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우리 젊은 90년대

넓고, 빠르고, 다양했던 1990년대 우리 클래식 음악계 풍경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4월 3일 12:00 오전

음반 한 장

송준규(음악 칼럼니스트)

내가 압구정에서 본 일이다.

젊은 대학생 하나가 음반매장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1만 원짜리 지폐 세 장을 내놓으며 말했다.

“황송하지만 이 돈으로 톱 음반 한 장 살 수 있는지 좀 보아주십시오.”

그는 마치 금제통화기금의 발표를 기다리는 장관처럼 전장 사람의 입을 쳐다본다. 매장 직원은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돈을 세어보고는 “좋소” 하고 내어준다.

그는 “좋소”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돈을 받아 베네통 외투 주머니에 깊이 집어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고 간다. 그는 삐삐를 자꾸 꺼내 돌아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음반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코트에 손을 찔러 넣고는 한참을 꾸물거리다 다시 지폐들을 꺼내며,

“이것으로 정말 유니버설 톱 한 장 살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매장 직원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참 바라본다.

“이 돈을 어디서 주웠어?”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러면 달러라도 환전했단 말이냐?”

“요즘 세상에 누가 달러를 길에 흘린단 말입니까? 환율이 천장 꼭대기에 올라간 요즘에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대학생은 손을 내밀었다. 매장 직원은 웃으면서

“좋소” 하고 돈을 건네주었다.

그는 얼른 돈을 지갑에 넣고 매장을 둘러보았다. 진열대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얼마를 허덕이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조심스럽게 노란 딱지 음반 하나를 꺼내 만져보았다. 거친 손가락이 음반 표지의 대머리 지휘자를 지그시 누를 때 그가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찾다가 외진 구석에서 빨간 음반 하나를 찾더니 자리에 앉아 이리저리 살펴본다. 얼마나 열중했는지, 내가 가까이 간 것도 모르는 듯했다.

“뭘 그렇게 찾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찔하면서 음반을 제자리에 놓았다. 그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 했다.

“염려 마십시오. 그거 살 돈 없습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한참 머뭇거리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것은 제가 꼭 사고 싶은 음반입니다. 그런데 요즘 음반 가격이 너무 올라 엄두도 못 냈습니다. 아버지도 명퇴하셔서 저 같은 놈에게 떨어질 용돈 따윈 없습니다. 아르바이트 자리도 없습니다. 나는 ‘객석’을 한 달 한 달 동냥질로 보면서 사고 싶은 음반 하나를 골랐습니다. 버스비를 한 푼 두 푼 아껴 이 귀한 만 원짜리 지폐 세 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 세 달이 걸렸습니다.”

그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모았단 말이오? 도대체 뭘 살려고?”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불레즈 말러 9번이 갖고 싶었습니다.”

PC통신 동호회의 추억

최은규(음악 칼럼니스트)

음악이 좋아 음악을 전공했건만, 예고와 음대에 다니며 오히려 음악 들을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학과 공부와 악기 연습을 하고 나면 하루가 가버리니 그럴 수밖에. 매일 바이올린 연습에 허덕이던 내게 다시금 음악 사랑의 초심을 일깨워준 오아시스 같은 곳이 있었으니, 바로 PC통신 고전음악 동호회였다.

공대 친구에게 PC통신 하는 법을 배워 ‘헤레나’라는 대화명으로 처음 천리안에 접속하던 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린 듯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처음에는 동호회 게시판에 올라 있는 멋진 글을 읽으며 감탄만 하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대화방에 들어갔다. 고전음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서일까. 비록 얼굴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지만, 그들과의 대화는 술술 잘 풀렸다.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나 음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덧 취침 시간을 훌쩍 넘겼다. 채팅 때문에 잠이 부족해 다음 날 아침 조금 힘들 때도 있었지만, 음악 친구들과의 교감을 통해 활기를 얻은 탓인지 바이올린도 잘되고 글 쓰는 일도 흥이 났다.

동호회에선 한 달에 한 번 오프라인 정기 감상회도 있었지만, 더 재미있는 모임은 역시 예정에 없던 ‘번개 모임’이었다. 때로는 채팅을 하다 급히 그날 저녁 음악회에서 다같이 만나는 ‘음악회 번개’도 있었다.

동호회 활동에 빠져든 지 몇 년이 지났을까. 나는 어느새 동호회 시삽까지 맡아 모임을 이끌었고, 그때 몸담은 부천필하모닉의 연주회가 있을 땐 동호회 친구 수십 명을 초대하기도 했다. 아마도 부천필에 다니던 시절 다들 어렵다는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회를 과감하게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도 PC통신 동호회 덕분인지 모른다. PC통신 동호회를 통해 말러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이 그토록 많다는 사실을 알고 말러 공연이 국내에서 통하리라는 믿음을 얻었으니까.

요즘은 초고속 인터넷과 SNS가 발달해 같은 취미를 지닌 사람들과 더욱 쉽고 편리하게 교감할 수 있지만, PC통신 동호회 시절 파란 화면을 보며 채팅하던 정겨움을 느끼기는 어렵다. 이 시대의 인터넷이 너무나 빠르고 지나치게 개방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갑자기 그 옛날 PC통신 오프라인 모임에서 음악 친구들과 브루크너 교향곡을 LD로 감상하며 한식구처럼 정을 나누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국내 데뷔

1990년 1월 3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KBS 교향악단 신년음악회에 장영주가 열 살의 나이에 국내 데뷔 무대를 가졌다. 세계 악단에 샛별로 떠오른 장영주는 귀국에 앞서 주빈 메타/뉴욕 필 신년음악회에서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선보이며 여섯 차례의 커튼콜을 받았다. 주빈 메타는 “하늘이 보내준 음악의 천사”라는 말로 그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한 공연에서 장영주는 KBS 교향악단과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를 협연했다. 비교적 난해한 기교를 요하는 이 작품을 훌륭하게 완주한 그녀의 모습은 음악 애호가들에게 ‘장영주’라는 이름을 ‘천재’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금호 현악 4중주단

1990년 5월, 금호그룹을 모태로 금호 현악 4중주단이 탄생했다. 당시 쌍용그룹이 코리안심포니, 쌍방울이 서울심포니를 지원했지만 실내악단에 대한 지원 사례는 드물었다. 초창기 금호 현악 4중주단은 파격적인 대우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1993년부터는 한양대 교수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의명이 리더를 맡았는데, 단원 임명과 레퍼토리 선정에 대한 모든 권한을 리더에게 일임해 자율성을 보장해주었다. 당시 대부분의 실내악단이 서울에서 활동한 반면, 금호 현악 4중주단은 지방 연주가 훨씬 많았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2002년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은 해단을 발표한다. 창단 이래 멤버가 아홉 차례 바뀌는 등 잦은 구성원 교체가 해단의 직접적 이유로 떠올랐다. 당시 김의명 교수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솔리스트로 대성하기를 원하는 젊은 연주자들이 실내악단 활동을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당시 상황을 두고 음악계에서는 앙상블보다 솔로가 우대받는 국내 음악계 풍토에 대해 음악인들이 먼저 자성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음악 잡지 삼국시대

장일범(음악평론가)

“책상 덮어라!”

