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서선영

꿈들은, 매 순간마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1월 17일 9:00 오전

COVER STORY

소프라노 서선영

꿈들은, 매 순간마다

 

 

그는 숨을 머금고 카메라 앞에 섰다. 치켜든 고개는 기품이 있었으며, 정면을 응시하는 두 눈은 도도했고, 살며시 지은 미소는 평화로웠다. 저것은 열정적인 데스데모나일까, 새침한 미미일까, 순수한 초초상일까. 오페라 속 여인들이 떠오르는,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촘촘하게 렌즈에 담았다. 1월은 분주하다. 새로운 시작을 맞아 구태여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런 이에게 “매일 하고 싶은 것에 최선을 다해서 몰두했다”는, “다르게 해볼 걸 후회하는 때가 한 번도 없다”는 서선영의 전기(傳記)를 소개한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박진호(studio BoB)

의상 협찬 송파 한복 갤러리

 

 

Step 0 프롤로그


이른 아침, 서선영에게 전화가 왔다. 1월호 표지 인물로 확정됐다는 연락을 주고받은 지 이틀 후였다. 출근을 준비하던 중 갑작스레 받은 전화. 다짜고짜 그는 이번 커버 촬영 때 한복을 입고 싶다고 했다. 신년호이긴 하지만 소프라노에게 한복은 좀 어색한 것 같아 이유를 물었다. 그동안 유럽에서 한국의 음악가로 활동하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고. 2015년까지 바젤 극장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하다가 고국에 돌아온 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한복을 입고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묵직했다. 성장과 성숙을 넘어 이제는 원숙기에 들어선 그에게는 고요한 울림이 있다.

며칠 후 촬영 현장에서 서선영을 만났다. 그는 한복과 드레스, 정장이 담긴 커다란 짐 가방을 들고 촬영 장소에 들어왔다. 숨을 머금고 카메라 앞에 섰다. 치켜든 고개는 기품이 있었으며, 정면을 응시하는 두 눈은 도도했고, 살며시 지은 미소는 평화로웠다. 저것은 열정적인 데스데모나일까, 새침한 미미일까, 순수한 초초상일까. 오페라 속 여인들이 떠오르는,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촘촘하게 렌즈에 담았다. 1월은 분주하다. 새로운 시작을 맞아 구태여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런 이에게 “매일 하고 싶은 것에 최선을 다해서 몰두했다”는, “다르게 해볼 걸 후회하는 때가 한 번도 없다”는 서선영의 전기(傳記)를 소개한다.

진정으로 고뇌하는 자는 침묵의 어둠 속에 쌓인다.

– 바그너 ‘베젠동크 시에 의한 5개의 가곡’ 중

 

 

Step 1 성장


시작은 사랑이었네

“신이든, 사람이든, 자연이든 무언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면 그 마음이 시가 돼요. 그 시에 곡조가 붙어 노래가 되죠. 노래 부르는 마음에 가장 먼저 담겨야 하는 건 애정이에요.”

건축가 가우디는 “어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는 사랑, 두 번째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서선영 역시 “노래하는 것을 사랑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연습하게 된다”고 한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독일에서 유학하고, 스위스 바젤 극장에서 활약했지만, 시작은 경남이었다. 서선영은 초등학교 2학년, 고향 창원에서 교회 성가대원으로 노래하던 때를 선명히 기억한다. 친구들과 화음을 맞춰서 노래하는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일주일 내내 교회에 가는 일요일만 기다렸다.

“어린 시절에 저를 본 사람들은 아주 독하게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기억하던데, 돌이켜봤을 때 단 한 번도 억지로 공부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가곡을 공부할 때는 시인이 이렇게 쓸 수밖에 없던 상황을 내 이야기로 풀어 해석했죠. 오페라 대본을 분석하며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너무 재밌었고요. 음악뿐 아니라 무엇을 하더라도 그 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해 있을 겁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언젠가 베이스 연광철(1965~)이 한 마스터클래스에서 언급한 말이 떠오른다. 그는 “우리나라는 이것도 저것도 잘하는 게 없는 와중에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 잘한다고 하니 음대에 가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고는 이걸로 살아가려니 힘든 것”이라고 진솔한 마음을 밝혔다.

