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토르 피아졸라

탱고를 클래식 음악으로!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2월 1일 12:00 오전

1921 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 출생
1953 세비츠키 파비엔 작곡 콩쿠르 우승
1954 파리 유학, 나디아 불랑제 사사
1959 ‘아디오스 노니노’ 작곡
1970 ‘항구의 사계’ 완성
1978 누에보 탱고 5중주단 결성
1988 ‘아메리칸 클라베’ 3부작 녹음
1990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

연말이 되면 으레 기대하게 되는 음악들이 있다. 헨델 ‘메시아’,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등. 적어도 하나는 들어줘야 연말 기분이 날 것 같다. 그런데 최근 여기에 하나가 더해졌다. 바로 피아졸라의 탱고. 그의 탱고를 듣고 있으면 힘들었던 지난 한 해의 근심을 풍선에 실어 날려 보내는 느낌이다.

고전음악 작곡가를 꿈꾸며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는 아르헨티나 남쪽의 마르델플라타에서 이탈리아계 이민 3세로 태어났다. 하지만 4년 후 그의 가정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뉴욕으로 이주했고, 피아졸라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선천적으로 양다리의 길이가 다른 장애를 지녔으며, 갱단에 들어가 강도짓을 일삼는 아들을 걱정하던 아버지는 그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로 마음먹고 반도네온을 선물했다. 피아졸라는 여러 선생님에게 반도네온과 피아노를 배우며 식당에서 연주하곤 했다.

피아졸라는 탱고보다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훨씬 좋아했다. 탱고 악기인 반도네온 역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매우 엄하게 연습시켰다. 결국 13세에 영화 ‘여인의 향기’에 삽입돼 유명해진 ‘포르 우나 카베사(간발의 차이로)’를 작곡한 아르헨티나의 탱고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의 반주자가 되었으며, 가르델의 영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에 신문팔이로 출연하여 반도네온을 연주한다. 가르델은 피아졸라에게 연주 여행을 제안했는데, 피아졸라의 부모는 그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진정 현명한 결정이었다. 가르델 밴드는 투어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피아졸라 가족은 1937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피아졸라는 더 큰 무대에 서기 위해 2년 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하여 카바레와 댄스홀에서 연주했으며, 곧 뛰어난 반도네오니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탱고를 천박한 음악이라 여긴 그는 탱고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고전음악을 작곡하거나 탱고를 고전음악 기법으로 편곡하기도 했으며, 사석에서는 탱고보다도 클래식 음악을 즐겨 연주했다.

1940년 후반,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피아졸라는 곧바로 그를 찾아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루빈스타인은 곧바로 아르헨티나의 저명한 작곡가 후안 호세 카스트로에게 연락했고, 카스트로는 당시 20대 중반의 신예였던 알베르토 히나스테라를 소개했다. 히나스테라와의 공부는 꿈에 다가가는 돌파구였다. 히나스테라가 페론 정부의 탄압을 피해 뉴욕으로 떠난 1945년까지, 피아졸라는 스트라빈스키·버르토크·라벨 등의 최신 음악을 익히고 콜론 극장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에 참관하면서 여러 관현악곡과 실내악곡을 썼다. 당시 그의 고전 작품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마르델플라타에서 연주되었고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밤에는 탱고를 연주해야 했다. 피아졸라는 당대 명성을 날리던 밴드 트로일로 등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다 1946년 오르케스타 티피카를 조직했다. 이때부터 반주가 아닌 ‘감상’을 위한 탱고를 만들었으며, 그의 전형적인 4분의 4박자의 3-3-2 리듬도 나타났다. 그리고 피아졸라 지지파와 반대파가 생겨나며 갈등이 시작되었다.

‘듣는 탱고’로 혁명을 일으키다

피아졸라는 1950년에 오르케스타 티피카를 해체하고 클래식 음악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 결과 교향곡 ‘부에노스아이레스’가 1953년 파비엔 세비츠키 작곡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부상으로 일 년간 거장 나디아 불랑제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듬해 9월 피아졸라는 자신의 꿈을 실현해줄 ‘위대한 도시’ 파리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를 대하는 불랑제의 태도는 예상과 너무 달랐다. 피아졸라의 악보를 본 불랑제는 “실력은 인정하지만 감정이 없다”고 평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음악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피아졸라는 자신이 탱고 음악가라는 사실, 카바레에서 연주했다는 사실, 반도네오니스트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고백하고, 그녀 앞에서 자신의 탱고 작품 ‘승리’를 피아노로 연주했다.

