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IVERSARY CLASSICAl MUSIC & TRADITIONAL MUSIC
2022
기억해야 할 음악가와 작품 세자르 프랑크부터 명창 박봉술까지
역사 속으로 들어간 음악가와 작품은 망각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탄생과 서거의 기념 주기를 통해 세상에 다시 나오곤 한다. 누가 태어났고, 어떤 작품이 나왔는지 살펴보기 위해 시간을 되감아 100년 전, 200년 전으로 가본다. 올 한해 이들의 탄생과 서거를 우리는 어떻게 기념해야 할까.
글 한정호·윤중강
ANNIVERSARY 1
100·200주년의 의미가 장착된 클래식 음악 유산
음반에선 리코딩 박스, 공연은 기념 콘서트, 방송은 라디오 스페셜과 팟캐스트, 연구에선 저술과 학술대회를 통해 클래식 음악 산업은 음악가의 생몰을 기념했다. 그러나 코로나는 이들을 기념하는 인위적인 운동이 우리에 남긴 유산이 무엇인가를 살피게 했다. 지난 2년간 예산이 있어도 행사를 할 수 없고 기념 공연을 하고 싶어도 청중을 모을 수 없었다. 음반과 공연, 출판 판촉 차원을 넘어 ‘2022년’과 예술가를 숫자로 엮는 작업이 내실화되어야 덧없이 보낸 베토벤 250주년의 재판을 막는다.
클래식 음악 시장은 2022년을 통해 명망 있는 생존 음악가의 건재를 확인한다. 올해 80세를 맞이한 1942년생 현역 지휘자에 다니엘 바렌보임(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음악감독)·토마스 잔데를링(노보시비르스크 필하모닉 음악감독)·로타르 차그로세크(전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수석지휘자),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 첼리스트 나탈리아 구트만, 클라리네티스트 리처드 스톨츠만 등이 있다.
예술가들의 영감이 된 음악가들
빈 필 단원 대표 다니엘 프로샤우어는 2022년 빈 필 신년음악회 연주를 “바렌보임의 80세 생일 축하 서곡”으로 규정할 만큼 남다른 연대감을 과시했다. 바렌보임은 지휘자로 베를린 필하모닉,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만나고 피아니스트로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한편, 베토벤 후기 소나타로 산수연(傘壽宴)을 연다.
코로나 초기 극심한 피해를 입은 이탈리아 북부에 거점을 둔 폴리니는 현역 은퇴가 점쳐졌지만, 팔순을 맞아 런던 사우스뱅크,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독주회를 가지며 쇼팽·베토벤·슈만을 재차 돌아본다. 국내 공연장 대관 스케줄에 잠시 그의 내한 독주회가 노출됐지만, 늘 그랬듯 코로나로 여건이 좋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2004년 볼로냐 오페라극장과 내한한 ‘불세출의 바리톤’ 레오 누치, 2011년 국립오페라단 ‘파우스트’에 출연한 베이스 새뮤얼 래미, 음악과 무용을 자유자재로 활보한 아티스트 메러디스 멍크도 현역 가수는 은퇴했지만, 예술인으로 여든에 접어든다.
올해 90세를 맞이한 1932년생 현역 예술가로는 작곡가 존 윌리엄스와 로디온 셰드린, 지휘자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 195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아담 하라시에비치, 무국적 논란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은 스웨덴계 일본 피아니스트 잉그리드 후지코 헤밍, 2021년 베르비에 페스티벌에서 노익장을 과시한 스페인의 명 피아니스트 호아킨 아추카로가 있다.
‘경음악의 거장’ 아서 피들러에 이어 장기간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역임한 ‘영화음악의 대가’ 존 윌리엄스는 팔십 후반에 비로소 베를린 필·빈 필의 정기 연주회를 지휘하며 황혼을 물들인다. 줄리아드 음악원, 할리우드, 오스카, LA 올림픽을 오가며 특히 블록버스터에서 음장감을 자아내는 데 특출한 능력을 발휘했던 그가 결국 최고의 오케스트라의 인정받으며 졸수(卒壽)를 맞는다.
