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노래의 인문학
이름의 딜레마
이름값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가치는 값을 매길 수 없지만 사람의 이름은 각각의 값을 갖는다는 뜻이다. 재미있지 않나. 이름이 곧 그 사람이건만, 사람의 값과 이름의 값이 다르다는 것이. 한 사람의 삶이 가치를 얻는 순간은 이름에 걸맞게 살아냈을 때이다. 이름이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질문을 담은 삶의 방향키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태어나면서 얻게 되는 이름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부모님을 비롯해 나의 존재를 위임한 사람들에 의해 나의 이름은 정해지게 마련이다. 최초의 이름을 자기가 지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는바, 이름은 곧 나이지만 나로부터 비롯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이름과 존재가 애초에 어긋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두 개다. 주어진 이름에 맞게 살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이름을 얻을 것인가.
이름이 갖는 딜레마는 또 있다. 이름은 분명 나의 것이지만, 그 이름을 부르는 건 언제나 다른 사람이다. 이름은 다른 사람에게 사용을 위임한 나의 정체성인바, 다른 사람이 나를 호명할 때만 비로소 내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이름을 자기가 부르면? 아, 생각만 해도 민망하다. 다 큰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부르며 이야기하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이다. 농담이거나 퇴행이거나. 자기 이름을 불러도 흉하지 않은 사람은 아기들뿐임을 꼭 기억하자.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내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나의 고유한 정체성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역설을 깨닫게 해준다. 이름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만 의미를 얻을 수 있는 나의 기호인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두 개다. 이름을 불러주어 나를 ‘꽃’으로 만들어줄 그 사람이 우리에게 있는가?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있는가?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는 책임이 주어져 있다. 이름에 걸맞게 자기의 삶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책임이 있고, 다른 사람이 삶을 채워나갈 수 있게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할 책임이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 책임을 감당했을까? 그 답에 한 예를 제시하는 작품이 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다.
고전이라는 이름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는 작품을 고전(古典)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맨 오브 라만차’는 뮤지컬의 고전작품이 맞다. 1965년에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고, 2005년에 국내 초연된 이래로 지금껏 공연될 때마다 흥행불패의 신화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대중의 문화와 취향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무쌍하기 마련인데도 이 작품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져 왔다. 그 저력의 기초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잘 만들어진 텍스트이다. 이 작품의 원작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임은 모르는 이 없겠지만 원작을 읽은 사람은 꽤나 드물 것이다. 1605년에서 1615년에 걸쳐 두 권의 책으로 완성된 원작은 일단 분량이 엄청날뿐더러, 이상한 인물들이 저지르는 엉뚱한 에피소드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세르반테스가 구사한 패러디의 사회적 문학적 맥락을 알아야 하는 등 넘어야 할 산이 많고도 높다. 그런데 이 방대하고 난해한 원작의 텍스트를 뮤지컬은 세 시간 남짓한 시간으로 너끈히 압축해냈다.
뮤지컬 텍스트가 빛나는 지점은 원작을 요약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원작을 해석함으로써 뮤지컬은 새로운 공연 텍스트를 만들어냈다. 그 해석의 방식은 작가인 세르반테스의 험난한 삶과 그의 소설 ‘돈키호테’의 기이한 내용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다. 세르반테스가 살았던 당시 스페인 사회는 종교재판과 검열로 사회를 통제하는 억압적인 공간이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르네상스를 경험하며 인간의 자유와 개인의 발견을 향해 나아갔지만, 스페인은 기독교 순혈주의와 혈통 중심의 세계관을 고집하면서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토록 숨통 조이는 사회에서 개종한 유대인 후손이었던 세르반테스의 삶이 무난했을 리 없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정규교육도 받지 못했고, 조국 스페인을 위해 전쟁에 출정해서 한쪽 팔을 잃었지만, 유대인을 배제하는 당국은 그에게 고작 징발업무나 세금징수라는 불명예스러운 일을 맡겼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일을 충실히 실행했을 때 세르반테스에게 돌아오는 것은 억울한 옥살이였다. 감히 교회의 밀을 징발했다는 죄목으로 종교재판에 회부됐고, 연체된 세금을 걷었다는 이유로 옥에 갇히는 일을 반복했던 거다. 세르반테스의 삶은 모욕과 멸시로 점철된 고난의 연속이었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쉬지 않고 글을 썼지만 돌아오는 건 혹평뿐이었다.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았던 세르반테스는 죽어서도 아무 데나 버려지듯이 묻혔다. 그의 유해가 발견된 때가 2015년이라니, 그의 모멸이 끝나는 데까지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런 인생을 살았던 세르반테스가 만들어낸 인간이 바로 돈키호테이다. 그는 자기를 중세의 기사라고 믿는 미친 노인네를 주인공 삼아, 유행이 한참 지난 낡은 기사도 소설의 틀로 ‘돈키호테’를 써냈다. 왜 이런 인물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소설은 서문부터 엉뚱하다. 이 이야기는 재주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작가가 쓴 쓸데없는 이야기이니 즐기든지 버리든지 맘대로 하라는 식이다. 물론 이런 시작은 세르반테스가 자기의 할 말을 숨겨놓은 일종의 ‘위장’이다. 교회에 충성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교회를 풍자하는 ‘위선’을 숨겨놓은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를 좇으며 황당한 모험을 멈추지 않는 미치광이 돈키호테는, 엄혹한 시대를 살면서 자기의 영혼만은 빼앗기지 않으려 쉬지 않고 글을 써온 세르반테스 자기 자신이었다.