“일곱 살 때였죠.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라는 곡을 듣고 많이 울었습니다. 사춘기 훨씬 이전부터 눈물이 많았어요. 그땐 우는 것이 창피해 눈물이 날 것 같으면 화장실로 뛰어가곤 했죠. 성악은 결국 느끼는 감정을 자기만의 해석으로 소화해 다시 표현해 내는 것이에요. 처음부터 별 감흥이 없으면 다시 재창조할 재료가 부족하겠죠?” 성악은 여러 음악 장르 중 유독 가지고 태어난 재능의 영향이 지대하다. 서선영 역시 남다른 재능을 어린 날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찌할 수 없었던 감수성. 그는 궁극적으로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감성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한참 EQ 개발에 열을 올리던 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음악에서뿐만 아니라 갈수록 기계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감성은 더욱 중요한 덕목이 될 거예요.”

어쩌면 진부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단순히 대학 진학을 넘어 전문 성악가가 되려면 자신이 노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살펴보길. 진부한 고전은, 역사의 변하지 않는 핵심이니 말이다.

 

좋은 스승을 찾으세요

중학교 2학년, 음악 교사의 권유로 경상남도 교육청에서 열리는 음악 콩쿠르 성악 부문에서 우승했다. 원어 가사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 발음을 한글로 적어 달달 외우고 섰던 무대. 이후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매년 도 대회에 참가했고 5년 내내 1위에 올랐다. 부모님의 반대로 예고 진학은 좌절됐지만, 스승 조명희(소프라노)를 만나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조명희 선생님을 온전히 신뢰했어요. 선생님과의 레슨 시간이 아니면 소리를 풀(full)로 내지 않았죠. 혼자 내는 소리가 맞는지 틀린지 분별을 못해서 혹시라도 목이 상할까 봐요…. 선생님께서 지적한 사항들은 옥타브를 낮춰서 노래하는 연습을 했고, 레슨을 녹음하여 반복해 들었습니다.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는데 가끔 테이프가 늘어져 냉동실에 넣었다 다시 듣곤 했어요. 지금까지도 제가 공부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잠깐, 서선영의 연습 루틴을 살펴보자. 지금도 근육 단련을 위한 호흡과 발성 연습을 매일 한다. 발음과 음정 공부를 마친 후, 한 옥타브 낮게 여러 번 불러본다. 공부가 마무리가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소리로 불러본 뒤, 안 되는 부분만 따로 반복 연습하는 식이다.

“성악가는 성대를 통해 매일 몇 시간씩 소리를 내면 무리가 오죠. 자신의 몸 상태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입시 준비 당시, 서울로 레슨을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다. 자신도 그래야 하나 불안할 법도 한데, 초조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스승 조명희와 같은 아파트에 살아서 시간적·체력적으로 큰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입시를 앞두고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린 숙명여자대학교 콩쿠르에 도전했다. 본선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지만, 한 달 뒤 경희대학교 콩쿠르에서 1위, 2002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기에 이른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만난 스승 최현수(바리톤)는 서선영의 두 번째 길잡이다.

“최현수 선생님은 1990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셨어요. 한국 성악 역사가 길지 않은 가운데, 첫 세대로서 모든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간 분이죠. 우리 세대는 그분들이 닦아 놓은 자리를 출발점으로 삼아 더 수월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어요. 다음 세대는 콩쿠르 우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극장 활동부터가 출발점이 되겠죠?”

서선영이 1위를 차지한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스승과 제자의 대를 이은 우승으로 화제를 모았다. 성악 부문 1위에 오른 서선영·박종민은 1990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최현수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최현수는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개교 이후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한 서선영은 최현수에게 배우기 위해 3년 동안 레슨을 참관만 했다고.