20세기 후반 마리아 칼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더불어 음반업의 이슈를 독점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1932~1982)는 2022년 탄생 90주년, 서거 40주기를 동시에 맞는다. 오늘날에도 이고르 레비트, 비킹구르 올라프손이 지속해서 굴드를 언급하고, 2019년 야마하는 ‘디어 글렌(Dear Glenn)’ 프로젝트로 굴드 연주의 해석적 특이성과 뉘앙스를 학습시킨 자동 피아노를 개발했다. 작고 후에도 미공개 음원이 발굴되면서 현재 약 300여 개 리코딩으로 그의 연주를 만날 수 있고, 2022년 또 다른 숨은 음원이 등장할지 이목을 끈다.
푸르트뱅글러의 베를린 필 후계자로 기대됐다가 카라얀에게 자리를 넘겨준 세르주 첼리바다케 (1912~1996)의 탄생 110주년을 음반으로 기리긴 어렵다. 생애 동안 녹음을 멀리해 정규 음원도 손에 꼽고, 타계 후 그의 유족들은 해적판 유통을 막고자 공연장 아카이브 음원 출시에도 소극적이었다. 2012년 구글 홈페이지의 두들(기념일이나 인물을 기리기 위해 구글 홈페이지의 구글 로고를 특별히 바꾸는 것)에 등장하고, 소니가 VHS 소스를 DVD로 발매한 정도가 첼리비다케의 100주년 기념이었다. 110주년에는 고인의 생애를 다룬 영화 ‘더 옐로 타이(The Yello Tie)’가 제작되고 존 말코비치가 주연을 맡았다.
100주년으로 기억되는 음악가들
1922년에 태어났던 인물들의 탄생 100주년이 2022년 기념 해의 핵심이다. 프랑스에서 활동한 그리스 작곡가 이안니스 크세나키스(2001), 마리아 칼라스의 ‘영원한 라이벌’ 레나타 테발디(2004), ‘20세기 플루트의 황제’ 장 피에르 랑팔(2000), 이스라엘 출신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이브리 기틀리스(2020), 미 서부영화음악의 개척자 엘머 번스타인(2004)의 행적을 음악 산업이 되살린다(괄호는 타계 연도).
크세나키스는 수학 그래프를 기본으로 세로축을 음높이 가로축을 시간으로 놓고 음향의 변화를 시간순으로 구현하면서 20세기 아방가르드 음악에서 중요한 작곡가로 부상했다. 건축·확률·조명을 도입해 ‘형식화된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했고 실험·전자 음악은 물론 노이즈·인더스트리얼 뮤직 등 컨템퍼러리 음악에서도 비주류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카를레코드(Karlrecords)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5LP/5CD 분량의 크세나키스 전집 ‘일렉트로어쿠스틱 웍스’를 박스로 발매했다.
토스카니니가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칭한 테발디는 이탈리아 페사로 태생으로 1946년 라 스칼라 극장의 재개관 공연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1960년대 중반까지 베르디, 푸치니의 베리스모 오페라의 여주인공으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대표했고 투명하지만 따뜻함이 깃든 목소리로 청중을 매료했다. 데카 레이블은 기회가 될 때마다 대형 박스를 냈고, 테발디 전성기의 모노 음원을 현대적으로 재생하는 음반사의 기술력을 평가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음반 업계가 대대적으로 100주년을 알리는 이는 ‘황금 플루티스트’ 랑팔이다. 1950년대 랑팔이 등장하고 플루티스트가 독주회를 하는 무대의 형태가 자연스러워졌다. 업적을 기준으로 하면 랑팔은 ‘20세기 플루트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릴 만하다. 제임스 골웨이를 넘어 플루티스트로 역대 가장 많은 녹음을 했다. 플루트를 위해 쓰인 거의 모든 클래식 음악을 섭렵했고, 1969년 CBS와 계약하면서 재즈 피아니스트 클로드 볼링과 녹음한 ‘플루트와 재즈 피아노 트리오를 위한 앨범’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랑팔 100주년을 맞이해 소니는 CBS, 소니, RCA에 산재한 랑팔의 독주, 지휘 녹음을 56장 박스로 발매했다. LP 시절 발매 재킷을 담았고 트럼피터 모리스 앙드레와 함께한 희귀본도 수록됐다. 78회전 SP 레코드 시절의 기록이나 구 EMI, 에라토에 남아 있는 소수의 기록도 새로운 포장으로 빛을 볼 전망이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 겸 작곡가 아르투르 니키쉬(1855~1922) 서거 100주기를 기념한다. 음악감독 안드리스 넬손스의 지휘로 1월, 니키쉬가 작곡한 ‘재킹엔의 트럼피터’ 동기에 의한 환상곡을 연주한다. 반면, 1895년부터 생애 마지막까지 음악감독으로 재직한 베를린 필에선 특별한 니키쉬 기념행사가 없다.