“여기에 진짜 피아졸라가 있었군!”

불랑제는 피아졸라에게 자국의 문화 속에서 풍요로운 악상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그녀와 공부한 기간은 6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불랑제는 최고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프랑스에서 탱고 음악가로서 활동은 매우 만족스러웠으며, 고국에서의 힘든 시기에 지속적인 수입원이 되어주었다.

1955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듣는 탱고’로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각오로 부에노스아이레스 8중주단과 현악 오케스트라인 오르케스타 데 쿠에르다스를 결성했다. 지식인과 젊은이를 중심으로 그의 열성팬이 나타났다. 애런 코플런드와 이고리 마르케비치는 피아졸라가 파리로 떠나기 전부터 이미 그의 팬이었으며, 디지 길레스피는 그의 음악을 듣고 “언빌리버블!”이라 외쳤다. 그럼에도 피아졸라 반대파의 목소리를 이기지 못했다. 심지어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한계를 느낀 피아졸라는 아르헨티나에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1958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3년이었다. 재즈 탱고 5중주단을 결성하여 방송에 출연하고 일부 공연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미국 대중을 사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죠? 여기는 당신을 위한 곳이 아니라고요.”

아르헨티나 출신의 한 팬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와중에 접한 아버지의 부음은 상심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피아졸라는 이 마음을 그의 걸작 ‘아디오스 노니노’(1959)에 담았다.

클래식 음악 어법을 접목한 ‘누에보 탱고’


▲ ⓒSara Facio

결국 1960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5중주단을 결성했다. 클래식 음악 작곡 기법이 깊이 녹아들어 더욱 복잡해진 탱고는 이제 감상용 음악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음악을 ‘누에보 탱고(새로운 탱고)’라고 불렀다. 1960년대 말, 작사가 오라시오 페레르와 가수 아멜리타 발타르와 작업하면서 상당한 양의 곡을 썼고 팬도 크게 늘었다. 1971년 5중주단에 4명의 연주자를 더해 ‘콘훈토 9’이라는 9중주단으로 확대했다. 그의 창작열은 최고에 달했다. 음악적으로도 피아졸라의 전성기였다.

기쁨도 잠시, 피아졸라는 1973년에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여러 여인과의 외도로 1966년부터 아내와 별거 중이던 터라 상실감은 더욱 컸다. 슬럼프에 빠진 피아졸라는 이듬해 1월 조부의 나라 이탈리아로 떠났다. 1975년에 콘훈토 엘렉트로니코를 조직하여 탱고와 전자음악의 결합을 시도하면서 아방가르드적 실험 정신으로 무장한 현대음악의 투사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심기일전한 피아졸라는 1978년 자신의 두 번째 5중주단인 누에보 탱고 5중주단을 만들었다. 탱고와 재즈, 클래식 음악 연주자로 결성된, 누에보 탱고를 위한 드림팀이었다. 유럽과 북미에서 큰 인기를 얻은 팀은 일약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했고, 드디어 고국의 대중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

시간이 흘러 노쇠해진 그들은 오랜 비행이 버거웠다. 그들은 자신을 기념할 무언가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피아졸라는 뉴욕의 프로듀서 킵 한라한을 찾아갔다. 피아졸라의 광팬이던 그는 아메리칸 클라베라는 작은 레이블을 갖고 있었다. 5중주단은 1986년부터 매년 한 장씩 총 3장의 음반을 녹음했다. 이 음반들이 전설적인 ‘아메리칸 클라베 3부작’이다.

“내 평생 녹음한 것 중 가장 훌륭하다. 우리는 영혼을 바쳤다.”

특히 첫 음반에는 ‘완전한 끝남과 완전한 시작’을 상징했던 ‘제로 아워(Zero Hour)’를 타이틀로 삼았다. 뒷면에는 ‘뉴 탱고=탱고+비극+희극+사창가’라고 큼지막하게 적어 멜랑콜릭하고 냉소적이며 자극적인 탱고의 정서를 표현했다. 교회음악을 위해 탄생한 악기의 이 아이러니한 운명이란! 1988년에 5중주단은 이렇게 누에보 탱고의 기념비를 완성했고, 피아졸라가 최고라 추켜세우던 이탈리아 가수 밀바와의 해외 투어를 마친 후 해체되었다.