“성장을 원한다면 좋은 스승을 찾으세요. 만남이란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연을 만나도록 늘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었지만, 매일 느끼고 있는 사람도 있다. 바로, 마리아 칼라스(1923~1977)다. 서선영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칼라스의 삶은 한 편의 오페라처럼 극적이었다. 어떤 역도 제 옷을 입은 양 완벽하게 소화하는 문학적 깊이와 음악적 기교, 예술가가 지녀야 하는 모든 조건에 넘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마리아 칼라스는 높고 가벼운 콜로라투라부터 드라마틱의 영역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넓은 스펙트럼을 가졌는데요. 노래가 잘되지 않을 때면 칼라스의 음반을 들어요. 그러면 늘 한결같은 깨달음을 얻죠. 소리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드라마에 더욱 집중하라는….”

 

Step 2 성숙


뒤셀도르프, 풍족했던 광야에서

성악 전공생이라면 늘 고민하는 부분. 어디가 유학지로 적절할까. 각 국가마다 특혜가 다른 만큼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할 테다. 벨칸토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는 좋은 발성, 무엇보다 이탈리아어를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독일·오스트리아의 경우에는 안정적인 극장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에 졸업 후 커리어를 이어가기에 수월하다. 영국과 미국은 영어를 쓴다는 강력한 장점이 있지만, 학비가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 일례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주역 가수로 활약 중인 테너 이용훈(1973~)은 “미국 유학 시절, 살인적인 물가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려 페트병 물로 끼니를 채우기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서선영은 독일학술교류처(DAAD/Deutsche Akademische Austauschdienst)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보다 여유로운 유학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DAAD는 복권 당첨과 같아요! 독일로 유학 가고 싶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시스템인데요. 한국에서는 1년마다 각 학술 부분(인문·자연·예술·체육계열)에서 파트별 1인을 선정해 학비·생활비·의료보험 등을 지원해 줍니다. 최대 2년까지 연장 가능하고요. 지인의 추천으로 이 장학금을 알게 됐습니다. 급하게 신청해 작성 항목 중 많은 부분을 빈칸으로 냈는데도, 제출한 무대 영상이 큰 작용을 했는지 뽑혔더라고요!”

서선영은 뒤셀도르프 로베르트 슈만 음대에서 소프라노 미카엘라 크레머 아래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뒤셀도르프는 라인 강변을 따라 예술의 향기가 흐른다. 백남준이 교수로 있었던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는 유럽의 현대예술을 선도하며, 미디어 하버시티는 현대 건축의 진수를 볼 수 있다. 비틀스에 영향을 끼친 최초의 일렉트로니카 밴드 크라프트베르크가 결성된 지역이며, 북쪽 강변에는 콘서트홀인 뒤셀도르프 톤할레가 자리 잡았다. 슈만의 생가가 있어서 국립학교로는 로베르트 슈만 음대, 사립학교로는 그의 부인인 클라라 슈만 음대가 있다.

“독일은 각 지역 출신 유명 음악가의 이름을 대학 명칭에 붙이기도 해요. 아쉽게도 특정 음악가 이름이 들어갔다고 해서 꼭 그 음악가의 곡을 더 연주하고, 더 공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풍족한 유학 생활이었다. DAAD에서 평균적으로 받는 장학금이 월 1,000유로 정도. 월세 450유로를 제외한 금액은 생활비로 사용했다. 남편과 가끔이지만 한인식당에서 외식도 했다. 장을 봐서 식사를 이어가도 부족함 없는 금액이었다.

“오히려 너무 풍족해 유학 간 첫해에 저도 모르는 사이 30kg이나 증량됐어요. 워낙 저혈압인데 독일 겨울 날씨가 저기압이어서 어지럽더라고요. 원래 먹던 것보다 더 먹으니 힘이 좀 나더군요. 그래서 레슨 있는 날은 조금 더 먹고, 연주가 있는 날은 거기에 또 조금 더 먹으며 버텼어요. 그럴 때에 독일 사람들은 조금 더 짜게 먹고, 포도당 사탕을 먹는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그때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요.”

집에서 라인 강변까지 거의 매일 걸었다. 걸으며 생각하고, 생각을 비우기도 했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지만 그래서 당장 눈앞에 있는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광야와 같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지나 서선영은 바젤로 향했다.

 

바젤에서, 비바 코리아!