스스로 신이 된 작곡가와 영국의 민요 수집가를 추억하는 법
1872년엔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더 스크랴빈(1915)과 영국 작곡가 랄프 본 윌리엄스(1919)가 태어났다. 러시아 전문 피아니스트의 독주회와 음반, 영국 관현악계에서 두 작곡가의 150주년을 전면에 내세운다.
스크랴빈은 유년기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학우 라흐마니노프(1873~1943)보다 연주자로 주목받았지만, 손목 부상으로 작곡가로 선회했다. 초기에는 쇼팽 경향의 후기 낭만 성향을 보이다가 조성 음악에서 이탈하면서 드뷔시 인상주의, 쇤베르크 표현주의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작풍을 창안했다. 베르크, 시마노프스키에 전수되는 신비주의적인 화음 사용은 교향곡과 피아노와 만날 때 극치를 이뤘다.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 알렉산드르 칸토로프가 2022/23시즌 스크랴빈 150주년을 리사이틀 투어로 조명한다. 아나톨 우고르스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같은 동구 연주자들이 스크랴빈 음악을 즐겨 다뤘고, 유니버설뮤직은 데카와 DG 아카이브를 간추려 10장 CD 분량의 스크랴빈 박스를 출시했다. 영국의 주요 음악 기관과 악단이 본 윌리엄스 150주년을 기념한다. 생일이 10월인 관계로 기념 공연은 2021/22, 2022/23시즌에 걸쳐있다. 작곡가의 유산을 관리하는 랄프 본 윌리엄스 소사이어티(Ralph Vaughan Williams Society)는 유족이 보유한 저작권이 소멸하기 전 마지막 행사로 2022년을 준비한다.
본 윌리엄스의 9개의 교향곡, 5개의 오페라와 영화, 발레 음악, 교회 음악과 합창곡은 20세기 영국 음악의 빼놓을 수 없는 자산이다. 사라 장을 비롯해 저명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본 윌리엄스 ‘종달새의 비상’을 녹음했다. 앤드루 데이비스, 마크엘더, 안토니오 파파노처럼 영국 음악을 지탱하는 거물들이 의무감처럼 본 윌리엄스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거나 주요 곡을 소개했다. 2월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 BBC 필하모닉을 시작으로, 3월 로열 필하모닉, 4월 할레 오케스트라, 런던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가 앞다투어 본 윌리엄스 붐에 나선다.
200주년으로 되새기는 작품
200년 전인 1822년은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1822~1890)가 태어나고, 극작가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1776~1822)(이하 E.T.A 호프만)이 사망한 해이다.
