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카포,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라
바리톤 김기훈
음악을 전공하고, 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카포(Da Capo)’는 아주 익숙한 표현이다. 주로 악보의 마지막에 적혀 있는 음악 용어로 처음부터 다시 연주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뜻 때문에 일상에서도 비유적인 표현으로 곧잘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나에겐,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을 수 있었던 원리였다. 흔한 음악 용어 하나를 떠올리며, 나를 성장시킨 ‘처음’에 대해 돌아보고자 한다. 우리에게 ‘처음’이라는 단어는 괜히 큰 의미를 두게 되는 말이다. ‘첫눈’ ‘첫사랑’ ‘첫 키스’처럼, 단어가 주는 괜스러운 설렘이 있다. 그만큼 처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준다. 그래서일까. 좋든 싫든 처음의 기억은 강하게 남는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두근거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겠지.
하지만 동시에 ‘처음부터’라는 말은 반대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풍기기도한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말은 “여태껏 헛수고했다”라는 식의 의미로 다가온다. 만약 어느 날, 예컨대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라도 만나게 되어 “인생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기회를 준다”는 말을 들으면 어떨까?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한 사람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인생을 바꾸고 싶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후회하고 있는 ‘그때 그일’을 하지 않겠다는 바람이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돌아가길 꺼릴 수도 있다. 현재의 삶이 익숙하고, 다시 돌아갔을 때 반복해서 겪어야 하는 과정-예를 들면 군대에 다시 입대한다든지-이 싫은 것이다.
돌아가는 길 위에서, 성장
사실 무언가를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은 꽤 고통스럽다. 어렸을 적, 피아노 학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악보 옆에는 연습 횟수를 적을 수 있는 조그만 노트가 하나 있었다. 적혀 있는 열 번의 연습을 채워야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 개의 동그라미를 다 채우고 나면 선생님께 달려가 자랑스럽게 연습을 다 했노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방으로 찾아오셔서 연습한 내 연주를 들으시곤, 조금 모자란 것 같을 때마다 “다시 연습해오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때 느껴지는 허탈함이란. 이미 여러 차례 연습하며 열 번을 모두 해내었다는 성취감이 찾아오기가 무섭게, 무력감이 찾아오곤 했다. ‘이럴 수가. 이 지루한 연습을,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 지루한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분명 더 나은 결과물이 나왔다. 전보다 더 성장해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 놀랍게도 이런 부류의 경험은 내 인생에 걸쳐 계속됐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다시 돌아가 마치 처음 그 일을 하는 것처럼 살펴보다 보면, 안 보이던 것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어느샌가 능숙해져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
“초심으로 돌아가라.”
누구나 삶을 살아가면서, 흔히 들었던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이 당연하고 쉬운 원리를 잊으며 산다. 돌아보면 나 역시도 자꾸 요행을 바라게 된 순간이 있다. 유혹에 빠지면 초심을 잃게 된다. 특히나,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나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아이일 때는 가르침을 얻을 곳이 많지만, 어른이 되고 난 후에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 혹은 조언조차 들을 기회가 적어진다. 결국, 스스로 해내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더욱 자신을 ‘처음의 자세’로 바라봐야 한다.
나를 성장시킨 것은 ‘다 카포’였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슬럼프에 빠졌을 때, 심지어 성악가로서의 길을 이제 그만 포기하려는 상태까지 이르러서야 너무 당연했던 이 말이 떠올랐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을! 지금까지 내가 이뤄온 것, 해놓았던 것들이 너무 아까워서 계속 이 색 저 색을 덧칠해 수습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새 도화지에 스케치부터 다시 시작해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히려 덕지덕지 색깔이 묻은 그림은 점점 어둡고 지저분해지기만 했다. 다시 깨끗한 새 도화지를 꺼내 들었다. 밑그림부터 차근차근 그어나가자 깨끗한 그림이 그려졌다.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시간을 가르침 삼았기 때문이다.
막막한 순간들은 지금도 나를 찾아온다. 슬럼프에 빠지는 것 같을 때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시작하곤 한다. 노래하기 위한 기초적인 부분부터 확인한다. 호흡, 발성, 공명. 기본적인 것들로부터 시작해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 시간을 보내고 나면, 항상 한 단계 성장해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슬럼프’로 느껴지는 시간이 두렵지 않다. 그때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면 된다. 계속 다져나갈수록, 나는 더욱더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방황하는 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면 어떨까. ‘처음’
을 생각해본다면, 해결하지 못할 것처럼 느꼈던 문제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록 첫눈처럼 설레는 ‘처음’은 아닐지라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또 후회를 해야 해
어디서부터 망한지를 몰라
다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해야해
근데 다시 또 생각해봐도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어
아빠 내가 그 탕자인가봐요
And You’ll Say No
혁오 ‘멋진 헛간’
글 김기훈
김기훈(1991~)은 연세대 음대, 독일 하노버 음대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오페렐리아 콩쿠르에서 2위를 수상했으며 지난해 BBC 카디프 싱어 오브더 월드 아리아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 우승했다. 3년간 하노버 슈타츠오퍼 솔리스트로 활동한 바 있으며, 2021/22 시즌 뮌헨 바이에른 극장·바르샤바 국립 오페라 극장·샌디에고 오페라 하우스 등에서의 오페라 공연을 예정하고 있다
일러스트 임주희
피아니스트 임주희(2000~)는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로버트 맥도널드를 사사하고 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취미로 그리는 그림을 SNS에 올리는 등 대중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인 젊은 연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