“바리톤 이응광 씨가 아니었다면 바젤 극장과 연을 맺지 못했을 거예요. 바젤 극장에서 주역으로 활동하던 응광 씨의 추천으로 오펀스튜디오에 지원하게 됐어요. 공교롭게도 오디션 날짜가 학교에서 올리는 푸치니의 ‘수녀 안젤리카’ 2회 공연 중 하루 쉬는 가운데 날이었는데요. 뒤셀도르프에서 바젤까지 고속열차(ICE)로 5시간이 넘게 걸려요. 목요일 저녁에 ‘수녀 안젤리카’ 공연, 금요일 오전에 바젤 오디션, 토요일 오후에 다시 공연인 셈이었죠.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컨디션으로 다 잘 해낼 자신이 없어서 응광 씨에게 극장 오디션을 못 가겠다고 말했더니 ‘꼭 와야 된다, 어렵게 얻은 기회다’라고 강권해 힘을 냈습니다.”

유럽 주요 극장은 ‘오펀스튜디오(Opernstudio)’를 운영한다. 일종의 인턴십 프로그램으로, 극장과 연계해 젊은 성악가를 양성하는 곳이다. 극장에서는 스튜디오 일원을 솔리스트로 채용하기도 한다. 서선영은 다행히 좋은 컨디션으로 오디션을 마쳤다. 극장 관계자 모두가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며 “비바 코리아(Viva Korea)!”를 외쳤다. 잘 끝냈는데도 불구하고 발표가 나기까지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소프라노·메조소프라노·테너·바리톤이나 베이스 이렇게 4명을 뽑는 중에 반드시 1명은 스위스 자국민으로 뽑아야 하는 규정이 있어요. 감사하게도 좋은 결과를 받았죠. 오펀스튜디오 프로젝트 외에도 두 역할을 더 받았는데, ‘루살카’의 루살카 역과 ‘카르멘’의 미카엘라 역이었어요. 극장이 돌아가는 생리를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된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다 싶죠.”

그렇게 스위스 바젤 극장의 솔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바젤이 그에게 남긴 건 무엇일까. 서선영은 ‘사람’이라고 답한다. 여전히 메일로 안부를 주고받는 바젤 극장의 동료들이 가장 큰 자산으로 남은 것. 그 인연이 다른 인연으로 이어지며 유럽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또한 평생에 걸쳐 해야 하는 주요 역할들을 바젤에서 익혔다.

“가수마다 계약 조건이 다르겠지만 일반 독일 극장과 비교하면, 스위스 극장은 일이 절반인데 월급이 거의 두 배였어요. 시즌에 두 작품씩 집중적으로 준비하고 가장 좋은 상태로 무대에 올리는 시스템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즌(1년)마다 최소 두 개 작품은 소화하자!’라고 목표를 정했었죠.”

지난 2018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한 테너 이현재는 유학 경험 없는 순수 국내파로서 바젤 극장 오펀스튜디오에 진출해 화제를 모았다. 이는 그의 부친인 라벨라오페라단의 이강호 단장의 권유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단장은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오면 유럽 현지 가수들보다 4~5년쯤 오페라 데뷔가 늦어진다”고 밝혔다. 이제는 국내 성악도들도 중요한 건 ‘학위’가 아니라 ‘무대’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서선영도 이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국립오페라단과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젊은 성악가에게 무대에 오르는 것만큼 간절한 것은 없죠…. 국내 오펀스튜디오도 부디 좋은 시스템으로 잘 정착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바젤 극장 솔리스트로 활약하면서 독일의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베를린 도이치오퍼, 영국의 노스 오페라, 프랑스의 로렌 오페라에도 데뷔했다. 국가별 오페라 시스템의 차이점을 물으니 “일하는 방식은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가장 직접적으로 다르게 와닿은 부분은 다름 아닌 ‘의상’이었다.

