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LG아트센터
설득력 겸비한 자유로움
음악 그 자체보다는 한참 못하지만 글이나 말로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더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한다. 경험이 쌓일수록 느끼게 되는 것이, 훌륭한 연주자들의 좋은 공연을 접할 때는 느낌표(!)를 많이 쓰게 되지만,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해석을 만나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부호는 물음표(?)가 된다는 사실이다. 늦가을에 만난 에벤 현악 4중주단의 내한 공연이 그러했다.
9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에벤 현악 4중주단은 풋풋한 청춘의 기질과 도전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는 듯한 분위기로 음악회를 시작했다. 첫 곡은 모차르트의 디베르티멘토 F장조 K138이었다. 첫 음을 시작하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단단한 팀워크와 풍부한 음악성을 지닌 수많은 현악 4중주단 가운데 ‘군계일학’을 찾는 방법이나 기준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기준이 일사불란한 호흡과 음 빛깔의 이상적인 블렌딩에 있다면, 에벤의 솜씨는 그 어느 팀보다도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 첫 곡부터 증명되고 있었다. 우아한 마무리가 인상적인 프레이징, 스피디하지만 과격함으로 향하지 않는 템포감각과 아기자기한 앙상블의 즐거움까지 작품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 노련함에서 그들의 엄청난 훈련량이 드러났다.
연주 당일에도 네 시간씩 리허설을 한다는 에벤 현악 4중주단의 연주가 피상적이거나 기계적이지 않은 이유는 작품의 굴곡을 디테일까지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멤버들의 센스와 라틴 민족의 외향적 감성이다. 이어지는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은 영화 ‘마지막 4중주’로 더욱 인기 높아진 명곡인데, 네 사람의 관점은 악보 자체에 있다기보다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베토벤 후기의 관조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그 결과 그려진 작품의 스토리는 비극과 희극을 동시에 은유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듣는 이가 사고할 수 있는 여백의 여유도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프랑스인 특유의 깔끔한 감성은 감정의 과다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작품의 무게에 치어 흥분하는 모습이나 다듬어지지 않은 리듬 등도 눈에 띄지 않는 정돈된 모습이었다.
미리 공지한 대로, 이날 후반부 프로그램은 가이드라인만 제시한 채 비어 있었다. 영화음악의 개성 있는 편곡으로 화제를 모았던 크로스오버 앨범 ‘픽션’과 보사노바·탱고 등을 자유롭게 오간 월드뮤직 앨범 ‘브라질’ 등에서 들려주던 곡을 포함해 자유로운 즉흥 연주로 꾸며지는 순서였는데, 정통 현악 4중주를 연주하는 엄숙한 멤버들의 일탈이나 파격을 기대한 청중에게는 기대와 다른 무대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들의 연주는 단순히 클래식 음악 레퍼토리에 지친 사람들에게 가벼운 곡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 아이디어를 활용하여 재즈와 팝, 영화음악에 새로운 빛을 더하는 작업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존 콜트레인·조 자비눌·빅터 영·피아졸라·비틀스의 음악은 때로는 난해한 음 빛깔로, 때로는 베이스라인의 미로 같은 진행과 숨 가쁜 애드리브로 이어졌다. 작품들의 성격상 제1바이올린 피에르 콜롱베와 첼로 라파엘 메를랭이 돋보이는 무대였지만, 비올라 아드리앙 부아수의 맛있는 양념 같은 솔로, 제2바이올린 가브리엘 르 마가듀의 순발력 있는 리듬감도 결정적 구실을 했다.
에벤 현악 4중주단을 알리는 카피 문구 중 ‘언제든 재즈밴드로 변모할 수 있는 현악 4중주단’ 이라는 글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클래식 음악·재즈·팝 등 어느 장르든 가장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모습으로 연주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연주 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팀의 전 멤버 비올리스트 마티유 에르초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해질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집니다.” 에벤이 자유로워질수록 우리의 행복감은 더 커져갈 듯하다.
사진 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