편집차장이 장난스럽게 소리친다. ‘음악동아’ 기자가 사무실에 놀러 왔기 때문이다. 인쇄소에 가기 전 최종본 대지가 기자들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는데, 타사 기자가 기사를 볼까 봐 정보 노출을 조심하라는 반농담이었다.

내가 ‘객석’ 기자였던 1990년대는 음악 잡지의 ‘뜨거운 전쟁’의 시대였다. 1980년대부터 이어져온 ‘객석’과 ‘음악동아’ 양강 체제에 새로운 레이아웃과 해외 번역 기사, 만만치 않은 자금력을 앞세운 ‘월간음악’이 시공사에 의해 1990년대 중반 창간되었고, 객석의 몇몇 선배 기자들이 ‘월간음악’으로 옮길 무렵 난 ‘객석’ 기자로 입사했다.

그땐 다른 경쟁지의 표지 아티스트가 누구인지 서로 엄청난 촉각을 곤두세웠고, 서로의 서점 판매부수에 대해 무척 신경 썼으며, 경쟁이 상당히 치열했기에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곤 했다. 기자회견장을 주도한 것도 음악 전문지 기자들이었고, 당시 일간지와 방송국 기자들은 ‘객석’ 기자들에게 많은 부분 의지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서로 보이지 않는 으르렁거림 속에서 취재하던 이른바 음악 잡지 삼국지 전체 기자들이 딱 한 번 모인 적이 있다. 우리는 “우리나라 음악계를 위해 모두 더 뛰어보자!”라며 의기투합하거나 음악계 뒷담화를 나누는 등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요즘은 음악 잡지 기자들 사이에 그런 일이 없는 것 같아 아쉽다.

가슴 아팠던 일은 ‘음악동아’와 ‘월간음악’의 폐간이었다. 이제 1990년대 같은 후끈한 국내 경쟁은 없지만, 옛 음악 잡지 삼국지 중 고군분투하는 ‘객석’이 뜨거운 취재 열기와 현장 감각을 중시한 글을 계속 실으며 전 세계 음악 잡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잡지로 성장하길 기대해본다.

음대 입시 부정 사건

1991년 1월에 발생한 음대 입시 부정 사건은 전국을 경악시켰다. 서울대 음대는 목관 전공 전체 심사위원이 돈을 받고 특정 학생들에게 좋은 점수를 줘, 입학생 여덟 명 중 네 명을 부정 입학시킨 사실이 밝혀졌다. 한편 건국대는 수험생의 실기 선생으로부터 돈을 건네받은 입시 관련 교수가 심사위원들에게 특정 학생의 청탁을 시도한 것이 알려졌다. 조사 결과 심사위원들은 돈을 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동안 입시 때마다 곪아온 의혹이 터졌기에 파장이 컸다. 당시 관악 부문 연주자들이 대거 연루되면서 중견급 음악인 28명이 구속되고 여섯 명이 입건됐다. 이에 서울대 음대 교수들은 외부 레슨을 하지 않겠다고 결의했고, 각 대학 당국은 1992년 입시부터 실기 비율을 낮추는 등 부정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한편 이 사태가 음악계에 미친 충격은 상당했다. 연주자가 구속되어 몇몇 음악회에 차질이 생겼고, 악기 상가와 음악학원은 매출이 기존 대비 30~40% 줄어드는 불황을 떠안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개교

1993년 3월, ‘국내 첫 콘서바토리’인 한국예술종합학교가 탄생했다. 2년 전 입시 부정 사례가 폭로되면서 한 차례 진통을 겪어야만 했던 예능계에 대한 대책으로 ‘콘서바토리’라는 제도를 문화부에서 제시한 것. 그동안 잘못된 예능 교육을 바로잡자는 취지에서 출범한 한국예술종합학교는 과열 경쟁에 의한 입시 부정을 지양하고 올바른 실기 전문가 양성을 내세웠다. 이러한 의도 아래 새롭게 실시한 예술영재선발시험에서는 원서 교부 첫날 200장의 원서가 팔리면서 사회 전반의 비상한 관심을 가늠케 했다. 하지만 자칫 하나 둘 있을까 말까 한 어린 영재를 뽑기 위해 마련한 장치가 오용된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소극장을 달군 작은 오페라

이용숙(오페라 평론가)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독일에서 공부하고 서울로 돌아올 때 가장 아쉬웠던 건 현지 오페라 공연이었다. 독일에 사는 동안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다닌 크고 작은 유럽 오페라극장의 재미와 감동 넘치던 공연들은 그저 추억으로 남을 거라 생각했다. 독일에 가기 전에도 국내에서 오페라 공연을 더러 보긴 했지만, 제작진의 열정에 비해 무대 기술이나 연기 면에서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한 무대가 많아 오페라에 큰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0년대 한국 오페라에 놀라운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졌다. 어색한 번역 텍스트로 노래하는 시대가 저물면서 한글 자막이 첨부된 원어 공연이 일반화되었고, 이와 함께 소극장오페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다. 이탈리아어나 독일어 오페라를 한국어로 공연하더라도 시대 배경과 상황을 우리 실정에 맞게 바꿔놓은 번안 작품이어서, 어색함은 줄어들고 재미는 커졌다.

소극장오페라축제를 주도해온 예울음악무대(예술감독 박수길)와 서울오페라앙상블(예술감독 장수동)이 각각 1993년, 1994년에 창단되었다. 이들과 함께 소극장오페라운동에 참여한 여러 오페라단 공연은 17세기 유럽 오페라 탄생기의 ‘극 중심 소극장 공연’ 형식을 되살려 창의적이고 알찬 무대로 관객에게 오페라의 즐거움을 일깨워주었다. 1995년에 시작된 국립오페라단(단장 박수길)의 ‘오페라 스튜디오’ 공연들 역시 참신한 연출과 매혹적인 음악으로 당시의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관객을 열광시켰다. 한국소극장오페라연합회가 결성되어 1999년에 본격적으로 소극장오페라축제를 시작했을 때도 무대는 같은 곳이었다.

1988년에 음악당을 개관한 예술의전당이 1993년 오페라극장을 개관하면서 한국의 오페라 풍경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규모가 큰 공연은 오페라극장에서 이루어졌지만, 모차르트·슈베르트·브리튼의 작품처럼 중소극장 규모에 맞는 오페라들이 당시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조성진의 연출로 토월극장 및 자유소극장 무대에 올라 관객에게 기쁨을 주었다.

