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아닌 나로 살아가기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2월 28일 9:00 오전

COVER STORY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

그 누구도 아닌 나로 살아가기

 

1988년 태생의 조진주가 20대가 되던 2000년대 전후로 한국 음악계의 위상은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이러한 에너지의 흐름에는 젊은 바이올리스트들의 탄생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20대 때는 계속 성취하지 못하는 게 분하고 초조했다”라는 그의 표현대로 조진주는 위축되어 있었다. 연일 날아드는 콩쿠르 승전보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니다. 날아든 승전보는 다른 승전보에 묻히는 시간이었다.

조진주가 작년에 출간한 ‘언젠가 반짝일 수 있을까’는 이제는 제법 성공의 반열에 오른 그녀의 자전 에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불안했던 과거에 어린 그녀가 자신을 향해 건네는 절반의 믿음과 절반의 의심을 담은 메시지였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펼치면 놀랍도록 솔직한 과거에 대한 고백이 담겨있음을 알게 된다.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이 쓸데없는 SNS 활동과 자기 중계에 몰입하여 온갖 화려함과 거짓으로 도배하고 있는 가운데, 자신이 걸어온 지난 시간을 성찰하며 고백한 그녀만의 역사와 그 용기는 놀랍게 다가왔다. 자신의 든든한 지원자인 부모와의 갈등, 성장의 시간에 스며들어 있지만 누구나 솔직히 고백할 수 없는 교육 환경의 폭력성과 경쟁의 부추김, 이로 인한 함께 살아갈 바이올린에 대한 믿음보다는 의심, 명문학교를 향한 과감한 자퇴 선언, 성공의 어머니는 아마 분노일 것이라는 생각 등등.

2014년 9월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그녀는 화려한 인터뷰 대신 ‘굿바이! 콩쿠르 인생’이라는 글로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았다. 그때의 첫 문장은 묘했다. 기쁨보다는 뜻 모를 한숨이 담겨있었다. “도저히 모를 일이다. 왜 스물여섯 해를 사는 동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걸까. 음악을 경쟁시킨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구도 안에서 우승한다는 것이 누군가를 제쳤다는 기쁨보다는 15년을 넘게 보아온 동료들을 향한 미안함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독립과 개성을 외치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가꾸기 위해 세속의 길을 일부러 피하던 그녀는 온갖 아르바이트로 청춘의 시간을 도배했다. 그것이 맞는 길이었지만, 세상은 인정하지 않기에 그녀는 ‘차선’으로 콩쿠르에 도전했다. 우승 후에 그녀가 깨달은 것은 이 길이 역시 ‘차선’이 아니었다는 것이고, ‘최선’을 다한 자신의 노력으로 또 다른 길을 개척하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주하지 않는 그녀는 여전히 천방지축으로 일관했고, 스스로 ‘변덕스런 여자’가 되기를 선포했다. 주위의 불안한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 조진주를 보며 ‘바로크’가 생각났다. 미술사학에서 ‘바로크’란 ‘울퉁불퉁한 진주’를 뜻하며, 일그러진, 과장된 뜻을 담고 있다. 조 바로크… 그녀‘만’의 일그러진 일탈과 과장은 어쩌면 평평하게 마름질되어가며, 심심해지고 있는 한국 음악계를 향한 ‘바로크적(울퉁불퉁한 진주적) 미학’이라 할 수 있겠다.

에세이집 ‘언젠가 반짝일 수 있을까’에는 그녀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주어진 노선을 차분히 즈려밟아도 겨우 무사할 수 있는 공연과 음악인생에서 이정표를 차버리고, 일탈의 발자국을 남기는 그녀의 추억 노트이고, 선언문 같은 책이다. 생상스 서거 스페셜 음반을 발매하고 큰 공연을 앞둔 조진주의 음악을 만나기 전에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작년에 취소된 공연을 앞두고, 오와 열을 가다듬고 있는 조진주를 만나보았다. 그럼 이제 류태형 음악 칼럼니스트의 인터뷰 속으로.

