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공연수첩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3월 11일 8:00 오전

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Editor’s Note

 

 

반복된 위선 속, 사랑은 과연 아름다운가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1.24~3.24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빅토르 위고(원작)/퀵 플라몽동(각본·가사)/리카르도 코치안테(음악)/마르티노 뮐러(안무)/질 마으(연출)/박창학(한국어가사)/ 정성화·양준모·윤형렬(콰지모도), 유리아·정유지·솔라(에스메랄다), 마이클 리·이지훈·노윤(그랭구와르) 외

전쟁과 전염병으로, 사람들의 삶과 사상은 한층 흉흉해졌다. 오해하지 말자. 2024년이 아닌, 15세기의 프랑스 이야기다. 노트르담의 대성당 앞에는 그들의 위선을 고발하듯 이방인 집시가 노래하고 춤춘다. 성당으로부터 끊임없이 내쫓기는 집시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종교의 모순을 드러낸다. ‘대성당의 시대’가 시작된다며 문을 열었던 뮤지컬은 결국 “새로운 사상들, 모든 걸 바꿔 놓을/언제나 작은 것이 큰 것을 허물고/학교의 책들이 성당을 허물고/성경은 교회를, 인간들은 신을 무너뜨리리라”는 2막 오프닝넘버처럼 자멸하고 만다. 그러나 자멸은 욕망 혹은 사랑을 품었던 개인의 죽음으로 대신 된다. 뮤지컬의 배경인 15세기 이후로도, 이러한 위선과 자멸은 얼마나 수없이 반복되었던가.

이처럼 ‘노트르담 드 파리’는 마치 오페라처럼, 반복되는 인류 역사의 실수를 반추하게 하는 고전의 맛을 지녔다. ‘대성당들의 시대’ ‘아름답다’ ‘피렌체’ ‘춤춰요 에스메랄다’와 같이 한 번만 들어도 끊임없이 귀에 맴도는 불멸의 넘버들도 힘을 싣는다. 연극처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일반적 뮤지컬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마치 오라토리오를 부르는 듯 정면을 응시한 채 노래를 이어가는 배우들의 모습이 낯설 수도 있다. 그러나 배우들 뒤로 아크로바틱과 발레·현대무용을 소화하는 무용수들의 동선이 무대를 가득 채우면 어느새 이 ‘프렌치 뮤지컬’의 멋에 빠져들게 된다.

노래로 승부를 보는 뮤지컬인 만큼, 실력파 배우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기자가 관람한 공연(2.7)에서는 아름다운 집시 여인인 에스메랄다 역의 유리아가 뛰어난 실력을 뽐냈다. 콰지모도 역을 맡은 양준모의 존재감은 기대한 대로 극을 압도했다. 그러나 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1998년에 만들어진 ‘추한 콰지모도’의 분장 방식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콰지모도의 순수한 사랑은, 그가 어깨가 튀어나온 꼽추이며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졌어야만 애절해질 수 있는 것일까. ‘추함’에 대한 너무 쉽고 간편한 표현 방식은, 애절한 ‘춤춰요 에스메랄다’를 들으며 눈물짓는 관객의 행위를 위선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지. 무대 위 콰지모도는 잊을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새로운 사상들, 모든 걸 바꿔놓을/언제나 작은 것이 큰 것을 허문다”던 뮤지컬의 교훈은 변해가는 시대 감수성도 동시에 비춰낸다.

‘노트르담 드 파리’가 한국어 라이선스 공연을 선보인 것은 2007년부터다. 이제는 한국어 가사의 넘버가 대중에게 익숙할 정도다. 그러나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야 할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정형화되고, 익숙한 캐스팅의 배우로 인해 노래가 빛나지 못한다면 고전의 ‘멋’ 또한 그 아름다움이 바래질지 모른다.

허서현 기자 사진 마스트인터내셔널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폴 루이스 피아노 독주회

2월 1일 금호아트홀 연세

 

 

아직은 겨울의 찬 기운이 감도는 계절의 끝자락, 슈베르트의 후기 소나타 선율에 이끌려 공연장을 찾았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의 시선은 무대 위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1972~)에게 향했다. 2022년부터 이어온 그의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시리즈 마지막 무대인 만큼 그 기대를 더했다.