소극장오페라축제는 지난 16년 동안 우리 오페라 관객이 흔히 만날 수 없는 바로크·고전주의와 현대 오페라 및 창작 오페라 레퍼토리를 꾸준히 연구해 선보였지만, 국가·기업의 관심과 지원 부족으로 초창기 의욕과 생동감을 유지하기가 갈수록 힘들어 보인다. 예술의전당은 현재의 CJ토월극장이나 자유소극장을 얼마든지 소극장오페라 무대로 활용할 수 있는데도 바로크오페라나 현대오페라 레퍼토리 개발과 제작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향한 활력과 희망으로 가득하던 1990년대 오페라 풍경이 새삼 그리워지는 이유다.

예술의전당 축제극장 개관

예술의전당 축제극장이 1993년 2월 15일 개관했다. 1988년 음악당과 서예관이 문을 열고 1990년에 미술관과 예술자료관이 2차로 준공된 데 이어 토월극장·자유소극장·오페라극장으로 구성된 축제극장이 개관하면서 예술의전당을 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됐다. 축제극장은 당시 정권이 바뀌기 이전 노태우 대통령이 테이프를 끊어야 한다는 이유로 정권 이임 10일 전에 개관했는데, 무대장치가 완전히 설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개관한 결과 6개월여간 휴관하고 10월에 재재관했다. 2월 오페라극장 개관 기념 공연으로 국립오페라단이 홍연택의 ‘시집가는 날’, 오페라상설무대가 베르디 ‘포스카리가의 두 사람’, 김자경오페라단이 비제 ‘카르멘’을 창단 25주년 기념 공연을 겸해 올렸다.

슈라이어와 리흐테르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린 이후 공연계에서도 문호가 개방되면서 당시 음반으로나 듣던 외국 음악가들이 하나 둘 내한 공연을 가졌다. 그런 까닭에 1990년대의 클래식 음악 공연계는 한마디로 신천지와도 같았다. 외국 연주가들의 공연 횟수가 아직 많지는 않았던 탓에 공연 하나하나가 피를 말릴 정도로 절실했고, 그들의 연주에 절박함을 게워냈다.

기업 협찬과 가열찬 마케팅, 홍보를 통해 사설 매니지먼트들이 승부를 겨루며 경쟁하는 지금의 분위기와 달리, 대부분 메이저 신문사가 주관하거나 극소수 기획사와 음악 잡지가 가까스로 공연을 주최했다. 불과 20여 년 만에 매일이 힘들 정도의 훌륭한 연주회가 열리는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90년대는 아직 프로페셔널한 매니지먼트가 없던 탓에 대규모 오케스트라 공연보다는 아무래도 비용이 적게 드는 독주자 공연이 많았고, 그 면면 또한 전설적 예술가가 많았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연주자의 공연을 회상해본다.

가장 먼저 1993년 10월 21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독일 테너 페터 슈라이어의 첫 독창회가 기억난다. 발터 올베르츠의 피아노 반주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전곡을 연주한 그날의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강렬했다. 첫 곡에 천장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와 살짝 당황했지만 다행히 곧 전원이 꺼졌고, 이후 슈라이어의 목소리는 매 순간 경이로움을 연출해냈다. 특히 ‘까마귀’에서 그 충격적인 의성어식 딕션과 ‘거리의 악사’에서의 절망감은 이 작품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연주회가 끝난 뒤 2·3층 청중이 모두 1층으로 내려와 홀이 떠나가라 기립박수를 쳤고, 앙코르가 이어질수록 그 환호는 점점 더 커졌다. 이후 그는 두 번 더 내한했지만, 이 첫 번째가 가장 영광스러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두 번째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한 공연을 가진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의 1994년 4월 2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독주회. 정명훈이 지휘하는 바스티유 오페라와 공연을 하고 이틀 뒤 열린 리사이틀이었다. 살아 있는 전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몰려온 두근거림과 흥분은 클라우디오 아라우 내한 공연 때보다 더 컸다. 홀의 불을 모두 끄고 오직 피아노 앞에만 조명을 밝힌 채 악보를 보며 연주를 시작한 리흐테르. 당시 한국 청중에게는 매우 생소한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1부에서는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2번과 스크랴빈 소나타 7번, 2부에서는 라벨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와 ‘거울’을 연주했다. 그런데 워낙 흥겹고 다이내믹한 4번 ‘어릿광대의 아침노래’가 끝나니 박수가 쏟아졌고, 이에 리흐테르는 인사를 하고 무대 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후 다시 무대로 나와 5번 ‘종의 골짜기’를 앙코르처럼 연주하고 연주회를 마무리했다.

만년의 리흐테르는 앙코르를 잘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그날 ‘거울’을 온전히 끝낸 뒤 박수가 나왔다면 한 곡 정도 앙코르를 기대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방한할 줄 알았던 리흐테르는 결국 다시 오지 못한 채 1997년 8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음반 전성시대

황지원(음악 칼럼니스트)

그땐 귀한 음반 한 장을 구하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대학로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피렌체 극장 실황 음반을, 종로의 대형 서점에서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직수입 염가 음반을 무더기로 구입했다. 압구정 일대를 돌며 메이저 레이블의 최신 CD를 꼼꼼히 살펴본 후, 명동과 회현상가에서 푸르트벵글러며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의 값비싼 원판 중고 LP에 군침을 흘리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1990년대는 확실히 ‘음반’의 전성시대였다. 박물관에서나 들을 법한 초기 SP 복각반부터 첨단 녹음 기술로 무장한 당대 최고 스타들의 녹음까지, 선택지는 너무도 다양했고 챙겨 들어야 할 음반도 넘쳐났다. 교향곡은 카라얀, 피아노는 폴리니, 오페라는 파바로티, 나폴리 민요는 디 스테파노 식으로 장르별 대표 아티스트의 음반 몇 종만 라이선스로 소개되던 이전 세대와는 확실히 달랐다. 클래식 음악이 하나의 온전한 생활 취미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아마 이때쯤일 것이다. 공연계 안팎에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젊은 관객층이 많은 나라’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우리도 곧 선진 공연 문화 대열에 합류할 것이라는 기대 섞인 평가도 있었다. 음반에 대한 폭넓은 향유가 공연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레 흘러가는 일종의 선순환 구조도 이때 만들어졌다.

그러나 10년 사이 세상은 바뀌었다. 이제 더 이상 ‘음반’은 나오지 않는다. 2005년 EMI 클래식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스튜디오 녹음 오페라 시대의 마지막을 알리더니, 2012년에는 아예 레이블 자체가 없어졌다. 베를린 필이나 빈 필도 이제 스튜디오 녹음은 하지 않는다. 메이저 음반사의 순수 신보는 1년에 몇 장 수준이고, 대개는 과거의 유명 음반을 재포장해 판매하는 것일 뿐이다.