글 송현민 편집장 총괄 임원빈 기자

 


Interview

Part 1. 만나보다

내면에서 요동치는 음악의 진동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

나의 오늘을 기록하는 일

조진주의 첫 인터내셔널 음반을 들어본 것은 작년 말이다. 나이브 레이블(Naïve)에서 마티외 에르조그가 지휘한 아파시오나토 앙상블과 협연한 음반이었다. 금발로 염색한 조진주와 지휘봉을 든 에르조그가 포즈를 취한 음반 재킷과 안에는 생상스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바이올린 협주곡 3번 등이 담겨있었다. 2020년 가을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꿈꿔온 일이라 신난다”고 했던 그 음반이었다. 생상스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음반들 중 가장 눈에 띄었다. 이어서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조진주가 앨범 발매를 기념해 오는 2월, 마티외 에르조그/아파시오나토 앙상블과 함께 한국 투어를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2021년이 저물어가던 12월 28일, 조진주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 누구도 아닌 ‘조진주’이고 싶다

 

지난해 발간한 에세이집 ‘언젠가 반짝일 수 있을까’에서 “왜 바이올린을 선택했는가?”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어머니의 권유가 있었고, 내가 바이올린을 선택한 게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나도 모르게 바이올린이 내 길이 되어버렸다. 바이올린이란 악기와의 조우는 나의 의도가 아니었고 음악도 좋아하게 된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10대 때에는 뭔가를 잘하면 칭찬과 관심을 받으니까 그게 좋았다. 그러다 20대 때 방황했다. 내가 음악을 왜 해야 하며 내 인생을 왜 이것에 바쳐야 하는지 사유하는 시간을 보냈다. 많은 절차를 거쳐서 지금의 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음악을 업으로 삼은 건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다.

10대 당시 최대 관심사는 무엇이었나?

어릴 때 호기심이 많았고, 다방면으로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다. 바이올린 말고도 수영과 스케이트도 열심히 했고 또 꾸준히 했다.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저 악기를 다루는 능력이 다른 분야에 비해 빠른 속도로 두드러졌을 뿐이다.

어린 시절, 가장 영향을 준 바이올리니스트는 누구인가?

사라 장(1980~)이다. 아마도 같은 세대 연주자들이 어린 시절 롤 모델로 삼았던 바이올리니스트는 비슷하지 않을까. 김연아 때문에 피겨스케이팅을 시키는 것처럼, 사라 장 때문에 당시 부모님들이 바이올린을 시켰을 것이다. 우리 세대에 지금 활동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유난히 많다. 김다미·최예은·이지혜·클라라 주미 강·신현수 등 대부분 동갑이거나 한두 살 차이 나는 사라장 키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롤 모델이 없어진 것 같다. 나는 누구처럼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조진주가 되고 싶다.

10대 때부터 석사를 마치기까지 폴 캔터에게 배웠다. 그와의 만남이 운명적이었다고 들었다.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가?

당시 어머니가 보신 사라 장의 다큐멘터리에 매년 미국 콜로라도주 아스펜에 간다는 내용이 나왔다. 그래서 나도 예원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콜로라도주로 향했고, 아스펜음악제 콩쿠르에 참여했다. 당시 배우던 선생님께 캔터 선생님의 이야기를 익히 들었던 터라 꼭 만나고 싶었다. 무작정 찾아 나선 그를 아스펜 캠퍼스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다. 첫 레슨에서 ‘이분에게 배우지 않으면 안되겠다’라고 생각했다. 선생님도 내 안에서 뭘 발견하신 것 같았다.

클리블랜드에서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일반 학교를 다니며 오후에는 음악원에서 대학생들과 똑같은 커리큘럼을 소화하는 코스였는데,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는가?

캔터 선생님을 따라 클리블랜드로 가게 되었다. 한국인은 찾아보기 힘들고, 시골 같은 클리블랜드에서 행복하게 지냈다. 음악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내 안에서 계속 태울 수 있는 장작이 되어준 것 같다. 어머니는 그때 내가 말을 하도 안 들어서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으셨다고 하셨다.(웃음) 그래서 일반 학교에서 공부를 병행하는 게 더 낫다고 여기셨고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길모어 아카데미라는 가톨릭 학교에 다니며 오후에 음악원에 갔고 토요일에는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하면서 바쁘게 살았다.

