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리스트 박규희, 포착한 만큼 보이는 것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6월 21일 9:00 오전

“ARTIST’S ESSAY
포착한 만큼 보이는 것들”

 

포착한 만큼 보이는 것들

기타리스트 박규희

©임주희


처음 카메라를 산 건 2008년 10월이었다. 빈 유학 시절, 유럽의 크고 작은 콩쿠르에 도전하던 시기였고, 콩쿠르 우승 상금을 유학 생활비에 보태 알뜰하게 살았다. 하루는, 상금이 마치 ‘솜사탕이 물에 녹아버리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에 괜히 신경질이 났다. 없어져 버리면 그만인 상금을 대신해 ‘내가 이만큼 해냈어!’라는 증표 하나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증표가 된 것이 카메라였다.

비장한 다짐과 달리 유학생에게 비싼 최신형 카메라는 사치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한 철 하고도 한참이 지난 입문용 DSLR 카메라를 샀던 것이 나의 첫 카메라가 됐다. 나는 그 카메라로 풍경과 사물을 하나씩 담았다. 조리개, 셔터 스피드 등 전문 용어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터라, 빈의 학생 사진 동호회에 기웃거리며 어깨너머로 사진 찍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하나씩 얻은 작은 지식을 모아 산책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연신 셔터를 누르며 실전에 옮겼다.

 

필름과 맞닿은 음악의 결

직접 사진을 찍으며 알게 된 건 카메라도 ‘표현의 도구’라는 것이다. 마치 연주자에게 악기가 ‘표현의 도구’인 것처럼 말이다. 이전에는 ‘사진’ 하면 ‘추억’만이 떠올랐다면 그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됐다. 카메라는 추억을 담아내기도 하지만 결과물인 사진에는 찍는 사람의 의도와 섬세한 시선이 반영된다. 이곳저곳 자르고 다듬어 나만의 구도를 잡고, 일상의 사소한 시선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매력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박규희

롤라이플렉스를 든 마이어

스페인 알리칸테 유학시절 기숙사 문앞에서 만난 아이들(박규희 촬영)

 

 

 

 

 

 

 

 

 

 

그렇게 새로운 취미생활을 만끽하기를 몇 년, 지인의 추천으로 필름 카메라, 롤라이플렉스(Rolleiflex)를 만났다. 디지털카메라와 달리, 필름 카메라로 사진 한 장을 찍어내는 과정은 절대 쉽지만은 않다. 먼저 조리개와 셔터 스피드, 카메라의 초점을 일일이 조절하고 마음에 드는 구도를 잡는다. 그다음 카메라가 흔들리지 않도록 숨을 꾹 참은 채 셔터 버튼을 누른다. 조금이라도 계산이 잘못되면 필름이 백지로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 그뿐인가. 맨눈으로 보는 피사체와 렌즈 안의 좌우가 달라서 어지럽기까지 하다.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한 곡을 완성하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주의를 기울이고 면밀히 음악과 나를 다듬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수하지 않는 것이다. 실수 없는 연주로 관객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연주자의 책임감을 생각한다. 사진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다. 무시무시한 필름 값 때문에 셔터를 누르는 순간까지도 사진 한 장의 무게를 생각하게 된다.

 

시선이 머무는 곳

필름 카메라를 처음 잡아 들고 사진을 공부할 때, 롤라이플렉스 카메라의 대명사인 비비안 마이어(1926~2009)의 사진집을 구매해 보고 또 봤다. 그녀가 찍은 사진을 저장해놓고 반복해서 그의 구도를 따라 찍었다. 거울만 보이면 그녀의 시그니처 사진처럼 거울에 담긴 ‘카메라와 나’의 모습을 찍었고, 바쁜 발걸음이 오가는 도시의 횡단보도를 흑백사진으로 담아내기도 했다. 마이어의 작품을 모방하며 카메라를 공부하고 있자니, 기타를 막 시작하던 10대 때가 떠올랐다. 기타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대가들의 연주를 따라 연주하곤 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음악을 찾아갔었다.

내게 사진 찍기와 음악 만들기의 공통점은 또 하나 있다. 어쩌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함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길가에 세워둔 자전거와 그 옆에 핀 꽃을 찍을 때 고작 2~3cm 틀어진 자물쇠의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살짝 위치를 바꿔 찍곤 한다. 그 사소한 습관이 어느 순간 내 연주에도 깃들었다. 기타를 칠 땐 배음을 소음시키는 0.1초, 그 찰나의 순간을 매번 미묘하게 달리한다. 아무도 몰라주더라도, 내가 포착해낸 ‘사소함의 예술’에 나는 만족한다.

모든 예술은 서로 다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사진 속에서 음악의 결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사소한 연결고리가 나를 더 넓은 음악의 세계로 초대한다. 나는 오늘도 사소한 것에서 음악을 배운다.

 

‘더 포스터 북 by 비비안 마이어’
저자 비비안 마이어 | 아르테(arte)
미국의 사진작가 비비안 마이어는 보모와 가정부, 간병인 등으로 일했다. 그는 평생 가정부와 보모로 일하며 가장 낮은 삶의 현장부터 부유한 삶의 모습까지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그가 사용한 카메라는 롤라이플렉스 카메라(6X6cm 정사각형 사진)로 박규희가 사용한 카메라와 같다. ‘더 포스터 북 by 비비안 마이어’는 그가 바라본 인간사의 다양한 면모를 담은 사진을 한 데 모은 책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감독 존 말루트·찰리 시스켈
그녀는 평생을 사진작가로 살았지만 생전 한 번도 그의 작품이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무명으로 시작해 무명으로 삶을 마감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연출을 맡은 말루프가 우연히 그의 필름을 벼룩시장에서 발견하면서 비비안 마이어를 찾는 여정을 그렸다.

 

 

 

 

 

 

 

 

 

 

 

 

 

 

 

 

 

 

 

 

 

박규희 기타리스트 박규희(1985~)는 예원학교, 일본 도쿄 음대를 거쳐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알바로 피에리를 사사했다. 스페인 알리칸테 음악원의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2007년 하인스베르크 기타 콩쿠르 1위를 시작으로 2008년 벨기에 프렝탕 기타 콩쿠르 1위에 아시아인 최초로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일러스트 임주희 피아니스트 임주희(2000~)는 장형준·신수정·강충모를 사사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취미로 그리는 그림을 SNS에 올리는 등 대중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인 젊은 연주자다


박규희·박주원 듀오 리사이틀

6월 23일 오후 7시 30분 LG아트센터 마누엘 데 파야 ‘짧은 인생’, 박주원 ‘겨울날의 회상’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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