벨기에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프랑크는 쇼팽, 리스트보다 아래 연배에서 활약한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다. 리스트와 바그너의 독일 낭만주의 영향을 받아 반음계 진행과 전조, 순환형식을 이용한 작풍이 특징을 이루고 독자적인 개성을 담아 프랑스 근대 음악의 기초를 쌓았다. 작곡 초기에는 오라토리오와 같은 종교음악을 주로 썼고,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하면서 파리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아 안정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다. 오르간 작품에 명작들이 빼곡하고 바이올린 소나타는 그가 64세에 작곡된 작품으로 대기만성의 인생이었다. 그렇기에 오르간 음악계는 프랑크 탄생 200주년을 가장 활발하게 기린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오르가니스트 스콧 데트라, 덱스터 케네디가 프랑크 오르간 전곡을 연주하고, 2018년 사망한 노르웨이 오르가니스트 비욘 보이센의 프랑크 오르간 전집도 라오(Lawo)에서 재발매된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 아로 4중주단(Quatuor Arod)도 프랑크 작품으로 200주년을 기념한다.
E.T.A 호프만은 작곡가·화가·음악평론가·변호사로 활동하며 다양한 재능을 발휘했고, 후대에는 주로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문학의 귀재로 남았다. 어린 시절 모차르트에 심취해 중간 이름을 빌헬름에서 아마데우스로 바꿨다. 법률가 시절을 보내고 생계에 어려움을 겪을 때, 밤베르크 극장 지휘자로 구직 신청을 하고 1808년 채용됐다. 호프만은 밤베르크에서 작곡가·무대 연출가·화가·음악평론가로 종횡무진으로 활약했다. 2022년 호프만을 기리는 곳도 밤베르크 심포니가 중심이다. 밤베르크 심포니는 6월,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의 지휘와 협연으로 호프만이 작곡한 작품과 그의 다양한 직군이 연계된 곡들을 연주한다.
기념 주년을 맞는 음악계
오페라계에서 2022년은 베르디 ‘아이다’ 초연 150주년을 맞았던 2021년의 여파가 한 시즌 더 이어진다. 지난해 리카르도 무티가 베로나 야외극장에서 ‘아이다’를 지휘했고 작중 배경의 이집트 카이로에서도 카이로 오페라가 2021년 9월 ‘아이다 150’을 축하했다. 2022년 베를린 도이치 오퍼, 드레스덴 젬퍼오퍼,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나폴리 산카를로, 베로나 야외극장, 스웨덴 왕립 오페라, LA 오페라 등 세계 A급 오페라하우스에서 아이다 150주년을 명분으로 인기작을 반복한다. BBC 라디오는 2021년 12월 문화평론가 플로라 윌슨의 진행으로 ‘아이다 150주년의 의미’를 돌아봤다.
2022년은 여러 악단의 창립 100주년이다. BBC 필하모닉·스페인 발비오 심포니·미국 뉴저지 심포니·로체스터 필하모닉·토론토 심포니가 창단 100주년을 맞아 기념 공연을 갖는다. 아울러 디트로이트 오페라하우스·LA 할리우드볼·마드리드 테아트로 극장 개관 100주년이다. 오페라와 각종 이벤트성 공연으로 100주년을 축하하고자 하나 코로나19의 재확산이 변수다. 독일 할레의 헨델 페스티벌도 100년을 맞는다. 2022년은 메시앙 서거 30주기,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서거 40주기, 브루노 발터 서거 60주기, 마스네 서거 110주기이자 존 케이지 탄생 110주년이지만, 역사적 인물의 10년 단위 조명은 이제 음반 산업을 제외하면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글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
ANNIVERSARY 2
100년 전 태어난, 국악의 풍운아 4인
1922년은 임술년이다. 동양의 풍류객들은 임술년을 가장 좋아한다. 소동파(1037~1101)가 ‘적벽부’를 지은 때가 임술년(1082)이기에 그렇다. 그해 7월 보름, 소동파 일행은 그날 거기서 이른 가을을 느꼈다. ‘임술지추 칠월기망(壬戌之秋 七月旣望)’으로 시작한다. 이 노래는 조선땅에서 크게 사랑받아서, 한국의 많은 전통노래에도 ‘임술지추 칠월기망’은 참 많이 등장한다. 가곡과 단가, 판소리와 서도소리를 가릴 것 없다. ‘추풍감별곡’ ‘삼설기’ ‘어부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임술년에 네 명의 예인이 태어났다. 대한민국 민속악의 역사에 걸출한 자취를 남긴 네 분이다. 그들의 노래와 가락에 ‘임술지추 칠월기망’이 담겨있다. 그들은 누굴까?