 

음악의 전선 앞, 활과 악보를 방패삼아

 

익숙한 클리블랜드를 떠나 커티스 음악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시절, 애인에게 차였는데 그 아이가 커티스 음악원에 갔다. ‘무조건 저 학교에 들어가서 다시 사귀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입학하고 보니 나랑은 잘 안 맞았다. 꿈꾸던 ‘캠퍼스 라이프’와 그림이 너무 달랐다. 대학교가 아닌 음악원이기에 빌딩 안에서 아웅다웅하는 느낌이었다. 클리블랜드에서는 음악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문학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가령 ‘네 연주를 듣고 보들레르의 시를 떠올렸다. 낭송해도 되겠느냐’라며 시 낭송하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커티스 음악원에서는 1주일 만에 그 한계를 느꼈고, 이후 4개월 만에 클리블랜드로 돌아왔다.

2016년에는 모교인 클리블랜드 음악원 교수로도 임용됐다는 소식도 전했다. 교수로서의 활동은 학생 때와 비교하면 어떠했나?

클리블랜드 음악원은 여러가지 변화를 거치며 내가 학생이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학교가 됐다. 약 2년간 교수로 지냈는데, 햇병아리 선생이어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선생이었던 이들이 동료가 되다 보니 조심스럽기도 하고 위축되어 있기도 했다. 여러 가지로 흥미로웠던 경험이었다.

17세 때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어떻게 준비했고, 1위를 한 요인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해외 콩쿠르 경험이 없었던 때여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했다. 그때가 입시를 준비했던 해여서 많은 곡을 이미 익힌 상태였다. 협주곡도 준비가 된 상태였고 주요 레퍼토리랑 소나타 한 곡 정도만 더 하면 되었다. 참가자 중 두 번째로 어렸고 떨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어서 부담 없이 연주한 게 1위를 한 요인이 아닐까 한다. 정말 운이 좋았다. 결선 때 연주하다가 멈춰서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우승했을 때 ‘뭐지? 내가?’ 하는 느낌이었다. 콩쿠르 때 생각하면 그냥 웃음이 난다. 박지윤(현 라디오 프랑스 필 악장)이 같이 참가했었는데 큰언니처럼 보살펴줬다. 콩쿠르가 경쟁의 장이라고 생각되지만, 바이올리니스트들한테는 나와 비슷한 수준의 연주를 하는 선후배들을 보면서 자극도 받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과 지금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몬트리올 맥길 대학에서 부교수로 있다. 커리어가 시작된 곳이기도 한데,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멋진 곳이다. 문화예술이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도시가 젊고 역동적이며 활기차다. 대학이 많고 대학생 인구가 다수라서 진보적이다.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도 많지만, 학교에서는 영어로 강의하기에 불편하지 않다. 프랑스어를 10% 정도 알아듣는데 쉽지 않다. 한편 문화적으로 신기한 곳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오는 아티스트들이 50대 50 정도인 문화의 용광로 같은 곳이라 다양한 연주를 많이 보고 경험한다. 인생에서 지금 나의 시기에 어울리는 곳이다.

2014년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우승이 최고의 커리어가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콩쿠르를 전후해 기억나는 추억이 있다면?

그 해는 인디애나폴리스·몬트리올·퀸 엘리자베스·차이콥스키 콩쿠르가 동시에 열리던 해였다. 이번에만 하고 콩쿠르는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우승하게 되어 다른 콩쿠르는 안 하게 됐다.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는 우승 후 4년 동안 모든 커리어를 관리해주기 때문에 경력의 방향을 원하는 대로 잡아줬다는 점에서 은인 같은 대회다.

현재 미국에서 열리는 앙코르 실내악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데, 실내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느껴진다. 본인이 생각하는 실내악의 매력은 무엇인가?

내게 실내악은 음악의 한 장르라기보다는 인생철학에 가깝다. 클리블랜드 콰르텟과 카바니 콰르텟에게 주로 배웠는데 완벽하게 동일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걸 강조하셨다. 이것이 인생의 의미로 다가왔다. 뜨겁고 강렬한 경험이었다. 현악 4중주를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은 다 동의할 거다. 우정의 진정한 의미를 4중주를 하며 배웠다. 동등하게 하지 않으면 교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포맷이다. 상대방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들었던 사람과 내 소리만 들었던 사람의 음악은 다를 수밖에 없다. 현악 4중주를 오래오래 연주하고 싶다. 이런 실내악의 강렬함을 젊은 연주자들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앙코르 실내악 페스티벌을 만들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세계 평화에 일조하고 싶었다. 그런 철학을 기획에서부터 반영하려고 한다. 교육 철학,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강사들의 성정 등을 신경 쓴다. 좋고 건강한 경쟁이 있는 가운데 아이들이 서로를 격려하면서 동료라는 의식을 가졌으면 해서 그런 환경을 만들려고 한다. 매해 6월 첫째 주 시작하는 앙코르 실내악 페스티벌은 지난해 델타 변이 유행 전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음악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 동의하는가?

