복하여 재기한 쿠르타그는 안톤 베베른과 사뮈엘 베케트를 알게 되며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찾았다. 파리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낸 후, 그는 망명이 아닌 귀향을 택했다.

1958년 헝가리로 돌아온 쿠르타그는 1960년부터 부다페스트 내셔널 필하모니아의 반주자로 일했으며, 1967년에는 모교인 리스트 음악원의 피아노와 실내악 교수가 되었다. 1970년대까지는 그의 작품이 서방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1년 소프라노와 실내악을 위한 ‘故 R. V. 트루소바의 메시지’의 파리 초연 후 갑자기 유명인사로 떠올라 서유럽을 자주 방문하게 됐다. 1993년 베를린 필의 상주 작곡가로 임명되자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1995년 빈 콘체르트하우스의 상주 작곡가로 활동한 후 네덜란드·독일·프랑스 등지에서 살았으며, 현재는 프랑스의 보르도 근교에 거주 중이다.

영감의 원천, 4명의 선대 작곡가

“나의 음악적 모국어는 버르토크다.”

쿠르타그가 태어난 바나트는 버르토크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는 누구보다 버르토크를 가깝게 여겼다. 버르토크가 그랬듯 헝가리 민속음악을 주요 소재로 사용했으며, 특유의 아치 구조를 선호했다. 나아가 “버르토크의 음악적 모국어는 베토벤”이라 생각한 그는 베토벤 또한 존경했다. 초기에는 “(베토벤의 음악은) 무엇인가 나타나고 대답을 이끌어낸다”며 베토벤식의 질문-응답 구조를 자주 사용했는데, 후기로 갈수록 ‘대답’이 사라지며 내면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그럼에도 베토벤에 대한 경외심은 여전했다. 42세에 작곡한 피아노와 체임버 앙상블을 위한 협주곡 Op.27(1987~1988)에는 베토벤의 작품 번호 27인 2개의 피아노 소나타의 부제를 활용해 ‘…콰시 우나 판타지아…’라는 제목을 붙였다. 베토벤의 곡을 인용했다거나 고전적 인상을 주진 않지만, 전통적인 4악장의 구성에 현대적 이미지를 담은 작품으로서 매우 적절한 제목이다.

쿠르타그를 사로잡은 또 하나 인물은 안톤 베베른이다. 짧은 작품이 던지는, 강하게 응축된 이미지로부터 큰 인상을 받은 쿠르타그는 여기에 삶의 메시지를 넣어 마치 말하는 듯한 음악적 제스처로 자신의 작품을 채웠다. 그리고 첫 작품인 현악 4중주 Op.1(1959)을 내놓았다. 이전까지 여러 작품을 썼음에도 이 곡에 작품번호 1을 붙인 것은, 그의 음악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의미와 함께 ‘분명한 자신의 소리를 찾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곡은 쿠르타그의 음악적 특징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된다. 첫째, 다악장 구성. 이 곡은 모두 6악장으로 이루어진다. 둘째, 매우 짧은 길이. 마지막 악장을 제외하곤 대부분 1~3분 정도이며, 그만큼 각 곡이 단일한 성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슈만의 소품들과 연결된다. 실제로 쿠르타그는 슈만의 분열된 자아인 오이제비우스와 플로레스탄, 마에스트로 라로, 그리고 ‘크라이슬레리아나’의 주인공인 크라이슬러와 14세기 작곡가 기욤 드 마쇼가 등장하는 상상의 음악극 ‘R. Sch.에 대한 오마주’(1990)를 썼다. 셋째, 아치 형태의 구조. 앞에서 언급했듯이 버르토크가 즐겨 사용하던 구성으로, 조용히 시작된 곡은 클라이맥스에 이른 후 다시 조용하게 끝을 맺는다.

짧은 길이의 다악장 형식은 다중 양식으로 발전했다. 현악 4중주 ‘미하이 언드라시에 대한 오마주’(1977~1978)를 구성하는 12곡 가운데 짧은 것은 겨우 10여 초, 긴 곡 역시 2분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곡에는 코랄풍 음악과 오스티나토 음형, 향수 어린 민속적 선율 등 다양하고 풍부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 지난 2월 리스트 음악원에서 열린 90세 기념 연주회에서 ©Mudra László

음표로 쓴 ‘인생극장’

쿠르타그의 짧은 작품들은 철저히 단편적이다. 작품 간에 연결성이 없어 마치 어디에 붙여야 할지 알 수 없는 깨진 그릇 조각과 같다. 작품들이 저마다 개성을 지니게 된 것은 그가 음악으로 여러 인물을 크로키하기 때문이다. 쿠르타그는 대부분의 작품을 누군가의 오마주, 혹은 기념이나 추모곡으로 헌정했다. 대상에는 잘 알려진 음악가, 어려운 시절을 함께했던 고국의 음악가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있다.

그중 독특한 예로는 헝가리의 배우 모뇨크 일디코를 위한 ‘사뮈엘 베케트: 무슨 말인가’(1990~1991)를 들 수 있다. 그녀는 1982년 버스 사고로 말하기와 쓰기, 숫자 개념을 상실했다. 7년간 말을 하지 않았던 모뇨크는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노래로 재활 훈련을 시작했고, 이를 본 쿠르타그는 어구들이 반복, 나열된 베케트의 시 ‘무슨 말인가’에 음악을 붙였다. 곡은 1991년 10월 빈에서 모뇨크의 낭독과 아바도의 지휘로 초연됐으며, 음반으로도 발매됐다.