박봉술(朴鳳述), 1922.1.23~1989.12.11
김석출(金石出), 1922.2.28~2005.7.25
정달영(鄭達榮), 1922.11.29~1997.3.4
원광호(元光湖), 1922.12.10~2002.7.1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세습된 국악(무속)과 연관된 집안 출생이다. 각각 구례에서, 포항에서, 화순에서, 담양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국악을 하고 싶지 않았고, 특히 집안에서 하는 걸 택하려 하지 않았다. 국악판을 떠나려 했다. 그러함에도 결국 운명의 길을 택했다. 모두 예술적으로 성공했고, ‘인간문화재’란 이름으로 기억되는 이들이다.
소년 명창, 이 땅에 이름을 날리다
네 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이름을 날린 이는 누굴까? 박봉술이다. 일찍이 스타가 되었다. 그 시절의 박봉술을, 지금의 정동원과 비유하면 어떨까? TV조선 예능 프로그램 ‘미스터트롯’에서 정동원을 남진이 인정하고, 임영웅과 겨룬 것처럼, 박봉술이 딱 그랬다. 조선성악연구회의 송만갑(1865~ 1939)이 일찍이 박봉술을 인정했다. 임방울(1904~1961)이 만든 단체(창극단)에 소속되어서 임방울과 겨룰 만큼, 일찍이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런 박봉술이지만, 그는 판소리를 할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 박만조(1875~1952)는 형제 중에서 박봉래(1900~1933)를 특히 키웠다. 그가 ‘제2의 송만갑’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소리 잘하고, 돈 잘 버는’ 청진권번의 소리 선생 박봉래가 객사를 했다. 박만조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였다. 절망에서 추스르고 일어난 박만조는 모든 꿈을 박봉술에게 돌렸다. 봉술은 새벽이면 눈깔사탕(박하사탕)의 맛에 취해서 일어나, 날마다 소리 공부를 계속했다. 한약방을 하는 만조는 봉술에게 온갖 좋은 약재를 먹이며, 봉래에게 못다 이룬 꿈을 봉술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했다. 그 꿈은 이뤄졌다.
1939년 5월 13일, ‘조선소리콩클’(조선일보사 주최)이 열렸다. 부민관(현 서울시의회)에서 열린 이 대회는 지금의 TV조선 ‘국민가수’ 오디션과 똑같다. 지방예선을 거쳐서 12명이 부민관 결선 무대에 올랐고, 전 조선의 화제였다. 당대 최고의 명창 이동백·김창룡·한성준 등이 심사를 맡았다. 30세의 강장원(나주 대표)과 17세의 박봉술(구례 대표)이 맞붙었다. 여기서 박봉술은 단가 ‘진국명산’으로 목을 풀고, 판소리 ‘춘향가’ 중 ‘어사 장모 상봉’ 대목을 불렀다. 이 대회를 통해서 박봉술은 전 조선 사람에게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었고, 귀명창의 마음에 ‘저장’된다.
무속 집안에서 태어난 두 악사
박봉술이 이렇게 잘 나갈 때, 김석출은 어떠했을까? 무속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굿을 하기가 너무도 싫었다. 서울에서 협률사(창극 단체)가 경상도를 순회할 때, 그걸 구경하며 따라다녔다. 굿소리가 싫었고, 판소리가 좋았다. 그래서 판소리를 실제 배우기도 했다. 굿판을 오래 쫓아 다닌 이라면 기억할 거다. 김석출은 동해안별신굿이 펼쳐지는 굿판에서도, 판소리 한 대목을 불렀다. 반응이 시원치 않은 걸 알면서도 그랬다.