확실히 신체적인 능력에서 그런 점은 있는 것 같다. 체력·근육·힘줄의 민첩함·정확도·힘 등을 타고나 연주가 더욱 수월했던 음악가들을 봤다. ‘신동’이라 불리는 친구들은 몸의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파악하고 카피를 한다. 아무나 되는 게 아니고, 그 능력에 특화된 사람들이 있다. 그게 재능이지 않을까? 하지만 음악은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음악은 생각보다 다각도로 접근해야 하는 학문이라 지적 능력을 포함한 여러 가지 요소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성숙한 아티스트가 되기 힘들다. 나는 체력은 좋은 편이지만 신동이라고 불린 적은 없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유라나 고 권혁주처럼 뛰어난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대기만성형(?)인 것 같다.

함께 연주하고 싶은 지휘자나 솔리스트가 있다면?

재닌 얀센. 옆에서 숨이라도 같이 쉬어보고 싶다.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 소프라노이자 예테보리 심포니의 수석객원지휘자인 바바라 해니건과도 공연하고 싶다. 사이먼 래틀과 마이클 틸슨 토머스도 빼놓을 수 없다.

 

조진주라는 팔레트로 생상스를 채색

 

조진주는 오는 2월 마티외 에르조그/아파시오나토 앙상블과 협연을 갖는다. 에르조그의 ‘광팬’이었다고 고백하는 그는 이제는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비슷한 음악의 결을 가지고 있다고도 전한다.

지난해 생상스의 서거 1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바이올린 작품을 음반(Naïve)에 담았다. 당신에게 생상스는 어떤 작곡가인가?

어릴 적부터 연주했기 때문에 생상스의 작품들은 익숙하다. 생상스 음악의 DNA에 친숙함이 탑재된 것처럼 말이다. 연주할 때 친한 할아버지와 이야기 나누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그의 독특함에 끌렸기 때문에 앨범을 기획했다. 그 독특함은 뭐랄까, 생상스의 ‘근성’이라고 해도 될까. 교사·오르가니스트·지휘자·작곡가로서 폭넓은 활동을 했는데, 어떻게 해서 자기만의 색깔을 고수하게 됐나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그의 어떤 근성이 그의 음악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

그 역시 동시대 작곡가인 라벨과 드뷔시같이 현대적인 작품을 써야한다는 압박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선율을 고수하려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기보다는 전통을 지키며 자신의 특성을 찾았다. 이번 앨범을 녹음하면서 생상스가 독일음악을 비롯한 수많은 영향을 받으며 본인의 색깔을 찾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러한 생상스의 고집이 매력적이었고 흥미로웠다.

음반을 들어보면 조진주 특유의 세련됨과 함께 치열함·씩씩함·꿋꿋함이 느껴진다. 기교적인 생상스의 바이올린 곡들을 해석하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생상스의 바이올린곡들은 빠르고 비르투오소적인 요소가 곳곳에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바이올리니스트를 위해 디자인된 것 같은 편안함도 있다. 현악기보다는 건반악기에 익숙했던 베토벤에 비하면 수려하게 ‘바이올리니스틱’하다. 빠르고 화려하게 들리는 부분도 연주하다 보면 기분 좋은 어려움이라 표현할 수 있다. 몸에 잘 달라붙는, 체화하기 쉬운 기교다. 연주하고 나면 짜릿함이 남는다.

녹음하면서 느낀점은?