요즘은 유럽과 미주의 공연 현장으로 직접 날아가는 애호가들이 많다. 거기서 발견한다. 본고장에서는 철저히 ‘음악(공연)’이 먼저고 ‘음반’은 보조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기반이 약했던 우리는 음반 시장이 멈춰 서자 공연 시장도 얼어붙었다. 음반이 없어 표가 안 팔리는 솔리스트보다 기업 협찬에 유리한 오케스트라만 한국을 찾는 실정이다. 공연장의 젊은 관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배기량 큰 대형 자동차와 이른바 VIP 마케팅 초대 고객이 메우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1990년대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넘쳐나는 음반과 정보 속에 마치 세계 음악계가 우리 바로 옆에 있는 듯한 들뜬 기분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그 꿈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마주친 현실은 참혹했다. 만성적인 불경기와 사회 불안, 공연 시장의 침체, 음반 산업의 붕괴 등.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우리의 1990년대가 한층 아름답게 채색되고 있는 듯하다. 마치 오스트리아 제국이 완전히 붕괴된 후 호프만스탈이 과거의 향수에 젖어 지극히 섬세한 연애담인 ‘아라벨라’를 써 내려간 그런 심정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누구에게는 실체 없는 환상일 수도 있겠고, 누군가에게는 아련한 추억의 대상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우리의 1990년대는 참으로 나른하고 달콤한 ‘꿈같은 시절’이었다.

1994년, 조수미 열풍

1994년 여름, 조수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7월 16일 부산문화회관, 7월 18·20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공연 티켓은 공연 10일 전에 완전 매진됐다. 티켓을 구하지 못한 팬들의 성화로 예정에 없던 23일 서울 앙코르 공연을 추가했지만 이 역시 발매 4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조수미의 공연은 ‘꽃·사랑·새·고향’이라는 네 가지 테마 아래 한국 가곡을 엮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이는 10여 년간 외국 무대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그녀가 벨칸토 창법으로 우리 가곡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주목이기도 했다. 공연 한 달여 뒤, 내한 공연과 같은 레퍼토리로 삼성나이세스가 발매한 음반 ‘새야 새야’는 출반 3개월 만에 10만 장을 돌파해 ‘올해의 베스트셀러 클래식 음반’으로 떠올랐다. 당시 국내에서 발매한 클래식 음악 CD 중 10만 장 넘게 팔린 것은 조수미의 ‘새야 새야’가 처음이었다.

금난새&청소년 음악회

1994년부터 예술의전당과 공동 기획으로 시작된 ‘금난새와 함께 떠나는 세계의 음악여행’은 상당한 관객 호응을 이끌어내 4년 연속 전석 매진으로 예술의전당 음악당 개관 이래 최고의 기록을 수립했다. 이후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는 지방 곳곳으로 퍼져 나가며 금난새에게 ‘클래식 음악 공연 흥행사’라는 수식어를 더해주었다.

사서함, LP 그리고 클래식 FM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손수 운전 급증, 오디오 문화 개성화, 라디오 실지 회복.” “TV에 밀려 방송의 사각지대를 헤매던 라디오가 고음질 음악방송을 통해 매체를 살리고 있다.”

1990년의 한 일간지 기사의 제목이다. 자가운전과 음질의 강조로 클래식 음악 청취자에게 어필했던 1990년대 클래식 FM 라디오가 있는 풍경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KBS 1FM이 1979년 개국했으니, 1990년대는 10년이 더 지난 정착기였다. 이른 아침인 6시에 바로크 음악을 들려준 것은 요즘과 다르지 않다. 당시의 프로그램 제목은 ‘새아침을 FM과 함께’였다. 아침 7시대 출근길 프로그램은 ‘오늘도 명랑하게’로 현재의 ‘출발 FM과 함께’와 비슷한 편성이었다.

아침 9시의 ‘가정희망음악’은 밤 9시 뉴스를 담당하던 신은경 앵커가 맡아 아침과 밤 둘 다 반가운 목소리로 자리매김했다. 김세원 아나운서의 편안한 목소리도 이 프로그램에서 들을 수 있었다. 오전 11시에 ‘클래식 광장’이 있었을 땐 김범수·최영섭 등이 진행을 맡았다. 정오에는 ‘한낮의 음악실’이 방송되었는데 1995년에는 ‘KBS 음악실’이 신설돼 한국인 연주자들의 연주를 집중 방송했다. ‘클래식 광장’이 없어진 뒤 김범수 진행자가 ‘음악의 산책’으로 오후 2시를 책임졌다. 퇴근 시간대인 오후 6시에는 ‘FM다이얼’에서 이미선 아나운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클래식 음악과 가벼운 크로스오버를 틀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저녁의 클래식’으로 이름이 바뀌어 유정아 아나운서를 비롯해 정세진·이미선 아나운서가 진행을 맡았다. 여전히 클래식 음악 소품과 크로스오버를 틀었고 ‘오늘 저녁 이 한곡’ 코너에서는 주제를 정해 관련된 음악을 들려주었다.

오후 8시에는 ‘세계 음악의 현장’이 방송되었다. 지금의 ‘FM 실황음악’이다. 허영한 교수나 황성호 교수가 진행을 맡았다. 그 당시엔 쇼팽 콩쿠르·차이콥스키 콩쿠르·잘츠부르크 페스티벌·베르겐 페스티벌 실황 등이 귀중했다. 음악평론가 한상우·홍승찬·정만섭 등이 생생한 실황중계 해설로 활약하기도 했다.

밤 10시의 본격 음악감상 프로그램 ‘명곡의 전당’은 조성진·김춘미 등이 진행했고, 새벽 1시에는 ‘당신의 밤과 음악’이 청취자의 감성을 파고들었다. 이후 ‘당신의 밤과 음악’은 1991년에 젊은 청취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밤 10시대로 옮겨졌고, 1993년에는 2시간으로 확대 편성됐다. 1990년대는 LP의 끝과 CD의 전성기가 겹쳐지던 시절이었다. 클래식 FM에서도 LP와 CD를 함께 틀었다. 같은 곡이면 잡음의 부담이 적은 CD를 택하게 되면서 LP는 점차 줄어들었다.

KBS 클래식 FM의 김혜선 PD는 1990년대의 클래식 FM이 “클래식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채널이자 음반과 정보, 클래식을 선도하는 리더였고 보증수표였다”고 회고했다.

“지금은 클래식 음악을 접하는 채널이 다양화됐어요. 좀 더 개인적으로 음악을 듣는 문화죠. 음악이 사적인 공간처럼 여겨지는 것 같기도 해요.”

1990년대의 청취자들은 방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엽서에 사연을 적어 사서함 앞으로 보냈다. 신청곡을 받는 것도 80~90%는 사서함으로 받았다. 그 외에 PC통신이나 팩스로도 신청곡이 쌓였다. 시간을 들여 당도하는 엽서에는 ‘기다림’이 깃들어 있었다. 지금은 ‘다시듣기’가 있어 편리하지만 실시간 본방 사수의 간절함은 사라졌다. 이 글을 쓰며 띄워놓은 모니터 위의 KBS 라디오 콩(Kong) 프로그램 창에는 이 순간에도 청취자의 사연들이 깜빡이며 뜨고 있다.