김석출은 일찍이 포항을 떠나고 싶었고, 부산에 정착하고 싶었다. 여성국극이 인기를 끌자, 여성국극의 악사가 되고자 했다. 그 시절엔 대금에 전념했다. 대금 연주자 이생강(1937~)과 같은 출생이 부러웠다. 악기를 만드는 집에 태어나서, 악기를 잘 부는 그가 부러웠다. 김석출도 악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악기를 열심히 연마했다. 하지만 굿판은 석출을 놓아주지 않았다. 형제인 재출도 있고, 호출도 출중하지만, 석출을 특별히 원하는 사람이 있기에 그렇다. ‘화랭이 중 화랭이’, ‘양중 중 양중’이 김석출이었다.
정달영도 김석출처럼 무속 집안 태생은 마찬가지. 그러나 그는 일찍이 거기서 벗어나려 했다. 그 길은 화순을 떠나는 길이고, 악기 하나를 확실하게 하는 길이었다. 김석출과 다르게, 정달영은 ‘여성국극’의 악사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이 공개되는 걸 크게 원치 않았다. 일간신문 여성국극 광고란에 악사(음악부) 이름이 실리는 걸 원치 않았고, 때에 따라 이 이름 저 이름을 사용했다. 정달영, 정달용, 때론 본명인 정재국이란 이름을 사용하면서, 국극판을 전전했다.
국극 이전의 단체인 동일창극단, 대동가극단에서도 활동했고, 여성국극의 전성기 임춘앵(1923~ 1975)이 이끄는 여성국악단, 햇님국극단에서 활동했다. 또한 김연수(1907~1974)가 이끄는 우리국악단에서도 악사였다. 정달영은 여성국극이 자취를 감추었을 때도, 다른 단체를 쫓아 다녔다. 떠돌이 약장수판이면 어떠냐, 악기만 할 수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1922년생 네 사람이 모두 ‘역마살’을 타고났지만, 정달영 이상은 아니다. 아마 대한민국 곳곳의 여관 생활을 가장 많이 했던 사람을 꼽으라 하면, 정달영 명인이 ‘나요!’하고 손을 드실 것 같다.
사람의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
여성국극도 사라진 지 오래고, 이 땅에서 약장수마저도 사라졌을 때, 정달영 앞에 놓인 건 오직 가야금 한 대! 숙부 정남옥(1902~?)에게 배운 ‘한숙구제’ 가야금산조를 기억 속에 더듬었다. 자신이 보유한 가야금산조와 병창을 제대로 세상에 남기고 싶은 정달영 앞에 귀인이 나타났다. 가야금병창의 인간문화재 ‘여장부’ 박귀희(1921~ 1993)였다. 일제강점기 가야금병창으로 오태석·강태홍·심상건·한성기 등이 이름을 날렸는데, 그 맥이 모두 끊어졌다. 박귀희는 정달영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1985년 9월 6일, 국립국악원 소극장에서 ‘정달영 가야금병창 및 산조 독주회’가 열렸다. 예순셋 정달영 인생에 있어서, 무대 중앙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연주한 첫 번째 날이었다. 이미 열세 살에 ‘소리 신동’으로 유명했던 박봉술과는 50년의 간극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 박봉술은 초년운이 좋고, 정달영은 말년운이 좋다! 아쉽게도 박봉술은 중년에 목이 꺾여서 판소리를 하기 어려웠다. 그러함에도 판소리 귀명창들은 박봉술의 격이 높은 소리를 인정했다. ‘판소리유파발표회’에서 박봉술의 ‘상청’은 들리지 않았으나, 귀명창들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국립극장 ‘완창발표회’의 역사에서 추임새가 가장 많이 나온 건, 박봉술이 들려주는 ‘적벽가’가 아니었을까! 1986년 4월 25일 밤 11시 반, 박봉술은 횡단보도를 건너가다가 사고를 당했다. 중상이었다. 이것과 관련해서 법정공방이 벌어졌다. 당시 판소리 명창(국악인)의 정년(?)에 관한 법적 해석은 이러했다. 일반인의 노동 가동연한은 55세이지만, 인간문화재(판소리, 국악인)의 노동 연한은 ‘기예의 특수성을 고려’해 볼 때 69세까지 봐야 한다고 했다. 법정에서 박봉술 명창의 손을 들어준 거다. 박봉술 명창의 아들 박영순도 한때 국립창극단에 소속되어 활동했으나, 요절해서 아쉽다. 하지만 박봉술 명창의 융숭한 소리는 송순섭 명창(1936~), 김일구 명창(1940~)에게 올곧게 이어지고 있다.