녹음은 사흘 동안 파리의 라 센 무지칼에서 진행됐다. 코로나로 인해 파리에 가기 하루 전까지도 갈 수 있을지 확신 없는 상황이었다. 여행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오히려 녹음에 대한 부담은 덜 했는지도 모르겠다. 스튜디오는 약간 건조한 느낌이 있었는데, 건조했기 때문에 명료하게 나온 것 같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너무 습윤한 홀보다는 차라리 조금 건조한 게 낫다고 생각한다. 사실 연주에 목말라 있어서 연주와 녹음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기에 홀의 상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이브 레이블과 아파시오나토 앙상블 측에서 완벽하게 준비해주어 감사한 마음이 제일 컸다.

그동안 많은 협주곡 무대에 서 왔지만 녹음으로 남기는 것은 처음이다. 지휘자 에르조그와 함께 했는데 그와의 호흡은 어떠했는가?

에르조그가 에벤 콰르텟의 비올리스트였을 때부터 팬이었다. 그와는 이전에 실내악 연주를 함께 자주 했기에 음악적으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소통할 수 있다. 신기할 만큼 비슷하게 음악을 느끼는 결을 가지고 있다. 처음 만나서 합주를 했을 때부터 이렇게 잘 맞는 사람은 평생 많이 찾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연주할 때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마음을 읽을 줄 아는 파트너와 연주해서 행복했다.

협주곡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휘자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솔리스트가 바라는 지휘자의 모습은 아무래도 영민함일 것이다. 그리고 지휘 테크닉이다. 정확하게 빠른 속도로 협주자의 제스처나 타이밍을 파악해서 단원들에게 알려줘야 하므로 음악적인 미래를 살짝 내다볼 수 있는 민첩성과 음악적인 감각이 중요하다. 모든 음악가가 그렇겠지만 귀가 좋아야 하고 지휘 테크닉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협주곡 지휘가 보기보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은 지휘자에게 들었다.

에르조그는 어떠한 부분에 가장 공을 들이는 지휘자인가?

그와 주로 템포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음악의 성격이 템포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악보에 표기된 빠르기와 실제로 연주할 빠르기는 어느 정도로 갈 것인지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음반에 수록된 곡은 어떻게 정하게 되었는가?

수록곡 중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의 아리아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는 에르조그의 조언으로 싣게 됐다. 많은 부분을 파트너십으로 기획한 앨범이다. ‘로망스’는 내가 선곡했는데, 에르조그는 너무 초기작이라 자기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애매한 부분이 있다고 했다. 협주곡 1번도 좋아한다. 길이가 짧아서 많이 연주되지 않는 것 같다.

마지막에 수록된 아리아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는 메조소프라노를 위한 노래이다. 가사 없이 바이올린의 음색으로 온전히 연주하기 위해 어떤 점을 살리려 했는가?

성악곡이기 때문에 호흡을 어디에서, 어떻게 할까를 염두에 뒀다. 가사의 느낌, 음절 자체의 느낌과 내용을 생각한다. 실내악을 할 때도 가사 없는 곡을 가사가 있는 음악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가사가 있는 음악은 맥락과 내용이 존재하기에 해석하기가 더 용이하다. 몰입하고 감정 이입하기도 더 쉬웠던 것 같다. 비올라가 듀엣처럼 나오는 편곡인데 같이 연주했던 캐롤린 도닌이 훌륭한 비올리스트였다. 코로나로 거리두기를 한 협연은 외로웠는데, 비올라가 바로 옆에서 실내악처럼 연주하니 너무 좋았다. 갑자기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2월 에르조그/아파시오나토 앙상블과 함께 내한 투어를 갖는다. 음악 애호가들이 기대하는 공연이다.

이번 앨범에 실렸던 수록곡들과 함께 드뷔시와 라벨의 음악까지 만날 수 있다. 지난 앨범 ‘변덕쟁이 여인’(2020/Sony)과 생상스 음반을 같이 묶어내는 의미가 있다. 워낙 프랑스 음악을 좋아한다. 프랑스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앙상블, 그리고 내가 가장 친애하는 동료와 함께 꾸미는 무대이기 때문에 음악가들의 온기가 느껴지는 공연일 것으로 기대한다. 세련되면서도 프랑스 음악 특유의 까칠한 맛이 있는 공연이 될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피아니스트 김규연, 첼리스트 브래넌 조와 트리오 서울을 결성했다. 오는 3월 3일 금호아트홀에서 처음으로 연주한다. 위촉곡(최우정)을 비롯하여 드뷔시·아렌스키·샤미나데 등을 연주한다. 3중주 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쓰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미국에서 샬럿 심포니와 협연 무대를 앞두고 있고, 6월에 있을 앙코르 실내악 페스티벌도 잘 준비하려 한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봄아트프로젝트