안네 조피 무터의 90’s

1997년 11월, 안네 조피 무터는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만으로 구성된 레퍼토리로 첫 내한 공연을 가졌다. 1995년 남편과 사별한 후 1996~1997년을 아예 ‘브람스 연주의 시즌’으로 정한 듯 전 공연을 브람스 소나타로 꾸몄다. 3년 전까지만 해도 “현대음악은 창조적 욕구를 발산시키는 절실한 통로”라는 말과 함께 대부분의 독주회에 약방의 감초처럼 삽입하던 현대곡도 연주하지 않았다. 무터의 이러한 경향에 대해 음악계에서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그가 사색적인 브람스에 천착하는 현상에 대해 남편 분더리히의 죽음 이후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는 입장, 그리고 중견 연주자의 길로 접어들면서 한 작곡가씩 집중적인 연구를 하기 시작한 ‘긍정적인 현상’으로 보는 경향이 대립했다. 그러나 정작 무터는 단지 자신의 음악 세계를 더 깊고 넓게 만드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며 담담한 심경을 전했다.

“자신의 장르를 고정시키는 것만큼 지루한 일은 없어요. 나는 내 음악 세계가 끊임없이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곡을 연주하고 녹음하는 것 못지않게 과거에 녹음했던 곡들을 다시 꺼내 음미해보려 합니다. 그만큼 내 음악 세계가 변화했기 때문이죠.”

‘바흐를 감전시킨’ 바네사 메이

이상민(워너뮤직 클래식 마케팅 부장)

1990년대 중반. 큰 인기를 끈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배경이 된 바로 그 시대. 그녀는 홀연히 예고도 없이 우리 곁에 놀라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우리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은 당연히 바이올리니스트로 알고 있을 때다. 하지만 그녀의 데뷔 음반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고, ‘바이올린 플레이어’였다. 기존 ‘바이올리니스트’들과는 확실히 다른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긴 음반 타이틀인 셈이다.

게다가 앳된 그녀가 들고 있던 건, 우리가 흔히 보던 그 바이올린이 아니었다. 전기 코드를 꼽을 수 있는 잭과, 사운드를 증폭시킬 수 있는 다이얼을 가진, 이전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전자 바이올린’이었다. 더구나 음반보다 먼저 눈에 띈 포스터는, 물에 젖은 흰 원피스를 입고 바닷속에 들어가 있는 그녀의 도발적인 모습을 담고 있었다.

처음 그녀의 포스터를 접하고는, 과연 이 포스터를 도시 곳곳에 붙이는 것이 100년 전통의 EMI 클래식이 도달하려는 지향점과 부합하는 일인가? 하는 갈등이 잠깐 뇌리를 스치기도 했다.

그녀의 음악 또한 우리를 경악시켰다. 일찍이 위대한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바흐의 작품을 관현악으로 점잖게 편곡했을 때에도 음악계에서는 바흐의 성스러운 작품을 훼손했다며 ‘아우성’이었는데, 이 겁 없는 소녀는 바흐의 신성한 작품에 ‘전기를 꽂아’ 그만 바흐를 ‘감전’시켜버린 것이다.

하지만 ‘전기를 꽂은 바흐’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단박에 그녀의 음반은 베스트셀러 차트를 석권했고, 그녀가 연주하는 토카타와 푸가는 ‘오늘의 날씨’는 물론 온갖 ‘스포츠 하이라이트’ 배경음악까지 꿰차며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녀의 가치도 덩달아 치솟아 바네사 메이는 당시 ‘뱅뱅’과 함께 젊은 감성을 대변하던 LG패션의 티피코시 TV 광고 모델로 덜컥 발탁되었다. 이제 하루 종일 그녀를 TV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네사 메이는 TV CF에서 ‘자유 연주자’라는 멋진 별명과 함께 전쟁편·법정편·도시편 등의 시리즈 CF를 연거푸 선보였다. 형식과 전통을 깨뜨린 ‘자유 연주자’라는 콘셉트는 지금 생각해도 훌륭했지만, 아쉽게도 티피코시가 제대로 뜬 건 그녀의 뒤를 이어 전속모델이 된 서태지와 아이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날라리 바이올리니스트’는 아니었다. ‘바흐를 감전시킨 음반’을 발매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장영주(사라 장)·미도리 등과 함께 삼파전을 벌이던 신동으로, ‘객석’이나 ‘음악동아’의 클래식 면을 장식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당시 영국 귀족 출신의 EMI 클래식 사장님도 바네사 메이를 부끄러워(?)하는 보수적인 클래식 매니저들에게, “바네사 메이가 사이먼 래틀이 말러 교향곡을 녹음할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며 그녀를 기특해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에서 떠나 있던 그녀가 돌아온 건, 놀랍게도 지난해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였다. 게다가 마치 월남 스키 부대처럼 믿어지지 않는, 태국 국가대표 스키 선수로 등장한 것이다. 이건 마치 자메이카 봅슬레이 선수들을 다룬 영화 ‘쿨러닝’처럼 놀라운 이야기였다!

알고 보니 그녀의 친아버지는 태국인. 하지만 어머니가 영국인과 재혼하는 바람에 바네사 메이와 어머니는 영국 국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올림픽 출전의 꿈’을 가지고 있던 바네사 메이가 태국 올림픽위원회를 졸라(?) 결국 친아버지 국적으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영국에는 훌륭한 스키 선수들이 너무 많아 바네사 메이의 실력으로 영국 국가대표가 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결국 그녀는 평생 눈 구경도 할 수 없는 태국에서 당당하게 국가대표 스키 선수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알파인 스키 여자대회전에서 89명 중 67위를 했는데, 넘어지지 않고 코스를 완주한 선수 중에서는 꼴찌였다. 하지만 누가 그녀의 꼴찌를 비웃을 수 있겠는가? 태국에서 스키를 가장 잘 타는 ‘쿨(cool)’한 국가대표 선수인데. 그리고 그녀 덕분에 우린 확실히 알게 됐다. 월남에 ‘스키 부대’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태국에는 확실히 ‘스키 선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1988년 가장 먼저 한국에 입성한 메이저 음반사 EMI 뮤직 코리아가 2008년 문을 닫고 한국을 떠날 때까지 20년간 가장 많이 판매한 아티스트의 정규 음반은 무엇일까. 비틀스(Beatles)도, 퀸(Queen)도 아닌 바로 바네사 메이의 데뷔 음반 ‘바이올린 플레이어’라면 믿을는지.

다가오는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긴 머리 휘날리며 슬로프를 활강하는 태국의 국가대표 스키 선수 바네사 메이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기대해본다. 만일 그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꼭 그녀의 전자 바이올린 연주는 들어볼 수 있기를. 1990년대의 뜨거운 열정을 2000년대까지 이어줄 바네사 메이의 멋진 도전을 486세대가 함께 응원한다.

“고, 고! 바네사 메이!”

