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4·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소리와 음향의 약속을 지킨 그대들!
해외 교향악단이 친숙해지는 데에는 몇 가지 패턴이 있다. 내한 시 이벤트를 선보이거나, 내한 횟수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 한국인 음악가가 입단하여 중요 직책을 맡는 것 등이다. R. 슈트라우스 탄생 150주년이었던 2014년에 마르쿠스 슈텐츠/쾰른 필이 ‘알프스’를 산행하고도 앙코르로 바그너의 두 곡을 선보였던 추억이 슈텐츠를 서울시향 수석객원지휘자로 영입하는 데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던 것이 이에 속할 것이다.
2014년에 이어 올해도 내한한 얀손스/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교향곡만을 선보였던 예전의 내한과 달리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과 함께 했으며, 18세기 하이든부터 베토벤, R. 슈트라우스, 그리고 20세기 스트라빈스키까지 레퍼토리의 폭을 넓혔다.
4일 공연,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대단원의 막을 열었다. 단원들이 입장했을 때 눈에 띈 것은 호른의 위치였다. 객석에서 볼 때 뒷줄 왼편에 있어야 할 호른 파트를 오보에의 오른편, 즉 악단의 가장 오른쪽 위치에 놓은 것이다. 원래의 위치대로라면 벨에서 나온 울림이 악단의 바깥을 맴돌지만, 위와 같은 경우엔 소리가 악단 내부를 향해 스며들며 중저음을 보강한다. 이처럼 중저음의 죔쇠를 단단히 조인 얀손스는 길 샤함의 예민한 템포감각과 여성스러운 사운드를 포근히 끌어안았다. 특히 그 포용의 사운드는 부드러운 2악장을 지나 한껏 고조되는 분위기의 3악장에서 독주와 관현악이 지켜야 할 평정심의 미학을 보여주었다.
2부는 스트라빈스키의 ‘불새’(1945년 판본)였다. 얀손스는 이틀의 공연 동안 보면대를 가슴까지 끌어올려 스코어에 집중하는 듯했지만, ‘불새’에선 미하일 포킨이 안무한 춤의 향연을 눈앞에서 보며 지휘하는 듯할 정도로 영상의 흐름을 중요하게 가져갔다. 클라리넷·오보에·플루트·피콜로의 스타카토와 프레이즈가 무용수의 스텝과 드라마틱한 연기를 연상케 했다. 피아니시시모부터 포르테시시모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극적 긴장감을 연출하는 지휘와 그 약속을 지켜내는 단원들의 원칙주의가 빛을 발한 연주였다. 5일 공연의 R.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에서도 이 원칙주의는 여전히 빛났다.
‘불새’처럼 휴지부 없이 약 50분 동안 진행되는 ‘알프스 교향곡’은 중허리를 지나면, 조명에 의해 달궈진 관악기의 음정은 높아지고 현의 조율은 느슨해진다. 그것을 따로 조율할 최소한의 시간도 없다. 그래서 지휘자와 단원들이 정확한 음과 합(合)의 청사진을 본능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정상에 오르지도, 안전하게 하산하지도 못한다. 지휘자가 이끌어내는 드라마틱함과 영상미도 이러한 정교함에서 나오는 보너스다. 이날의 연주는 한마디로 이들의 준비된 자세와 몸에 익은 무대 경험으로 그려낸 깔끔한 산수화였다. 눈에 ‘아른’거리는 산경의 드라마를 선보인 바이‘아른’표 방송교향악단의 산수화라고 할까.
이들은 ‘친한파’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2018년 내한을 예정하고 있으며, 5일 공연의 하이든 교향곡 ‘군대’ 4악장에선 ‘We♡KOREA’라고 적힌 큰북을 연주하는 타악주자가 깜작 등장하는 이벤트로 호감을 사기도 했다. 2015년에 입단한 제2바이올린 수석 이지혜의 자신감 서린 얼굴도 얀손스의 움직임 사이로 보였다. 무엇보다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소리와 음향의 약속’을 지킨 그들. 한마디로 그들이 지닌 현악의 섬세함, 관악의 독주력, 타악의 순발력을 얀손스를 통해 두루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진 빈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