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2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
위대한 스승과 걸출한 제자
피아노의 거장 알프레드 브렌델의 발자취를 좇으면서도 자신만의 개성 구축한 그의 이야기
애초부터 객관적인 잣대를 적용하기가 불가능한 음악에서, 등위를 가려낸다는 것이 얼마나 무리수인지. 직접 콩쿠르를 참가해 보고 또 그들에 대한 평가를 내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감한다. “콩쿠르는 하나의 시작일 뿐이다.” 이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대회의 최종 승자에게서 나오는 흔한 소감인데, 성공을 거둔 사람의 의례적 표현이 아닌 철저한 ‘팩트’다.
굳이 더 설명하자면 대회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저 시작이 아닌 ‘매우 어려운’ 시작이다. 지금도 여전히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대중음악의 각종 대회나 오디션에서 온갖 난관을 뛰어넘어 1위를 차지한 가수를 보자. 뜨거운 조명이 그 위로 쏟아지지만, 그가 서 있는 자리는 그저 경력의 시작, 그것도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충분히 경험하고 난 뒤에 전혀 새로운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관객 앞에서의 시작이다.
조금 다른 시작
그 자리가 쉬울 리 없지만, 그렇다고 콩쿠르나 경연대회를 통하지 않은 음악가의 시작이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제 50대에 들어선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1972~)의 경우, 그 어려움은 다름 아닌 스승 알프레드 브렌델(1931~)의 이름이었다.
리버풀의 비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난 피아니스트가 소위 유명 콩쿠르에서의 경력도 별로 없이 30대 초반부터 하이페리언·아르모니아 문디 등의 레이블에서 음반들을 냈다는 사실부터 브렌델과 유사하며,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자신의 입지를 흔들리지 않는 질감으로 굳혀 온 루이스의 행보에는 드러나지 않은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프로필 속 자신의 이름 바로 뒤에 따라 오는 브렌델의 존재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루이스는 어렵지만 당당한 정공법을 택했는데, 바로 스승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따라 가는 행보를 취한 것이다. 베토벤과 슈베르트, 두 인물은 브렌델이 평생 음악가로서의 생명을 걸었던 작곡가들이었고, 루이스도 충실히 그 길을 걷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루이스의 색깔은 스승과 밑바탕부터 차별화된 느낌을 보인다. 단단한 뿌리가 느껴지는 속도감 위에서 담백한 음색을 통해 정신성을 강조했던 브렌델의 베토벤과 비교해, 루이스의 해석은 유려한 프레이징과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비르투오시티의 발현’이 특징이다. 슈베르트의 경우도 흥미롭다. 서정성을 바탕으로 드라마를 형성하는 가운데 남성미를 발휘하는 것이 브렌델이라면, 루이스의 슈베르트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스케일의 확장과 축소를 순발력 있게 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특히 슈베르트를 다루는 루이스의 음반 작업은 예전의 베토벤 녹음과 조금 달리 진행되고 있다. 베토벤의 32개 소나타는 2005년경부터 시작해 응집된 느낌으로 전집을 완성했는데, 슈베르트의 작품들은 마크 패드모어(1961~)와의 가곡 연주를 시작으로 다른 작곡가와, 다양한 형식의 작품과 함께 구성해 다분히 여유 있는 호흡으로 관객에게 다가가는 중이다.
어긋나지 않은 기대
금호아트홀 ‘아름다운 목요일’ 시리즈로 이어질 폴 루이스의 슈베르트 공연은 차분하고 다분히 관조적인 자세로 서서히 익어가는 중년의 음악세계가 기대된다. 이미 대부분의 곡을 녹음했으나 무대에서 자연스레 뜨거워지는 루이스의 퍼포먼스는 음반으로 예습을 마친 청중에게도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작년 9월 이뤄졌던 첫 번째 슈베르트 독주회는 세상을 떠난 동료 피아니스트 라르스 포그트(1970~2022)를 추모하는 무대 위의 전언과 함께 경건한 분위기로 시작됐으나 청중은 이내 강한 집중력과 생동감으로 슈베르트의 음표를 읽어내는 루이스의 연출력에 빠져들었다. 1817년 작곡된 일련의 소나타 중 세 번째인 7번은 우아한 분위기가 지배적인 곡인데, 루이스의 연주가 여기에 슈베르트 특유의 율동감을 한 숟갈 얹어 즐거움을 만들어냈다. 한 호흡으로 깔끔하게 처리한 2악장과, 짙은 노스탤지어를 음반보다 더 강조했던 4악장 등에서 다양한 의미를 풍겼다.
