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 ‘라 바야데르’ & 마린스키 발레 ‘돈키호테’

세계 정상의 자리에 선 두 발레 스타의 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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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2월 3일 9:00 오전

REVIEW 글 장인주(무용평론가)  사진 유니버설발레단·서울콘서트매니지먼트

©Universal Ballet/Photo by Kyoungjin Kim

한동안 뜸했던 해외 유명 발레단들이 올해는 줄지어 내한했다. 스코틀랜드 발레가 26년 만에, 볼쇼이 발레가 13년 만에 연이어 내한했고(볼쇼이 오케스트라와 합동 내한은 23년만), 현대발레의 최선봉에 서 있는 NDT1이 16년 만에 방문해 반가웠다.
올 한해, 갈수록 예술계 불황이 심각하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지만, 문전성시를 이루는 발레공연만큼은 예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공연계에서 블루오션은 말일 뿐,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순수예술 중 발레는 대중의 사랑을 한껏 받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특히 11월에는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이 야심작을 내놓았고, 이어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까지 내한하면서 발레축제가 열린 듯했다.

©Universal Ballet/Photo by Kyoungjin Kim

국립발레단이 발표한 신작 ‘마타하리’(10월 31일~11월 4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는 이탈리아 태생의 레나토 자넬라를 초대해 안무를 맡겼다. 그는 슈투트가르트 발레 상임안무가를 거쳐 빈 국립오페라 발레 예술감독을 지낸 바 있다.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마타하리의 생을 내레이션하는데 그친 밋밋한 시놉시스로 인해 극의 절정을 이끌어내지 못하면서,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도 이탈리아에서 제작해 공수한 화려한 의상과 무대·영상 디자인의 세련미가 드라마발레의 뼈대가 되어주었고, 관객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유니버설발레단은 ‘라 바야데르’(11월 1~4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를 공연했다. 1999년 처음 무대에 올린 이후 꾸준하게 다듬고 있어, 작품 선정만으로는 야심작이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는데, 러시아 스타 발레리나인 스베틀라나 자하로바를 주인공으로 초청하면서 올해 발레계 최고의 이슈가 되었다.
지난해 블라디보스토크 지역극장 마린스키 프리모스키 스테이지 발레와 함께 내한했던 김기민이 올해는 오케스트라까지 대동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발레 본진과 함께 금의환향했다. 2011년 마린스키 발레에 입단해 4년 만에 수석무용수 자리까지 단숨에 올라간 김기민은 ‘돈키호테’(11월 15~1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익살꾼 바질 역으로 실력을 입증했다.
올해가 고전발레의 아버지 마리우스 프티파의 탄생 200주년이기도 하지만 유독 발레에 대한 환호성이 넘쳐났다. 그 중심에 있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와 김기민.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둘의 비결은 무엇인지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자하로바의 근육은 고무줄인가 

©State Academic Mariinsky Theatre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를 부르는 ‘프리마 발레리나 압솔루타’라는 호칭 그대로였다. 스베틀라나 자하로바는 불혹의 나이를 맞은 지금이 오히려 전성기인 듯했다. 그녀보다 선배격인 프랑스 출신 에투왈 실비 길렘 이후에 이처럼 유연하면서 강인한 발레리나의 ‘몸’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정작 13년 전에도 그녀를 보면서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 풍부한 감정몰입까지 가세하면서 남들 은퇴할 나이에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고 있으니 ‘완벽’을 뛰어넘는 그 이상을 꿈꾸는 듯했다. 러시아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과의 결혼과 딸 출산이 많은 것을 바꿔놓았을까. 스스로도 인생 경험이 더 큰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고 고백하듯이 니키아를 춘 자하로바는 세계 최고의 정점에 도달해있었다.
‘라 바야데르’ 2막 감자티와 솔로르의 결혼식이 한창인 라자왕 중정의 정원에 니키아가 등장했다. 길게 꼬인 팔과 다리를 타고 눈물이 흐르는 듯하고, 한껏 뒤로 젖혀진 허리의 곡선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애절함이 고여 있었다. 양다리를 옆으로 벌려 ‘그랑 주테 아 라 스공(양다리 옆으로 벌려 높이 뛰는 동작)’을 뛸 때는 두 다리가 180도를 넘어 어깨에 닿을 듯했다. 마치 자하로바에게 있어 유연함의 한계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음악의 여운만큼 최대한 길게 뻗어 나갔다. 더할 나위 없이 길고 가는 8등신 미녀에 톡 튀어나온 발목 아치까지 최상의 신체조건에 안주하지 않고 지금도 진행 중인 세계 최고 발레리나의 치열한 노력은 나이 들어 뻣뻣해지는 근육까지 녹여내었던가. 아니면 우리는 그녀의 원숙한 감정이 심장을 지나 다리를 타고 발끝까지 뻗쳐오르는 걸 목격한 것일까.

 

점프하는 김기민은 깃털 같았다 

©State Academic Mariinsky Theatre

러시아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마린스키 발레에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입단한 김기민. 그에게 행운이라는 단어가 쫓아다닌 것은 신인 시절 뿐이었다. 김기민이 점프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그것은 운이 아니라 실력이라는데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돈키호테’ 3막, 키트리와 바질의 결혼식 장면에서 김기민은 마치 깃털만큼 가벼웠고, 팽이처럼 빨리 돌았다. ‘투르 앙 레르(공중으로 뛰면서 도는 동작)’ 순간에는 보는 이의 숨까지 빼앗아갈 정도로 마냥 높이 날아올랐고, 공중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착지 순간엔 조그만 소음조차 없으니 ‘무용의 신’이라 불리는 바츨라프 니진스키도 그만큼 뛰었을까 하는 의문마저 잠시 가져보았다.
세계적인 명품 점프의 비결을 묻는 어느 질문에 그는 무대 위에서 기술을 다 보여주지 않고 대신 춤에 몰입한다고 대답했다. 서양인에 견주어 전혀 단점을 찾을 수 없는 신체적 조건의 소유자 김기민이지만, 러시아는 물론 세계무대의 정상을 차지하기까지 피눈물 나는 점프를 얼마나 많이 뛰었겠는가. 몇 년 전 수술까지 감행했던 발목 부상을 극복하고 더 높이 날아오른 김기민을 지켜보느라 키트리 역을 맡은 베테랑 발레리나 빅토리아 테레시키나의 춤을 여러 차례 시야에서 놓치곤 했다.
왕정 시대의 권력 밑에서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탄생한 발레 예술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 ‘화려함’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그 화려함을 확보하기 위해 무대와 의상에 적잖은 투자를 하기도 하고 또는 한 명의 스타에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작품 전체를 화려하게 밝히기도 한다. 그 어떤 화려함이 되었든 우리는 잠시나마 극장에 모여 그 화려한 무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소확행’이라고 설명하기엔 부담되는, 거액의 티켓 값과 시간을 투자했지만, 관객들은 전혀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탁월한 신체조건이나 최정상이라는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발레무용수를 지켜보면서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고 평생 기억할 추억을 만들었다. 이것이 곧 극장예술의 역사이자 발레의 존재 이유가 아니던가. 더없이 화려했던 발레공연 덕분에 2018년도 화려했다고 뒤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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