“독일 극장은 인기 있는 작품의 경우, 30년 전 의상을 입은 적도 있어요. 영국은 실용적이고 모던한 느낌을 받았고요. 프랑스가 가장 의상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완벽하게 떨어지는 핏을 중요시했어요. 스위스는 대부분 뉴 프로덕션으로 올라가요. 그래서 연출가의 취향에 따라 캐주얼하기도 하고, 또는 드레시하기도 하죠. 바젤 극장은 특별히 사실주의적인 연출과 연기를 선호합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연출가 요구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연기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그때의 훈련이 지금까지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로렌 오페라 ‘나비부인’의 초초상 역

국립오페라단 ‘루살카’의 루살카 역

 

 

Step 3 원숙


원초적인 연기로, 오페라

물의 정령인 루살카는 서선영에게 유럽과 국내 데뷔 무대를 선사한 주인공이다. 2011/12 시즌 바젤 극장에서 드보르자크의 ‘루살카’에서 타이틀 역으로, 2016년 국립오페라단에서 국내 초연한 ‘루살카’에서 동일한 역으로 데뷔했다. 인어공주를 소재로 하는 루살카는 사람이 아니기에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다. 사람의 모습이 되기 위해 목소리를 잃는데, 이는 가수가 출연하는 오페라에선 파격적인 설정이다. 성악가가, 더군다나 오페라의 여주인공이 노래하지 않고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선영의 연기 스승은 다름 아닌 ‘K-드라마’였다. 무대 위에서 그는 주로 죽임을 당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역을 맡는다. 실제 삶에선 겪기 힘든 경험들이기에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감정을 익히곤 한다.

“삶의 모토가 되는 드라마 한 편이 2006년에 방영된 ‘황진이’인데요. 황진이 역의 하지원 배우가 가진 예술에 대한 가치관, 한 마디 한 마디 다 받아 적고 싶을 정도로 값진 대사들, 예술을 위해 포기한 사랑과 그에 따른 아픔이 잘 표현된 명작입니다. 요즘도 시간 여유가 되거나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면 찾아보곤 해요.”

바젤 극장에서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아멜리아 역, ‘오텔로’ 데스데모나 역,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 알렉트라 역, 야나체크의 ‘카티아 카바노바’ 카티아 역, 파야의 ‘짧은 인생’ 살루드 역, 비제의 ‘카르멘’ 미카엘라 역,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 타티아나 역, 바그너의 ‘로엔그린’의 브라반트 역 등으로 무대에 섰다. 이 중 데스데모나가 그에게 잘 맞는 역할인 동시에 아픈 손가락이다.

“바젤 극장에서의 마지막 역할은 데스데모나였어요. 마지막 무대를 마치고 객석을 향해 인사했는데 그동안 저를 사랑해 준 바젤 시민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당시 바젤에 잔류하는 것과 독일의 다른 극장으로 옮기는 과정 중 예상치 못한 문제로 두 곳 다 길이 막혀버리는 아픔을 겪었어요. 그때를 떠올리니 다시금 마음이 아려옵니다. 감사한 마음, 아쉬운 마음, 아픈 마음을 뒤로하고 온전히 데스데모나로만 노래할 수 있을 때, 다시 한번 데스데모나가 되어 무대에 오르고 싶습니다.”

지난 2019년, 프랑스 로렌 오페라에서 푸치니 ‘나비부인’을 새롭게 제작해 올렸다. 13년 만에 다시 로렌 오페라에 오르는 작품이라 이목이 집중됐다. 프랑스 연출가 에마뉘엘 바스테는 대본에 충실한 해석을 보였고, 초초상 역으로 서선영을 택했다. 초초상으로 분한 서선영의 무대 장악력에 객석에선 박수가 쏟아졌다. 당시 극장에서 날씬한 실루엣을 원해 10kg 정도 살을 빼야만 했다.

“유학 생활을 ‘밥심’으로 버티기는 했습니다만, 주로 맡는 역할이 여주인공이어서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죠. 죽어라 운동했더니 더 건강하게 근육만 붙었고요…. 검진을 가면 많은 수치가 비정상으로 나와서 걱정이 많았는데, ‘나비부인’을 기회로 삼고 감량을 시작했어요. 2019년 4월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관리해 25kg 정도 살을 뺀 상태입니다. 이제는 어떤 무대 의상도 예전보다 더 잘 소화하게 됐고, 연기를 해도 선이 더 곱게 나오니 연출가들이 좋아해 주더라고요. 성악가에게는 건강이 가장 중요해요. 꾸준히 운동하고 관리해 오로지 저만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무대에 당당히 서고 싶습니다.”