조진주(1988~) 예원학교 재학 중 도미해 클리블랜드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17세에 몬트리올 콩쿠르 1위를 시작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콩쿠르 1위,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1위에 오르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재 앙코르 실내악 페스티벌 음악감독을 맡고 있으며, 캐나다 맥길 대학교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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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ORMANCE INFORMATION

마티외 에르조그/아파시오나토 앙상블(협연 조진주)

2월 24일 광주문화예술회관 2월 25일 성남아트센터 2월 26일 통영국제음악당

생상스 로망스 Op.48,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외

 


New Record Review

Part 2 들어보다

생상스 서거 100주기 기념 음반

생상스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외 조진주(바이올린)/마티외 에르조그(지휘)/아파시오나토 앙상블 NaÏve V7422

 

이 음반을 재생하는 순간, 조진주의 거침없는 바이올린 연주에 강하게 매료될지도 모른다. 첫 음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강한 자기 확신은 음악을 듣는 이들을 강하게 사로잡는 힘이 있다. 때로는 음반을 들으며 마치 바이올리니스트가 직접 내 앞에서 연주하고 있는 듯,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기쁨에 푹 빠져든 조진주의 밝고 명랑한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음반을 통해서도 현장 연주 못지않은 강한 활력과 호소력 있는 소리가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실황 음악회뿐 아니라 이렇게 음반에서도 청중과 교감하는 그는 음악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태어난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닐까 싶다. 조진주가 지난해 생상스(1835~1921) 서거 100주기를 기념해서 내놓은 이번 음반은 연주자의 개성과 생상스의 음악, 마티외 에르조그/아파시오나토 앙상블과의 호흡이 잘 조화된 음반이다.

음악 앞에서 언제나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조진주의 연주 스타일은 생상스의 음악에서 더욱 힘을 발휘하는 듯하다. 그의 연주는 간결하면서도 한 번에 각인되는 생상스의 선율에 더욱 힘을 싣는다. 폭넓은 비브라토와 현에 밀착된 운궁으로 빚어낸 음색은 따스하면서도 풍요롭고 힘차고 명랑하다. 조진주의 생상스 연주를 한 마디로 평한다면 ‘음악의 즐거움을 전하는 연주’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음악을 향한 깊은 사랑이 음 하나하나에 녹아있다.

조진주, 그리고 지휘자 에르조그가 이끄는 아파시오나토 앙상블의 협연은 조화롭다. 흥미롭게도 조진주의 바이올린 음색은 에르조그의 비올라 톤을 연상시킨다. 에벤 콰르텟의 비올리스트로 활동한 그는 풍부하고 감각적이며 따스한 음색으로 에벤 콰르텟에 풍성한 색채감을 더한 연주를 들려주곤 했는데, 그의 연주 방식은 조진주의 보잉이나 비브라토 등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이번 음반에서 에르조그가 이끄는 아파시오나토 앙상블이 조진주의 바이올린 연주에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반응한 것도 바이올리니스트와 지휘자의 각별한 음악적 동질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부분적으로 연주 기술상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솔리스트의 열정이 넘쳐 오케스트라의 앙상블과 살짝 어긋날 때도 있고, 모든 음에 폭넓은 비브라토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뿐 아니라, 왼손의 포지션이동시음이 끌리는 소리를 절제하지 않는 연주 스타일은 때때로 과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적 감흥을 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약간의 어긋남은 그리 거슬리지는 않는다. 유럽식의 담백한 스타일의 연주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조진주의 연주는 누구에게나 감성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연주곡목 선정에서도 이 음반은 음악애호가들에게 큰 기쁨을 준다. 음반에는 대개 생상스의 바이올린곡으로 떠올리게 되는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와 ‘하바네라’,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 1·3번 외에 로망스 Op.48도 수록되었다. 특히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 중 유명한 아리아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가 바이올린으로 연주되어 특별하다. 이 곡에서 조진주의 연주는 사랑으로 가득하다. 아마도 그녀의 연주에 듣는 이의 마음도 열릴 것이다.