피아졸라는 심장에 튜브를 꽂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인 1989년 4월 6중주를 구성한다.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로 제2반도네온을 추가했으며, 바이올린 대신 첼리스트 호세 브라가토를 영입했다. 브라가토는 콜론 극장 오케스트라 출신으로, 8중주 시절부터 참여한 멤버였다. ‘항구의 사계’(1964~1970)를 비롯해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이 자주 연주하는 피아노 3중주 버전의 탱고는 대부분 브라가토의 편곡일 정도로, 그는 클래식 음악가들에게 피아졸라를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피아졸라는 일 년 남짓 후인 1990년 8월 파리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특별기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급히 이송되었지만,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2년 후 생을 마감했다.

아르헨티나의 거슈윈

차 한 잔을 마시면서 한 곡을 쓸 정도로 빠른 작곡 속도를 보였던 피아졸라는 평생 3000여 곡을 쓴 다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탱고’라는 장르로 분류되어 현재 대중음악으로 인식되지만, 피아졸라는 자신을 아방가르드 음악가이자 혁명가라고 생각했으며, 탱고 밴드뿐 아니라 오케스트라와 클래식 음악가들을 위해서도 지속적으로 곡을 썼다.

피아졸라의 ‘누에보 탱고’는 고전 탱고에 재즈와 클래식 음악이 결합된 복합적 성격을 띤다. 이러한 스타일은 1940년대 중반 편곡 작업에서 나타나기 시작해 1950년대 말에 양식화되었고, 1960년대 초반에 비로소 완성된다. 당김음과 엇박이 만드는 긴장 가득한 리듬, 스윙, 반복되는 반주 음형, 확장된 화음과 불협화음, 그리고 연주자들에게 요구한 즉흥연주 등에서 재즈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피아졸라가 흔히 사용한 4분의 4박자의 3-3-2 당김음 리듬이 대표적이다.

히나스테라와 불랑제에게서 배운 고전음악이론 역시 깊은 영향을 미쳤다. 스트라빈스키·버르토크는 피아졸라의 우상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사석에서 반도네온으로 바흐와 쇼팽·라흐마니노프 등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엔 대위법과 오스티나토, 템포 및 다이내믹의 변화와 대조, 현대적인 음향 등 고전음악과 현대음악 기법이 곳곳에 넘쳐난다. ‘푸가와 신비’(1968)는 바흐의 탱고적 해석이며, 현악 4중주곡 ‘탱고를 위한 넷’(1987)은 버르토크풍의 현대적 사운드를 지향한다. 페레르·발타르·피아졸라의 출세작인 오페레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리아’(1968)는 탱고 편성으로 오페라 형식을 구현했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탕가소’(1968~1969)는 탱고의 교향악적 변용이며, 오라토리오 ‘젊은이의 마을’(1971), 고전적 형식의 반도네온 협주곡(1979)은 상징적인 작품이다. 이렇듯 피아졸라의 음악은 탱고를 기반으로 하는 고전음악의 한 장르를 열었다. 탱고의 위상을 드높인 그는, 클럽에서 연주하던 재즈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올린 조지 거슈윈에 빗대어 ‘아르헨티나의 거슈윈’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피아졸라는 탱고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3-3-2 리듬뿐 아니라 악기를 때리거나 현악기에서 브리지 아래를 긋는 타악 효과는 사실 1940년대 탱고 스타일을 발전시킨 것이다. 투쟁적인 빠른 부분과 멜랑콜릭한 느린 부분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 헤어날 수 없는 슬픔과 저속하고 다혈질적이며 호전적인 탱고 본연의 마음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10대 시절 뉴욕 뒷골목에서 강도짓을 하며 거대한 왼손으로 주먹을 날리던 피아졸라에게 탱고는 운명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메리칸 클라베’ 3부작의 마지막 앨범 ‘라 카모라(싸움)’는 그 본질이다.

오늘날 기돈 크레머, 얀 포글러, 크로노스·아르테미스·카살스 현악 4중주단 등 수많은 클래식 음악가가 피아졸라의 작품을 편곡한 후 정규 레퍼토리 삼아 무대에 올리고 있으며, 그들이 제작한 음반은 클래식 음반 코너에 당당히 꽂혀 있다. 지금은 오히려 오리지널 그대로의 연주를 듣기가 더 어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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