전날(1.31)의 피아노 소나타 4·9·18번에 이어, 19·20·21번을 예고한 이날의 프로그램은 대장정과 피날레의 시간이었다. 그는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단호한 터치로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곧, 단단하고 명징한 선율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음반에 대한 기대를 안고 공연장을 찾는 경우, 연주자의 컨디션 혹은 리코딩의 음향적 차이에 의한 연주의 간극에 실망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하지만, 이날 무대 위의 폴 루이스는 그 반대였다.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이어지는 풍성한 음색, 피아노와 포르테의 섬세한 강약 대비에서 비롯된 양손의 밸런스는 ‘슈베르트 스페셜리스트’라는 그의 수식어를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따스한 음색으로 이어지던 소나타 20번 4악장이 끝나고, 객석엔 진한 여운이 스쳤다. 각 40분 이상 소요되는 긴 작품을 연달아 완벽하게 선보이는 그의 연주에서 슈베르트를 향한 열정과 작품에 대한 깊은 연구의 흔적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2부는 소나타 21번으로 시작했다. 차분하게 시작한 1악장부터, 3악장의 스케르초를 지나 피날레를 향해 달려가는 4악장의 연주는 객석의 공기를 뭉근하게 달궜다. 긴 여정의 끝, 피아니스트의 손끝에 시선을 맞추고, 숨죽이며 연주에 몰입하는 객석의 분위기 속에서 오랜만에 연주자와 관객이 호흡하는 공명의 순간을 마주했다.

폴 루이스의 손가락이 피아노의 마지막 건반을 떠나고, 길었던 대장정이 끝을 맺었다. 입춘을 앞둔 2월의 첫날. 길었던 겨울을 마무리하고 새봄을 맞이하듯, 따스하게 피어난 그의 슈베르트 연주는 벌써부터 그의 다음 내한 소식을 기대하게 했다.

홍예원 기자 사진 금호문화재단

 

 

바로크 시대로 다녀온 여행

미하엘 폼·전현호·조현근 리사이틀

2월 5일 반포심산아트홀

 

 

시대악기의 예스러우면서도 따뜻한 음색이 울려 퍼졌다. 미하엘 폼·전현호(리코더)와 조현근(바로크 첼로), 특별 손님으로 함께한 이은지(하프시코드), 최현정·알란 추(바로크 바이올린)가 만들어 낸 소리였다. 이번 리사이틀은 독일 바로크 시대를 중심으로 꾸며져, 바흐처럼 익숙한 작곡가부터 페푸시(1667~1752) 같은 낯선 작곡가의 작품까지 모두 만날 수 있었다. 프로그램의 편성 또한 첼로 소나타·플루트와 베이스를 위한 솔로·트리오 소나타 등으로 다채로웠다. 각 작곡가의 분위기는 물론 악기별 음색까지 비교할 수 있어, 바로크 시대를 잠시 여행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독일풍 바로크’라는 부제가 공연과 무척 잘 어울렸다.

첫 곡은 텔레만의 소나타 TWV42:C1으로, ‘3중(트리오)’ 소나타지만 여섯 명의 연주자가 모두 무대에 올랐다. 높은 음역의 두 성부와 이를 받쳐주는 낮은 성부, 그리고 화음을 담당하는 하프시코드까지 총동원되니, 꽉 찬 울림이 홀을 가득 채웠다. 연주자들이 춤을 추듯 온몸으로 연주하고, 화합하는 듯한 선율에서는 마주 보며 웃고, 경쟁하는 듯한 선율에서는 자연스레 외면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 몸짓이 의도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는 점에서, 이들이 연주에 한껏 몰입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편성의 작품 세 곡이 이어지고, 2부의 첫 번째 곡 페푸시의 협주곡 6번에서 모든 연주자가 다시 한번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1부와 비교해 연주자들의 위치가 달라졌다는 점에서 특별함을 더했다. 텔레만 작품의 경우 하프시코드 앞에 앉은 첼리스트를 중심으로 각 악기가 대칭을 이루었다면(왼쪽부터 리코더·바이올린·첼로·바이올린·리코더 순), 페푸시 작품에선 리코더와 바이올린이 두 대씩 짝을 이뤄 서로 마주보았다(왼쪽부터 리코더·리코더·첼로·바이올린·바이올린 순). 사소한 변화지만 객석에서 느껴지는 음향엔 큰 차이가 있었다. 여러 악기의 소리가 부드럽게 섞였던 이전 무대와 비교해, 이번엔 각 악기의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마주보고 선 리코더와 바이올린이 선율을 주고받을 때면 마치 두 악기가 대화를 주고받는 듯했다.

마지막 곡이었던 라인하르트의 리코더 두 대와 바이올린 두 대를 위한 협주곡을 연주하기 전, 미하엘 폼이 마이크를 잡았다. 연주할 작품에 대한 소개하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이 작곡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할 것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한 그는 “괜찮아요. 우리도 이 음악을 발견하기 전까진 잘 몰랐어요!”라며 찡긋 웃었다. “어떤 부분은 바흐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비발디가 같기도 해요. 그리고 그게 전부예요”라는 재치 있는 설명이 끝나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어지는 연주에 사람들은 모두 집중했다. 마치, 이미 친숙하게 알고 있던 음악을 감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만큼 미하엘 폼의 설명과 이들의 연주엔 단숨에 청중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그것이 비록 낯선 작품일지라도 말이다.

김강민 기자 사진 박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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