글 최은규 (음악 칼럼니스트)

 


 

Discography

Part 3 모아보다

음반으로 넓어지는 조진주의 세계

 

이전에 발매한 조진주의 3개의 음반을 소개한다.

2007년과 2018년에 발매한 두 음반은 각각 몬트리올 콩쿠르와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우승 이후 얻게 된 결실이다.

이후에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그만의 세계를 ‘변덕스러운 여자’(Sony)에 담아 발매했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외

조진주(바이올린)/루이즈 안드리 베릴(피아노)

Analekta AN28760

연주자의 젊은 날이 음반으로 기억되는 것은 참으로 뜻깊다. 때로는 무르익지 않은 상생의 기쁨으로 찬 음악이 또 다른 즐거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몬트리올 콩쿠르를 갓 마친 스무 살의 조진주를 이 음반에서 만나볼 수 있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BWV1001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 Op.108, 라벨의 ‘치간’을 포함해 캐나다 작곡가 스콧 굿의 바이올린 작품 ‘꿈은 먼 길을 향해 달려오고’가 수록되어 각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함께 연주한 피아니스트 루이즈 안드리 베릴은 캐나다 몬트리올 오페라의 반주와 오퍼드 여름 페스티벌의 오페라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코코넨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즉흥곡 외

조진주(바이올린)/김현수(피아노)

Azica71321

조진주는 2014년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에서 우수상을 비롯해 바흐상, 로맨틱 협주곡상을 수상하며 솔리스트로서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측은 현대음악에 재능을 보인 조진주를 눈여겨보았고, 콩쿠르의 역사를 기록하는 의미를 담아 그동안 콩쿠르에 위촉된 작품들을 한데 모은 음반 제작을 조진주에게 제안하며 성사되었다. 음반에는 콩쿠르가 시작된 1982년에 위촉된 요나스 코코넨(1921~1996)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즉흥곡을 포함해 그가 우승한 2014년에 위촉된 엘런 타페 즈윌리치(1939~)의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환상곡까지 총 9곡이 수록되어 있다.

 

La Capricieuse

조진주(바이올린)/김현수(피아노)

Sony S80583C

‘변덕스러운 여자’를 뜻하는 음반의 제목은 사뭇 부정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조진주는 음반 제목에 대해 “엘가의 작품 ‘La Capricieuse’에서 이름을 따왔다. ‘변덕스럽다’는 것은 본능과 본질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주체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아 좋았다”라고 이야기했다.

생각해보면, 드레스 대신 바지와 재킷을 입고 무대에 오르고 꾸준히 클래식 음악계의 정형화된 틀을 비틀고 있는 그는 본능에 충실한 ‘변덕스러움’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 그만의 세계가 이번 음반에서 돋보인다. 엘가의 ‘변덕스러운 여자’를 포함해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등 탐구와 전통 영역에서 무르익은 연주를 들려주는 한편, 난곡으로 손꼽히는 이자이의 ‘생상스 왈츠 형식의 에튀드에 의한 카프리스’처럼 화려한 기교로 무장하기도 했다.

글 임원빈 기자

 


 

Into The Essay

Part 4 읽어보다

에세이집 ‘언젠가 반짝일 수 있을까’

 

조진주의 글 쓰기는 익히 소문나 있다. 본지 2015년 4월호에 가수 송착식을 비롯해 사진작가 강영호·소설가 은희경·피아니스트 김선욱 등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직접 글로 풀어냈다. 자신의 예술에 대해 ‘연주’ 외에 ‘글쓰기’를 통해 표출하고 있는 그녀는 2021년에 에세이집 ‘언젠가 반짝일 수 있을까’를 출간(아웃사이트 출판사)하기도 했다. 조진주는 ‘맹세컨대, 음악가의 삶은 낭만적이지 않다’(19쪽)라는 말로 서문을 시작한다. 언제나 완벽하고 낭만적인 무대만을 보여주었기에 그의 솔직한 이야기는 당황스럽다. 솔리스트라면 ‘아름답게’만 남고 싶은 욕심이 있을 법도 하지만 그는 책 발간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왜 숨겨야 하죠? 그저 해야 할 나의 이야기들을 담았을 뿐”이라며 강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보다 솔직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그가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소리와 음악의 유한함이 끝이 있는 삶과 비슷하게 느껴져서이다. ‘음악의 이런 한계 속 무한한 짜릿함과 아름다움 때문에 나는 살아 있다고 느끼며,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밤에 잠드는 순간까지 음악을 듣고, 음악 생각을 하고, 음악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한다’(17쪽)라고 이야기한다. 책을 한 장씩 펼치다 보면, 조진주의 비밀 서랍장을 하나씩 여는 것 같다. 그의 삶으로부터 돋아난 고백과 문장들을 옮겨본다.