조수미·신영옥·홍혜경 트로이카

1995년 홍혜경·조수미·신영옥은 세계 무대에서 한국 트로이카의 전성기를 이뤘다. 세 명의 소프라노 모두 세계적인 오페라 무대인 메트에서 주역으로 캐스팅된 것. 조수미와 신영옥은 베르디의 ‘리골레토’ 중 질다 역으로 함께 나섰다. 한국 성악가가 주역으로 더블캐스팅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1982년 메트 콩쿠르에 입상한 이후 모차르트 ‘클레멘차 디 티토’로 메트 오페라에 데뷔한 대선배 홍혜경 역시 1995년에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에서 일리아 공주 역으로 캐스팅됐다. 같은 시즌에 메트 오페라에서 주역으로 활동하게 된 세 사람 덕분에 한국 프리마돈나의 위상은 더욱 드높아졌다.

‘철의 장막’에 가린 신비주의를 풀다!

김주영(피아니스트)

정확히 20년 전, 그리고 ‘벌써’라는 부사를 붙여야 하는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행사로 서울시향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던 나는 마음속으로 몇 달 전 하늘나라로 가신, 그리고 이 곡을 참으로 좋아하셨던 외할머니를 추모했다. 당시 유학 중이던 20대 중반의 김주영은, 연습하다 인대에 염증이 생겨 꽤 심각한 치료를 받으면서도 마치 그것이 영광의 상처인 양 기세등등하던 철없는 피아니스트였다.

서태지와 룰라가 탄생하는 것을 목도하지 못했던 것이 조금 아쉬울 뿐, 나의 러시아 유학 생활은 지금껏 상당히 유익했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경험이다. 고르바초프와 옐친, 페레스트로이카(재건) 등으로 기억되는 러시아의 1990년대는 참으로 어지러운 동시에 불안했고, 여러 가지로 곤궁하기도 했지만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음악을 포함한 예술계의 상황도 빠르게 진행되는 거대한 개혁의 바람 속에 흔들리며 놓여졌고, 내 호기심도 곧 사라질지 모를 옛 소련 시대의 갖가지 자료들을 모으는 데 집중되었다. 헌책방에서 이해하기도 어려운 러시아어 책을 사 모으고, 방송국이 파산해 내다 파는 LP를 닥치는 대로 구입했다. 이 자료들은 지금도 나의 20대로 가장 빠르게 안내하는 타임머신의 열쇠다.

저물어가는 소련 시절에 전성기를 맞았거나 황혼기에 접어든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을 만나 인터뷰를 해보자는 아이디어도 이런 가운데 나왔다. 세르게이 도렌스키·타티야나 니콜라예바·빅토르 메르자노프·레프 블라센코·엘리소 비르살라제 등 기라성 같던 연주자와 교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국내 피아노 전문지에 기고하며 러시아 연주자들의 이름을 알린 당시는, 개인의 노력과 별개로 한국의 ‘러시아 붐’이 강하게 몰아칠 때였다. 적당한 신비주의를 지닌 낯선 이름의 러시아인은 탄탄한 기량을 갖추고 동구권 음악에 목말라하던 대한민국의 애호가들에게 어필했다.

연주 다음으로 많은 경험을 쌓은 일은 러시아 음악가들과 통역, 방송 등을 위해 만난 것이었다. 귀국 직후 만난 미하일 플레트뇨프와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는 공식 통역의 자격이었는데, 독특한 언행과 기행에 가까울 정도의 결벽증을 지닌 까다로운 음악가 플레트뇨프의 지근거리에서 연주자의 카리스마,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와의 미묘한 역학관계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는 최초의 민간 오케스트라라는 자부심과 솔리스트로서도 출중한 실력을 갖춘 단원들이 힘을 합친 진정한 프로페셔널이었다고 기억된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와의 만남도 잊을 수 없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 무국적자로 활동한다고 밝히는 부부의 모습에서 어디서든 당당할 수 있는 예술가의 모습이 보였고, 이어지는 마스터클래스에서는 부드럽지만 분명한 메시지로 학생들을 이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피아니스트로도 뛰어났던 로스트로포비치가 직접 피아노 반주를 하며 하이든의 협주곡 D장조를 설명하는 모습은 특유의 유머와 따뜻함으로 기억되고 있다.

해프닝도 여럿 있었다. 독특한 헤어스타일의 피아니스트 아나톨리 우고르스키를 통역할 때 ‘웃는’ 사진이라고 해야 할 것을 ‘웃기는’ 사진이라고 말해 연주자에게 방송 도중 야단을 맞은 일도 있었다. 만나자마자 ‘말을 놓자’고 해서 본의 아니게 ‘반말’ 러시아어로 방송을 했던 보리스 베레좁스키도 기억난다. 솔직하고 친절했지만 자주 예측불허의 상황을 만들어 나를 당황시킨 라자르 베르만과 나눈 다방면의 대화는 아직도 그 표정과 말투가 생각날 정도로 재미있었다.

윤이상 타계

유독 많은 거장이 타계한 1995년, 한 해의 마지막 한 달을 앞둔 11월 3일. 작곡가 윤이상이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약 1년 전인 1994년 12월 17일,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더 이상 통일운동에 관여하지 않고 음악 활동만 하겠다는 성명을 내놓은 그의 발표문 전문이 ‘객석’에 실린 지 열 달 만의 일이다. ‘객석’ 12월호에는 윤이상 추모 특별부록이 실렸다. 베를린 현지 장례식 풍경 독점 취재와 세계 음악계의 평가·윤이상의 작품 세계·대표작·음반 등을 상세히 담았으며, ‘상처 입은 용’ 인간 윤이상에 관해서도 함께 다뤘다.

어느 클래식 키드의 하루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

1996년 5월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집으로 배달된 ‘중앙일보’를 들고 케이블 채널 37번 A&C 코오롱을 틀고 등교 준비를 시작한다. 볼프강 자발리슈와 함께 오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내한 소식을 다룬 ‘중앙일보’ 이장직 음악 전문 기자의 기사를 읽으며 버밍엄 심포니 감독 사이먼 래틀이 현대음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켜둔 채 토스트를 먹고 집을 나선다.

등교 전, 5월에 내한하는 첼리스트 다닐 샤프란의 티켓을 사러 종각역 영풍문고로 향한다. 지금처럼 인터넷 예매가 없으니 티켓 배부처로 직접 가서 싼 티켓을 사야 했다. ‘홈티켓’이라는 ‘최첨단’ 전자발권 시스템으로 잔여석을 확인해 데이콤 용지에 도트 프린터로 찍어낸 티켓을 살 수 있고, 공연 주최 측이 배부처에 나눠준, 옵셋 인쇄에 플러스펜으로 좌석 위치를 표기한 티켓도 살 수 있다. 매장 누나는 단골손님을 위해 이벤트용 초대 티켓을 따로 빼주기도 하고 염가 구매를 위해 가장 중요한, 티켓 오픈일이 언제인지도 살짝 알려준다. 영풍에 간 김에 조금 허술하게 진열된 문고 내 음반 코너에 가본다. 보통 1만5000원에 파는 비둘프 레이블의 벤게로프 음반이 4000원에 나오 는 어처구니없는 횡재도 만난다. 시간이 되면 명동 미도파백화점 지하 메트로스테이션에 가서 최신반 청음 코너를 기웃거려본다.