이어졌던 소나타 14번은 길지 않은 3악장 구성이지만 확대된 비극성과 내재된 힘으로 인해 ‘대 소나타’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시종 넘치는 비장미를 적극적으로 뽐낸 루이스의 해석은 정중동의 느낌이었다. 터치의 무게감을 통해 작품의 규모와 스케일을 암시하며 유장한 흐름을 나타낸 1악장, 은근한 서정성을 통해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효과적으로 드러낸 2악장과 슈베르트가 상상한 기교적 화려함을 과도하지 않게 표현해 음악적 포만감을 선사한 3악장까지. 루이스는 거침없고 홀가분하게 자신을 작곡가에 투영시키고 있었다.
후반부에 연주했던 소나타 17번은 교향곡 9번을 창작한 직후 만들어져 작곡가의 구상이 관현악적 규모로 커진 난곡이다. 예전부터 이 소나타를 즐겨 연주해 온 루이스의 타건은 확신에 넘쳤다. 과장 없는 루바토와 팽팽하게 조정된 리듬감을 통해 명인의 기를 드러낸 1악장과 코랄 풍의 악상을 외향적으로 그려낸 2악장, 절제된 페달링을 통해 고전파적인 음향을 명쾌하게 나타낸 3악장과 사랑스러운 악상의 변화들로 만들어지는 음영 있는 표정들까지 정교하게 설명해낸 4악장. 그의 연주는 부담 없는 완숙함으로 다가왔다.
겨울의 끝과 맞닿은 프로그램
슈베르트와 루이스의 두 번째 만남이 다가온다. 소나타 13번·15번·16번를 들려줄 이번 프로그램 역시 작곡가의 다양한 표정이 공존하는 흥미로운 내용이다. 첫 곡으로 연주될 소나타 15번 ‘유물’은 두 악장의 미완성작이다. 작곡가의 수많은 미완성작품 가운데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유물’이라는 매력적인 별명으로 불린다. 단순해 보이지만 다채로운 뉘앙스와 전조, 주제의 발전에서 후대를 예견케 하는 1악장과 자유로운 변주를 통해 음향의 확장을 꾀하는 2악장은 불완전하게 남아있는 나머지 두 악장이 없이도 훌륭하다.
순수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선율미로 많은 팬을 가진 명품 소나타 13번이 두 번째 곡이다. 선배 작곡가들의 영향에서 온전히 벗어난 듯 맑은 서정성이 전체를 감싸는 1악장, 청초하면서도 종교적인 느낌마저 선사하는 2악장을 지나 자유분방한 악상과 탄력 있는 리듬감으로 낭만적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3악장까지. 이 곡의 악상은 어느 곡보다 독창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겠다.
슈베르트가 특별히 사랑한 16번이 대미를 장식한다. 강렬한 1주제와 발랄한 2주제가 흥미로운 내용을 전개하는 1악장, 소담스러운 주제로 시작해 풍부한 환상의 변주를 전개하는 2악장, 내제된 리듬감이 오히려 더욱 강한 인상을 남기는 스케르초의 3악장과 즉흥곡적인 악상이 솔직한 열정을 그려내는 4악장은 일필휘지로 악보를 써 내려갔던 천재의 매력적인 단면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선하고 순수하지만, 내면의 바닥에는 결코 지울 수 없는 고뇌와 외로움이 새겨져 있는 슈베르트의 피아니즘은 그 양면성으로 인해, 듣고 경험할 때마다 슬픔과 환희가 묘하게 뒤섞인 감성을 던져준다. 여전히 봄은 조금 멀리 있지만, 루이스의 손끝을 통해 슈베르트가 꿈꾸었던 따뜻한 봄날을 느낄 수 있기를.
글 김주영(피아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금호문화재단
Performance information
폴 루이스 독주회
2월 9일 오후 8시 금호아트홀 연세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3·15·16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