유럽에서 한국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스핀토 소프라노로 성과를 높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리릭 소프라노라고 힘주어 말한다. 가끔 텍스트에 따라 드라마틱하고 스핀토 한 색깔이 나오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서정적이고 따뜻한 음색을 지닌 리릭 소프라노.

“국내에서 드라마틱이나 스핀토 소프라노가 드문 이유는 아무래도 체격에서 오는 차이라 생각됩니다. 제가 이제껏 만난 드라마틱, 스핀토 소프라노들은 일단 키가 180cm는 넘었어요. 체격과 골격 자체가 아예 다른 느낌이랄까요? 근육량도 완전히 다른 것 같고요. 신체 차이로 국내에는 무거운 소프라노가 드문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리릭 소프라노의 역할을 맡고 있지만, 앞으로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무거운 역으로 옮겨갈 것으로 예상한다. 사실 노래하는 것은 역도와 같은 이치. 무거운 중량을 드는 선수일수록 역기 무게와 비례하는 근육량이 필요하다. 무거운 드라마, 그리고 두터운 오케스트레이션을 뚫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근육이다.

“얼마만큼 탄력적인 근육으로 호흡을 운용하느냐에 따라 같은 사람이 표현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더 높은 음, 그리고 더 긴 음을 편안하게 소화하려면 호흡의 압력을 버티게 해주는 근육을 단련시키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매일 ‘스타카토-레가토’로 이어지는 발성 연습을 통해 호흡을 담당하는 근육들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꼭 도전해 보고 싶은 오페라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이다. 한 번은 살로메 역을 맡은 소프라노 마리아 유잉(1950~)이 은쟁반 위에 놓인 세례 요한의 목을 들어 귀에 대고 사랑을 속삭이고, 볼에 입을 맞추며 노래하는 연기를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이후 ‘살로메’의 팬이 됐어요. 오로지 원초적인 연기로 무장한 살로메가 되어보는 것이 제 꿈이에요.”

 

 

가사에 마음을 담아, 가곡

독일 유학 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리트&오라토리오’ 전문사 과정을 마쳤다. 오페라는 앞으로 배울 기회가 얼마든지 있을 것 같았지만, 가곡과 오라토리오는 그때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제 생각대로 대학원에서 가곡과 오라토리오를 배우며 젊은 혈기에 내지르기만 하던 발성에서 조금씩 절제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특히 당시 배운 교육 중 러시아 가곡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그때 익혔던 러시아어 딕션이 밑거름이 되어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서선영은 묵직한 진성 사운드 덕분인지 유명 지휘자들과 호흡한 이력이 많다. 세계적인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 크리스티안 틸레만, 악셀 코버, 가브리엘 펠츠, 에릭 닐슨, 토마스 가브리쉬, 안드레아 마르콘 등과 함께한 바 있는데, 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지휘자는 틸레만이다. 2014년, 틸레만/빈 필하모닉과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함께했을 때의 감격이 잊히지 않는다.

“틸레만이 워낙 예민하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던 터라 초긴장한 상태로 연습에 들어갔습니다. 보통 소프라노 솔리스트의 자리는 호른 주자 뒤인 경우가 많아요. 그날도 호른 주자들 뒤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금관악기, 특히 호른 소리가 이제까지 제가 들었던 그 어떤 종류의 소리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감탄을 금치 못했죠.”

국내에서는 주로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를 통해 가곡 무대를 선보였다. 2012년에는 김대진/수원시향과 바그너의 ‘베젠동크 시에 의한 5개의 가곡’을 연주했다. 2021년에도 김대진/창원시향과 모차르트 ‘환호하라 기뻐하라’ K165를 협연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러운 코로나 확진으로 불발됐다. 김대진은 서선영의 음악 인생에 많은 첫 순간을 함께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입시에서 김대진 선생님의 얼굴을 처음 뵀어요. 대학교 3학년 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데뷔도 ‘김대진의 음악교실’을 통해서였죠.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이후 제일 먼저 축하 전화를 해주셨고, 고향 창원에서 정식으로 무대에 서게 된 것도 김대진/창원시향과의 협연이 계기가 됐어요.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로 학생들을 처음 가르칠 때도 김대진 선생님이 원장으로 있었고, 모교 교원의 한 구성원이 된 지금은 총장으로 계시죠.”