명창(名唱)에서 명금(名琴)까지
1922년생 중에서, 가장 ‘파란만장’하지 않은 삶을 산 이는 원광호이다. 담양하면 대나무, 그의 집안에선 젓대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집안에서 일곱 살 때부터 판소리를 시작했고, 열세 살에 이름을 날렸다. 그의 본명은 원광홍이다. 소리를 시작해서 일찍 이름을 날린 건, 박봉술보다 원광호가 먼저다. 그런데 변성기가 찾아오고, 목이 꺾였을 때, 원광호는 ‘명창’의 꿈을 접었다.
스물네 살, 거문고를 중심으로 한 율객(律客)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이제 소리하는 원광홍을 버리고, 악기하는 원광호가 되었다. 1949년 당시 전북 정읍의 신태인을 근거로 두고 풍류활동을 하는 김용근(1885~1965)을 찾아가서 풍류 한바탕을 익혔다. 그도 생계를 위하여 여성국극의 악사가 되었고, 거기서 여러 악기를 두루 다뤘다. 조금앵(1930~2012)이 이끄는 여성국극동지사에서도 활동했고, 박보아·박옥진·조양금이란 세 명의 스타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삼성여성국극단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거문고가 자리하는 비중이 점차 커졌다.
기회가 왔다! 한국전쟁으로 피난 온 한갑득(1919~1987)이 삼성국극단의 음악을 담당하였는데, 그는 여성국극의 반주를 도와가면서, 한갑득에게 거문고산조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생긴 것이다. 원광호는 십 년 세월을 한갑득 문하에서 거문고를 익혔다. 그러다가 1964년엔 당시 전주에 살고 있는 신쾌동(1910~1977)을 찾아가서 1개월을 기거하면서 신쾌동류 거문고산조까지 섭렵할 수 있게 되었다.
신쾌동과 한갑득 명금(名琴)의 특장을 두루 수용해가면서, 조금씩 원광호는 자신의 가락을 만들어갔다. 이제 판소리를 하는 원광홍은 사라졌고, 거문고를 타는 원광호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그의 거문고는 점차 호수처럼 깊어갔다. “줄소리가 제일이라도 대소리에 못하고, 대소리가 아무리 좋아도 판소리에 어찌 당할 손가” 국악계에 이런 말이 있다. 원광호는 이 말을 역설(逆說)로 보여주었다. 판소리를 못 하게 되었을 때, 어릴 때부터 들었던 ‘담양의 악기’라 할 대금을 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는 대금도 아닌, 거문고를 택했다. 원광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조카 원장현(1950~)이었다. 원장현도 거문고를 했지만, 점차 대금에 치중했다. 원광호의 거문고와 원장현의 대금 2중주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2022년 임인년, 이 땅의 국악은 매우 다양하다. 또한 그래야만 한다. 그래도 우린 100년 전에 이 땅에서 태어난 이들을 기억했으면 한다. 한국사회가 근대화와 경제화의 급물결을 타는 소용돌이 속에서, 이들에게 국악은 애증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들은 시대적 소명을 생각했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필라멘트가 뜨거울 대로 뜨거워진 여관방 백열등 아래서, 오징어 다리를 씹으면서 시대를 원망하면서 육두문자를 날릴지언정, 다음 날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고 ‘국악이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던 네 사람! 우리는 이들에게 90도로 고개 숙여야 한다. “당신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