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8일~11월 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외
작곡가, 지휘자, 스승으로서 펜데레츠키를 만날 수 있던 무대
폴란드 작곡가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1933~)는 1992년 광복절에 한국에서 교향곡 5번 ‘한국’을 초연한 이래 여러 차례 내한하여 자신의 작품을 지휘했다. 하지만 자신이 예술감독으로 있는 신포니아 바르소비아와의 내한은 처음 성사된 것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또한 한국에서 지휘자로서 고전 작품을 처음 선보였다는 점도 이목을 모았다. 부산(10월 28일)과 서울(29·30일), 대구(11월 1일)에서 열린 네 번의 연주회 중 필자는 세 번째 연주회에 참석했다.
첫 곡은 펜데레츠키의 샤콘(2005)으로, 펜데레츠키와 신포니아 바르소비아는 음악적 메시지를 완벽하게 전달하며 오랫동안 맞춰온 호흡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저음 악기의 하행하는 반음계적 진행 위에 주고받는 제1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대위법적 선율은, 고통을 머금고 슬픔을 신에게 위탁하는 종교적 비가를 노래했다.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대조에서 불안한 긴장감을 만드는 극적 효과를 얻으며, 무게중심을 잡는 저음 또한 강한 인상을 준다. 운구 행렬의 발걸음과 같이 비통한 심정을 가득 담고 있는 저음 오스티나토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외적인 목소리라면, 안정을 거부하는 고음 선율은 이와 대조적인 인간의 심정을 그린다.
두 번째 곡으로 펜데레츠키의 중요한 제자 중 한 사람인 류재준(1970~)의 마림바 협주곡(협연 한문경)이 연주되었다. 이 곡의 지휘는 마치에이 트보레크가 맡았다. 류재준의 음악은 스승의 영향으로 신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이지만, 이 작품은 전통적 화음과 고전적 투명함을 지니며, 특히 선율의 가벼운 움직임이 눈에 띤다. 음들이 틀에 고정되어 있기보다는 수필처럼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진행하는 느낌을 준다. 또한 관현악이 중심이 되고 독주 악기가 주석을 붙이는, 일종의 오블리가토 같은 모양새를 갖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때문에 마림바를 연주한 한문경은 관현악과 대결하기보다는 조화를 이루며 자신의 길을 갔다. 3악장 피날레는 앞의 두 악장과 달리 마림바 독주의 활약을 요구했다. 반음계적이며 빠른 리듬을 갖는 이 악장은 쇼스타코비치가 연상될 정도로 조직적이고 긴장감을 연출했다.
후반부는 다시 펜데레츠키의 지휘로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7번이 연주되었다. 신포니아 바르소비아는 일반적인 관현악단에 비해 현악의 규모가 작아 밸런스가 다소 불안정했지만, 30여 년의 관록으로 곧 안정을 찾았다. 특히 금관 연주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한 번에 날려줄 정도로 생기 있고, 훌륭했다. 2악장에서는 선율의 아름다움과 목관의 다채로운 음색의 향연을 한껏 살렸다. 드보르자크의 유럽 무대 진출을 후원한 브람스의 향기도 물씬 풍겼다. 3악장에서는 독특한 리듬감을 전면에 내세우며 현악의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주었으며, 팀파니가 분위기 메이킹을 선도하여 활력이 넘치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마지막 4악장은 모든 악기의 화학적 융합을 보여주었다. 후반부에서 밸런스가 흐트러지기도 했지만, 슬라브의 열정이 가득 담긴 사운드로 마무리했다.
앙코르는 펜데레츠키의 현을 위한 신포니에타(1991) 중 2악장이었다. 기계적이고 반음계적이며 추격전을 벌이는 듯한 김장감이 가득한 곡으로, 연주자들의 눈매가 사뭇 달라 보였다. 여러 음반으로 접해본 연주와는 달리 강렬한 표현을 다소 자제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펜데레츠키는 이 곡의 야수와 같은 이미지를 탈피하여 곡에 내제된 감성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사진 오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