◎13쪽 #끈기와 시간을 음악에 각인하는 일

나는 체질적으로 연습이 힘들다. 그게 뭐든 한 가지를 반복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고역이겠지만, 나는 산만하고 의지력도 약해 더욱더 힘이 드는 것 같다. (…) 내가 상상하는 소리가 몸뚱아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악기로 전달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연주자는 음악을 체화하는 직업이다. 음정의 차이를 매순간 동물적으로 판단해 손가락의 방향을 틀어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몸의 감각도, 음악적인 지적 감각도, 모두 최상이 되어야 한다. 연주자의 삶은 흡사 장인의 삶처럼 이런 감각들을 반복적으로 단련하며 그 깊이를 더하는 것인데, 이 작업에 필요한 끈기가 천성적으로 부족하다는 게 내겐 큰 콤플렉스다.

◎27쪽 #엄마

돌이켜보면 엄마는 음악가의 부모가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딸이 가장 재능을 보이는 것 같은 분야에 투자하는 걸 망설이지 않았던 강한 집념의 어머니였을 뿐, 그게 본인 인생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크게 고민해보지 않았던 거다. 아니면 그 시대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 4남매 중 둘째 딸인 엄마는 나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 나를 보물처럼 여기던 엄마가 그깟 바이올린 때문에 처음으로 날 때렸을 때 엄마 마음도 많이 아팠을 거다. 죄책감에 잠들지 못했을 게 뻔하다. 하지만 나는 상처를 받았다. 엄마가 미웠다.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재밌고 따뜻하고 예쁜 우리 엄마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분명히 우리 엄마는 수제빵을 만들어주고, 잠이 솔솔 오라고 얼굴 마사지를 해주던 사람이었는데. 마치 눈앞에 그 세계가 펼쳐질 것처럼 실감나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사람이었는데.”

◎52쪽 #나의 세계는 밖이 아닌 안에서 쌓인다

나는 특히 두 종류의 사람을 보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감이 폭발한다. 첫 번째는 굉장히 틀에 박힌 모범생 같은 스타일의 연주자다. (…) 악보처럼 정확하게 딱 떨어지는 연주를 듣고 싶어 하는 음악가와 관객은 생각보다 많고, 특히 권위적인 선생님들은 이렇게 연주하는 제자들을 밀어주려 할 때가 많다. (…) 두 번째는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넘치는 연주자들이다. (…) 이런 상반된 두 가지 타입에 유난히 자존감이 박살나는 건 아마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는 될 수 없어서일 것이다. (…)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특별히 예술적인 직업을 가지기에 나는 너무 평범한 사람인가? (…) 완벽한 테크니션도, 매력적인 연예인도 아닌 나는 도대체 어떤 강점을 갖고 살아남아야 하는 연주자인가?

◎64쪽 #음악가를 수식하는 단어

나는 ‘멍청한 음악가’가 되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써왔다(무식한 딴따라는 되지 말라는 어른들 말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똑똑하고 봐야 한다 생각했던 나는 일단 학교를 열심히 다녀 학사, 석사 학위를 따고 여러 방면의 상식을 쌓으려 노력했다. (…) 그렇게 머리를 굴려 공부하고 연구하다 보니 결국은 학교가 직장이 됐다. (…) 교수의 업무는 가르치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월급을 받으면서도 연주를 계속할 수 있기 때문에 내 삶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123쪽 #나를 드러내기 위한 용기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면서도 스스로가 정한 기준을 지켜내며 살아가는 건, 어쩌면 고난과 고립을 자초하는 길이다. 우리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거나 덜 타협하는 사람에게 ‘사회 부적응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무척 미워하기 마련이니까. (…) 보편적인 선택 대신 ‘내 기준에 맞는’ 선택을 하려면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여러 종류의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아니, 참아내야 한다.

정리 임원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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