특히 2012년 교향악축제에서 선보인 ‘베젠동크 시에 의한 5개의 가곡’은 큰 관심을 받았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직후였기에 다들 그를 궁금해 했다. 그때 서선영은 직접 번역한 가곡의 시를 화면에 띄웠다.

“가곡의 시어는 직접 번역해요. 작품의 배경이나 화자의 심리에 따라 사전의 몇 번째 뜻으로 해석할 것인지, 회화체에서는 어떨 때 쓰이는 단어인지, 그것을 다시 우리말 서술형으로 바꿨을 때 어떻게 해야 더 바른 의미의 전달이 될지 곱씹어서 풀어내는 일을 늘 해왔어요. 독일어뿐 아니라 프랑스어, 러시아어 심지어 체코어까지 다국적 언어에서 얼마나 많은 마음을 담아내느냐가 관건이라 생각해요.”

현재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바리톤 고성현(1962~, 한양대)과 소프라노 홍혜란(1981~, 한국예술종합학교)은 지속적으로 한국가곡에 대한 애정을 보이고 있다. 그는 “홍혜란이 선배이자 동료인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서양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클래식 음악가에게 한국가곡이야말로 민족성과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장르죠. 지금 전 세계가 우리 문화에 열광하고 있는데요. 이때 우리 스스로 먼저 한국가곡을 아끼고 알리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 역시 음반 작업을 하게 된다면 우리말로 된 가곡을 가장 먼저 선보이고 싶어 계획 중에 있어요.”

필립 헤레베헤에게 발탁된 임선혜(1976~)나 르네 야콥스에게 배역을 따낸 서예리(1976~)처럼 시대음악에서 전문성을 키우는 소프라노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도 물었다.

“제 목소리가 베르디나 푸치니 음악에 더욱 잘 어울리듯, 각자가 가진 목소리에 특별히 잘 어울리는 장르가 있기 마련인데요. 고음악을 사랑하지만 불행히도 저의 파트는 아닌 것 같습니다.”

 

Step 4 상생


두 마리 토끼 잡기

서선영은 지난해 3월부터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베이스 연광철은 2011년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지만, 연주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돌연 교수직을 사임한 후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캄머쟁어(궁정가수)로 활동 중이다. 연광철은 “교수직은 성악가로서 전성기가 지나고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 판단했다”고 전했다. 교단에 서면 아무래도 오페라 활동에 무리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서선영 역시 “바젤 극장 시절에는 어제보다 가사 한 줄 더 외우기가 목표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한 시간 살이’가 된 기분”이라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놨다.

“바젤 시절보다 처리해야 되는 일이 많아졌어요. 해야 하는 레퍼토리도 더 방대해졌고요. ‘이 시간만, 이번 작품만’하고 더 눈앞의 상황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안 그러면 도미노처럼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아요. 아직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지만, 가끔은 바젤에서 몇 달씩 한 캐릭터에만 몰두하던 때가 그립습니다.”

학교에 들어서며 성악가로서의 삶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익혀왔던 많은 역할들을 이제야 제대로 선보일 수 있는 시기인데, 학교 공채에 지원하는 것이 과연 적기일지 꽤 오랜 시간 고민해야만 했다. 객원교수로 지내는 2년 동안 연주자와 교육자로서의 균형을 잘 맞춰왔던 터라 조금씩 양보하면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지난해 학사일정으로 세 작품이나 포기해야 했죠. 생각보다 마음이 많이 쓰리더군요. 앞으로도 무대뿐만 아니라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라 예상돼요. 그래도 학교에서 무리한 일정이 아니면 최대한 지원해 주려고 하니 균형을 잘 맞춰봐야죠. 잃은 것에 대해 아쉬워하기보다 받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고요.”