오늘날 쿠르타그를 대표하는 ‘기호’(jelek)와 ‘놀이’(játékok) 시리즈 역시 수많은 사람의 초상이다. 특정인에 대한 개인적 인상과 감정을 일기 쓰듯 직관적으로 담은 내밀한 작품들로, 쿠르타그의 의성어적 표현들이 진실한 표정으로 무(無)로부터 왔다가 몇 마디 건네고는 이내 무로 사라진다.

쿠르타그의 음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삶에서 느끼는 슬픔과 고독,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하는 죽음이다. ‘故 R. V. 트루소바의 메시지’의 에필로그에서 천천히 하강하는 저음 글리산도가 트루소바의 죽음을 감각적으로 전달하듯, 직선적으로 호소하는 강렬한 사운드와 웅얼거리는 속삭임에는 주제를 곱씹는 내면의 아픔이 담겨 있다.
그의 음악은 이러한 제스처들의 비극적 팬터마임이다. 소프라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카프카-단편’(1985~1986)과 무반주 바리톤 독창곡 ‘횔덜린-노래’(1993~1997)는 그 극단에 서 있다. 쿠르타그의 음악은 삶의 고통이 성흔처럼 새겨 있는, 토마스 뵈셰가 카프카에 대한 발터 베냐민의 표현을 빌려 말했듯, ‘인생극장’(welttheater)이며, 하르트무트 뤼크의 말처럼 “극단적으로 위태로운 삶을 자각한 내면세계의 음악적 시”다.

쿠르타그의 대형 관현악 작품들

쿠르타그에겐 대형 관현악 작품이 없을까? 리스트 음악원 재학 시절 전통적 음악어법으로 작곡한 비올라 협주곡(1953~1954)이 눈에 띈다. 이후로는 관현악곡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케스트라급은 아니지만 비교적 큰 규모로는 기타와 앙상블을 위한 ‘슈타인을 위한 비석’(1989)이 있다. 머리언네 슈타인의 남편 슈테판 슈타인을 추모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유학 시절이 생각났던 걸까? 그는 당시 관람하던 슈토크하우젠의 ‘그룹들’(1955~1957)을 떠올렸다. 세 오케스트라가 객석을 에워싸고 연주하는 작품으로, 쿠르타그는 ‘슈타인을 위한 비석’에 이를 응용하여 20여 명의 연주자가 기타를 둘러싸는 배치로 공간적인 음향을 만들었다.

관현악 경험이 거의 없는 쿠르타그는 1993년 베를린 필의 상주 작곡가가 되자 고민에 빠졌다. 장편의 관현악 작품을 어떻게 쓸 것인가? 고심 끝에 ‘스텔레’(1994)가 탄생했다. 스텔레는 그리스어로 ‘비석’이라는 뜻으로, ‘타인을 위한 비석’과 ‘죽음’이라는 주제의 측면에서 연결된다. ‘슈타인을 위한 비석’에서 힌트를 얻었을 수도 있다. 3악장의 장송 교향곡인 이 작품은 다양한 음악적 표현이 뒤엉켜 있으며, 극단적인 고요에서 시작하여 폭발적 탄성을 지른 후 다시 적막으로 침잠하는, 전형적인 버르토크식 아치 구조를 가진다. 특히 마지막 악장에 버르토크의 오페라 ‘푸른 수염의 성’ 중 ‘눈물의 호수’를 연상케 하는 요소를 넣음으로써 자신의 비통한 감정을 표현했다.

뒤늦게나마 관현악 분야에 성공적인 출사표를 던진 쿠르타그는 이어 바이올린과 비올라, 관현악을 위한 2중 협주곡 ‘…콘체르탄테…’(2003)로 2006년 그라베마이어 상을 받기에 이른다. 곡의 제목은 ‘…콰시 우나 판타지아…’를 떠올리게 하는데, 어디서부터인가 살며시 다가와 고조된 후 다시 살며시 사라지는 아치 구조를 제목이 말해준다.


▲ 쿠르타그는 부인 마르터와 피아노 듀오를 종종 즐기곤 한다

연주는 ‘놀이’다

쿠르타그는 지금도 부인 마르터와 피아노 듀오를 위한 ‘놀이’를 즐겨 연주한다. 그는 ‘놀이’에 대해 “연주하면서 자신을 잊는 어린이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어린이에게 악기는 여전히 장난감이다”라고 말한다. 악보 서문에는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놀이를 하는 것이다. 연주자에게 주도성과 자유로움을 요구한다”고 적었다. 현재 325곡이 8권의 책으로 묶여 출판됐으며, 지금도 작곡 중이다.
쿠르타그는 ‘놀이’를 연주할 때 반드시 바흐의 편곡을 동반한다. 그에게 바흐는 어떤 의미일까? 그는 14세기의 마쇼부터 20세기의 작곡가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곡가들을 음악으로 불러내어 대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바흐만은 그의 음악으로 부르지 않고 편곡해 연주하는 것을 보면, 바흐는 대화의 상대가 아닌 경외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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