학교 도서관에 들러 ‘동아일보’ 유윤종, ‘조선일보’ 김용운, ‘한겨레신문’ 정재숙 기자의 클래식 음악 기사를 읽고 ‘객석’ 박정준 칼럼니스트의 레코드 리뷰를 보다 ‘레코드포럼’ 브루크너 교향곡 해설, 아를레키노 레이블 CD도 부록으로 주던 ‘클래식피플’ 악기별 특집 시리즈를 넘기며 시간을 보낸다. 전산실에 가서는 천리안의 고전음악연구회, 나우누리의 슈만과 클라라에 접속해 유저들의 논쟁을 대략 눈팅한다.

학교 옆 휘경역에서 예술의전당 남부터미널역까지는 지하철로 2구간 350원. 수업이 일찍 끝나면 전당 안 예술자료관에 가서 공연 시작 전까지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한참을 놀 수 있다. 조수미 음원이 귀하던 시절, 1988년 서울 올림픽 문화축전 독창회 KBS 테이프도 이곳에서는 무료로 볼 수 있고, 일본의 ‘온가쿠노도모’(音樂之友) 같은 해외 음악 잡지 복사도 가능하다.

공연장에 도착하자마자 전단지를 모으고 예술의전당에서 발매한 월별 공연 캘린더를 쥐고는 공연 삼매경에 빠진다. 공연이 끝나면 길 건너편 커피집 왈츠에서 비엔나커피로 여운을 즐기거나 전통찻집 다솔에서 십전대보탕을 시키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 동네엔 공연 후에도 문을 여는 음식점이 드물다. 숙자네 부대찌개가 공연 후에도 문을 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집에 돌아와 다시 컴퓨터를 켜고 오늘 본 공연 후기가 어땠는지 살펴보고 채팅방에 들어간다.

“Robotel(한정호님)이 입장했습니다.”

“하이! 방가방가, 어솨요~.”

로스트로포비치의 따뜻한 앙코르

1996년 6월 5일, 로스트로포비치의 독주회는 예술의전당을 성당으로 만들어버렸다. 브람스 소나타 2번,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5번,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소나타,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포퍼의 ‘꼬마 요정의 춤’을 연주한 내한 공연은 감동의 연속이었다. 앙코르 연주를 위해 걸어 나온 그는 느닷없이 서툰 우리말로 “미안합니다”라고 말한 뒤 의자를 뒤로 돌려 합창석을 향해 연주했다. 합창석의 청중 중에는 이 노장의 배려에 대해, 그리고 그의 음악에 대해 눈물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어림잡아 400명은 넘는 인원이 그의 사인을 받으려고 늘어섰다.

최근 몇 년 동안 아티스트 사인회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늘어선 것은 처음이었다. 그보다 놀라운 사실은, 혼신의 연주를 끝낸 69세의 노인이 그 모든 사람에게 끝까지 사인을 해주었다는 사실이다.

KBS ‘열린음악회’ 찬반양론

1993년 5월 첫 방영을 시작으로 1990년대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내며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앞장선 KBS ‘열린음악회’. 당시 ‘열린음악회’의 파급력은 매우 컸다. 성악가들이 대중과 가까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은 물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중가수와 같은 무대에 서기를 꺼려하던 성악가들이 듀엣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등 크로스오버가 어느새 일반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열린음악회’ 열풍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적지 않았다. ‘객석’ 1995년 7월호에서는 이에 대한 찬반양론을 다뤘다.

‘열린음악회’ 김경식 PD는 “클래식 음악 공연에 대한 관객의 거부감을 줄이고 많은 대중이 무대를 찾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시선을 제시했다. 반면, 음악평론가 탁계석은 ‘열린음악회’ 열풍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클래식 음악을 제대로 접하지 않은 대중이 ‘열린음악회’와 일반적인 클래식 음악 공연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 이로 인해 일반 음악회에서 모차르트의 ‘할렐루야’가 연주될 때 일부 관객이 박수를 따라 치려고 하는 등의 해프닝이 생긴 일화를 이야기했다. 그는 “오케스트라 반주를 충실히 하고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개발하는 등의 태도와 함께 클래식 음악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정명훈의 90’s

 

1994년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직을 사임한 정명훈의 소식은, 1989년 그의 취임만큼이나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간 ‘객석’은 정치적 대립이 첨예했던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직을 둘러싼 의혹과 정황을 상세히 보도해왔다.

정명훈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감독 취임 1989년 5월, 파리오페라 이사장인 피에르 베르제는 한국의 정명훈이 바스티유 오페라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가 됐음을 발표했다. 이에 정명훈은 36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계 최정상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 됐다. (1989년 12월호)

바스티유 오페라단 내한 공연 성사, 해임 루머 발발

정명훈이 이끄는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7월 18일부터 세종문화회관 대강당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가졌다. 당시 프랑스 총선에서 사회당이 참패하고 미테랑 대통령이 수세에 몰리자, 그의 임기 중에 취임한 정명훈은 이번 계약기간이 끝나는 대로 바스티유를 떠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의 개인 비서는 “정명훈은 바스티유의 안팎으로 신뢰를 받고 있으며, 2001년까지 임기를 연장하는 계약서에 이미 사인했다”며 소문을 일축했다. (1994년 3월호)

바스티유-정명훈 간 갈등의 전말 클뤼젤 임시극장장은 각 분야 책임자를 우파로 교체하고, 적자를 이유로 직원을 감원했다. 1992년 12월 정명훈에겐 “2001년까지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 직으로 위촉한다”며 계약을 이행할 의사가 없음을 통보하며 재계약 기간을 3년 단축하고 연봉도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삭감했다. 레퍼토리나 아티스트 선정 등에 대한 음악감독 고유 권한을 제한하는 등 사실상 퇴진 요구나 다름없는 내용의 재계약을 요구했다. 이에 응하지 않을 시, 이미 체결한 계약이 무효가 될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까지 했다. 정명훈 측에서는 “예술적인 이유 없이 정치적인 압력 행사에는 굴복할 수 없다”라며 법적 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994년 8월호)

정명훈 바스티유 오케스트라 전격 해임 법정 싸움으로 번진 이 사건은 발단 3개월 만인 1994년 9월 7일, 정명훈이 바스티유 측으로부터 900만 프랑의 위약금을 받고 음악감독직에서 물러나는 것에 합의하면서 일단락됐다. 이로써 정명훈은 지난 10월 14일 ‘시몬 보카네그라’ 공연을 마지막으로 5년간 이끌었던 바스티유 오페라를 떠났다. 프랑스 언론은 해임의 부당성에 대해 보도했다. 클뤼젤 임시극장장 측은 정명훈이 협상 절차를 무시하고 내부 이야기를 바깥으로 흘려 협상을 불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명훈은 극장 측이 제시한 협상 조건은 굴욕적이었으며, 스스로 그만두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으므로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을 전했다. (1994년 9월호)