해외 활동 당시 한국 성악가의 정체성을 더 고민하게 됐다는 서선영. 이번 촬영 때 그는 한복을 입고 한국가곡 ‘님이 오시는지’를 불렀다. (의상 협찬 송파 한복 갤러리)

제2의 서선영을 위하여

그는 제14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여자 성악 부문 1위를 차지한 후 진행한 인터뷰에서 “어릴 때부터 서둘러 외국으로 나가는 것보다 한국에서 기초를 다지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교직에 몸을 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동일한 마음이다. “한국에서 철저히 준비한 뒤 현지에서 적응하는 시간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제가 공부할 적에는 음반사나 도서관에서 자료를 열람했어요. 지금은 클릭 한 번이면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세상이 됐죠. 그래서인지 요즘 학생들은 보다 상향된 실력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 않으면 바로 접어버리는 기질은 급속도로 발달된 미디어 세대의 결점이라 생각됩니다. 한 걸음씩 자신의 역량대로 밟아 가기보다, 당장 귀에 만족감을 주는 곡들을 선정하다 보니 때로는 맞지 않는 레퍼토리를 들고 오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후기 오페라를 배우다 보면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큰 소리를 요구받게 된다. 그 시기를 겪는 여러 학생은 음정과 음색의 균형을 잃고, 음량 증폭에만 치우쳐 성대가 망가질 수 있다. 서선영은 “성대는 돈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젊을 때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학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해 공부하는 것”을 추천했다.

“노래를 그만할까 고민 중인 학생이라면,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어요. 클래식 음악가는 수도자의 삶과 같습니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노래하기 위해선 살아가는 모든 방면에서 절제를 해야 하죠. 죽을힘을 다해서 노력해도 이룰까 말까 한 이 길을 절대 억지로 걸어갈 수는 없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만난 스승 최현수는 그에게 종종 “내가 너라면 연습실보다는 우면산에 가서 산책하겠다”고 얘기했다. 서두르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는 말이었다. 독일에서 만난 스승 미카엘라 크레머는 “주머니에 두 개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만 주는 것은 참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무대에 오른 이상 온 마음을 다해 노래하라는 의미였다.

“성악을 시작하는 학생들은 이미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동일한 출발 선상에 서요. 마지막 성패를 가르는 것은 타고난 달란트가 아닌 오롯이 후천적인 노력뿐이에요.”

 

Step 5 에필로그


이제 서선영의 삶과 이야기는 그가 지나온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라, 성악가를 꿈꾸는 자들의 ‘공통의 꿈’이 됐다. 그래서 이 글의 부제목은 ‘새 출발을 앞둔 당신에게’로 지었다. 몇 개의 기억을 되짚으며 그와의 긴 이야기를 끝낸다.

 

바젤 극장에서의 첫 데뷔와 모교 교단에 처음 섰을 때의 기분을 비교한다면? 오페라 가수로 데뷔할 때는 자신만 생각해도 되는 사람이었죠. 다른 것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데…. 교수로 임명된 후에는 자리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 많은 것들이 조심스러웠습니다.

학교에서 만난 ‘요즘 아이들’은 좀 어때요? 제가 공부했을 때보다 훨씬 실력이 좋아요. 학교 오페라 무대에 올라간 제자들을 보면서 거대한 우주를 가진 예술가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동안 아이들에게 마음을 내어주기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제가 더 엄청난 에너지를 받고 있더라고요. 이제는 서로가 서로의 팬으로 힘이 되어주는 상생의 관계라는 생각이 들어요. 든든한 마음입니다.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면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아뇨. 매일 하고 싶은 것에 최선을 다해서 몰두했어요. 돌아가고 싶거나, 이렇게 해볼 걸 후회하는 부분은 없죠.

 

촬영을 끝낸 서선영은 입었던 옷을 하나씩 정리해 다시 짐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어딘지 후련해 보이는 뒷모습으로 홀연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고, 그저 행동한다.

오는 6월, 서선영은 국립오페라단이 올리는 베르디의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에서 엘레나 공녀 역을 맡는다. 9월에는 프랑스 몽펠리에 극장에서 베르디의 ‘아이다’에 선다. “두 오페라 모두 새롭게 맡은 역이라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그에게선 잔잔한 설렘이 느껴졌다.

 

말하라, 얼마나 놀라운 꿈들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

그것들은 공허한 바다의 물거품같이 사라지지 않는 꿈들

꿈들은, 매 순간마다 매일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고

– 바그너 ‘베젠동크 시에 의한 5개의 가곡’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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