자취방 한켠, 폴리그램 달력

하종욱(음악 칼럼니스트)

 

내게 1990년대의 시작과 끝은 20대의 시작과 끝에 맞추어져 있다. 청춘이라 이름 붙일 수 있던 1990년대를 추억하는 이미지 중 하나는 클래식 달력에 관한 것이었다. 곰팡이 냄새가 가득했던 연희동의 반지하 자취방, 그리고 한여름이면 찜통 속 백숙이 되곤 했던 연남동의 옥탑방에서 습기와 열기를 머금고 1년 내내 붙어 있던 흑백의 세로형 달력이 있었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학교 앞 레코드 가게 사장님, 직원에게 사정하다시피 하여 자취방으로 모셔왔던 캘린더를 ‘성음 달력’ ‘폴리그램 달력’ ‘도이치 그라모폰 달력’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성음·계몽사·오아시스·지구·예음·금성출판사를 통해 클래식을 알았던, 그래서 취미와 취향보다는 동경에 가까웠던 나의 클래식 음악 듣기는 초라하고 빈약한 것이었다. 용돈의 큰 부분을 바치며 록과 재즈에 탐닉했던 것에 비해 스무 살 무렵의 내가 1년에 섭취한 클래식 음악은 10장 남짓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빈궁한 자취방에는 어울리지도 않던 성음 달력, 폴리그램 달력을 연례행사처럼 한쪽 벽에 각 잡고 비치했던 것은 나름의 문화적 호사였으며, 과시였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성음을 통해, 1998년까지는 폴리그램에서, 그 이후로는 유니버설뮤직에서 배급하던 도이치 그라모폰의 노란 딱지는 나와 같은 클래식 음악 초심자에게는 절대적인 신뢰와 권위였다. 1990년대 초반에는 ‘성음 달력’, 후반에는 ‘폴리그램 달력’으로 불렸던 추억의 흑백 달력에는 어김없이 카라얀이 지휘하는 사진이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목을 덮는 폴라 티셔츠에 고뇌하는 표정으로 지휘봉을 들고 있던 카라얀의 초상은 말 그대로 내가 동경으로 간직하던 클래식의 전형 그대로였다. 흑백사진임에도 멋스러운 은발은 만져질 듯했고, 깊게 눈을 감은 표정과 교묘한 각도의 손끝에서는 금세라도 베를린 필하모닉의 교향곡이 터져 나올 듯했다. 더러는 아시케나지의 미소도 있었고, 훨씬 젊은 날의 파바로티와 정명훈의 사진도 있었지만 달력의 기능을 상실한, 내 20대 자취방의 한쪽 벽은 카라얀의 예술적 고뇌가 한 해를 지켜주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1996년 겨울, 입사원서를 들고 성수동 폴리그램 사옥을 찾았던 기억은 아직도 아름다운 설렘이다. 결국 첫 번째 직장이 되고 말았던 음악 잡지사 시절, 1998년 성음의 창고에서 폐업 정리를 위해 몇백 장의 CD와 LP를 염가로 사들인 추억은 정체 모를 슬픔이다. 문득문득 추억의 모서리를 비집고 올라오는, 그 옛날 성음 달력과 폴리그램 달력 속 흑백 이미지는 공연한 답답함과 그리움으로 오늘을 괴롭히곤 한다.

90년대 해외 직구족의 회고

박성수(음악 칼럼니스트)

1990년대를 돌이켜보면, 컴퓨터 통신망 시절 우연히 찾아낸 외국 서적 판매 대행 게시판에 전화 모뎀으로 접속해 밤새도록 해외 음악 서적을 찾고 고르는 30대 초반의 필자 모습이 눈에 선하다. 새카만 바탕화면에 초록색 불빛으로 떠오르는 음악 서적의 목록을 보고 있노라면, 다음 달에 날아올 전화요금 고지서에 적혀 있을 요금 폭탄도 무섭지 않았다. 그러고는 무서울 정도로 책을 사들였다. 오로지 제목만 보고 말이다.

내게 1990년대는 음악을 보는 눈을 바꾸는 시대였다. 당시까지 우리나라의 클래식 음악 담론은 일본어에 능숙한 제1세대의 노(老) 논객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일본의 음악 서적이 우리나라 음악 담론의 창구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판도가 깨진 것이 1990년대다. 신나라와 타워레코드 같은 대형 음반점에서 영미권의 최신 음악 잡지와 음반 가이드북을 수입해 팔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라모폰’ ‘BBC 뮤직 매거진’ ‘클래식 CD’ ‘팡파르’ ‘아메리칸 레코드 가이드’ ‘펭귄 가이드’ ‘그라모폰 굿 CD 가이드’.

당시 젊은 음악 애호가들은 클래식 음악의 중심지에서 쏟아내는 최신 정보를 담고 있는 이들 잡지와 가이드북을 탐독했다. 30대 중반의 나이로 조금 늦게 그 열차에 오른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 결과 음악 담론의 중심이 일본에서 벗어나 영미권, 특히 영국으로 옮겨갔다. 그라모폰을 예로 들면, 당시 나는 이 잡지에서 활동하는 50명 가까운 평론가 중 에드워드 그린필드·로버트 레이튼·리처드 오스본·데이비드 패닝·마이클 올리버 등이 쓴 리뷰를 열심히 읽으면서 일본 편향의 시각을 교정했다. 그러나 음악을 보는 진정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온라인 서점 아마존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1998년 4월 30일 브루노 발터와 카를 뵘의 자서전을 주문한 이래 지금까지 아마존을 이용하고 있다.

클래식 음악 중심지에서 생산되는 본격 음악 서적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하면서 음악을 보는 나의 관점은 뿌리부터 바뀌었다. 어설픈 상상이나 추측을 멀리하고, 다양한 자료를 면밀히 살피는 철저한 고증과 문헌비판의 자세로 음악을 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오면서 열정으로 파고들던 1990년대의 산물 몇 가지를 번역서 형태로 출간하기도 했다. 로버트 문·마이클 그레이의 저서를 편역한 ‘데카 클래식 사운드의 모든 것’(1999), 마이클 캐넌의 ‘음악 녹음의 역사’(2005), 엘리제 마흐의 ‘우리 시대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의 삶과 음악’(2008), 그리고 리처드 오스본의 ‘카라얀과의 대화’(2010)가 그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1990년대가 끝을 맺은 걸까? 그렇지는 않다. 1990년대에 시작된 여정은 백발이 성성해진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갈 길이 아직 멀다는 것을 느끼는 2015년 2월 중순의 어느 아침이다.

밀레니엄 끝자락에서

이석렬(음악평론가)

1999년은 100년 전의 1899년과 달랐다. 1899년에 이 지구에 살았던 건 아니지만 1000년의 단위를 마무리 짓는 해의 분위기는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90년대의 끝으로 가면서 지구가 종말을 맞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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