뮤지컬의 주인공이 세르반테스인 것은 이 때문이다. 뮤지컬은 시인 세르반테스에게 배우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데 꽤나 절묘한 설정이다. 위선이라는 뜻을 가진 히포크리테스(hypocrites)의 어원에는 배우라는 뜻도 들어있는바, 원작에 담겨 있는 세르반테스의 작가적 ‘위선’을 뮤지컬은 ‘배우’의 상상력으로 끌어왔다. ‘배우’ 세르반테스는 감옥 안의 죄수들과 함께 돈키호테의 이야기로 연극놀이를 펼친다. 죄수들이 연기하는 미친 기사의 이야기는 현실이야말로 우스꽝스러운 ‘위선’임을 자주 폭로하는데, 이때 이들의 농담 같은 연극은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위한 변론이 된다. 문학적 텍스트의 진지한 주제의식이 그대로 뮤지컬 텍스트로 자리를 옮긴 셈이다. 예술가와 그의 작품을 소재 삼을 때 뮤지컬은 어떤 서사의 옷을 입을 수 있는지를 ‘맨 오브 라만차’는 더할 나위 없이 잘 보여준다. 창작의 전범을 보여주는 것이 고전의 조건이라면, 이 작품의 자리는 한가운데이다.
‘나’의 이름을 찾아서
하지만 이 작품에서 주제의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주제의 시선이 가닿는 방향이다. 세상은 불의하다. 그런 세상을 나는 살아가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 세상의 불의를 고발하고 그에 맞서 싸워야 할까, 아니면 세상에 타협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지켜야 할까. 전자의 경우라면 이 작품의 정감은 아주 뜨거웠겠지만, 이 작품이 따뜻한 것은 세상은 부패하고 불의할지라도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나는 누구인가’를 찾는 놀이이다”라는 세르반테스의 대사는 이 작품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불의한 시대를 돌파하는 힘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꿈이기 때문이다.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자기의 정체성을 찾는 열쇠는 바로 이름이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자기의 이름을 찾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다. 이 작품에는 자기의 이름을 찾아가는 두 가지 유형의 인물이 등장한다. 자기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의 호명에 응답하는 사람이다. 전자의 주인공은 알론조라는 이름을 버리고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선택하는 노인이다. 은퇴한 시골 영주로 깡마른 몸과 볼품없는 얼굴을 가진 이 노인의 유일한 취미는 철 지난 중세 기사문학을 읽는 것이다. 책에 심취한 그가 눈을 들어 세상을 보니, 세상은 온갖 악독과 불의가 판을 치고 있다. 그 안에서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가는 나라는 인간이라니. 나약한 자기의 모습을 본 그는 우울증으로 앓아눕고 만다. 그는 결심한다. 이제부터 나는 세상의 악과 싸우겠다, 중세의 기사가 세상의 불의와 싸웠던 것처럼 나 역시 기사의 삶을 살면서 이 세상과 대결하리라! 이런 결심과 함께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기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으니, 그 이름이 기사 돈키호테이다.
돈키호테의 이름으로 살기로 한 순간 그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뚜렷해진다. 정의를 지키고 자비를 베풀리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 해도 용기를 잃지 않으며, 조롱받고 상처받는다 해도 영광의 싸움을 멈추지 않으리라!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부르지만 그는 무모한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이쯤 되면 질문이 생긴다. 정말 미친 것은 누구일까? 사회의 모순과 억압과 폭력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명분으로 그저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소위 정상적인 삶이라면, 그 틀 바깥으로 뛰어나가기 위해서는 미친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인간다움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 광기의 시대가 토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다. 정의와 용기를 좇는 사람 돈키호테, 미치광이라는 수식어는 그 이름이 갖는 가치를 역설적으로 빛나게 만든다.
또 다른 주인공은 알돈자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호명에 의해 자기의 정체성을 바꾸는 사람이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다름 아닌 돈키호테인데, 그가 불러주는 이름은 지금껏 살아왔던 이름과는 전혀 딴판이다. 알돈자라는 이름은 이교도 출신의 천한 직업의 여자를 가리키는 흔한 이름이지만, 돈키호테는 그녀를 ‘둘시네아’라는 귀부인의 이름으로 부른다. 지금껏 비참한 밑바닥 인생을 살아오느라 이름보다 욕설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당신은 고귀하고 소중한 사람이라고 불러주는 새로운 이름은 낯설 수밖에 없다. 알돈자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나를 호명하는 이 새로운 이름을 선택할 것인가, 무시할 것인가. 약자와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며 쓰러진 적에게는 자비를 베푸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의 태도가 이 이름에는 담겨 있다. 그 이름을 선택함으로 스스로 고귀하게 변한다 해도 세상은 여전히 잔혹하게 나를 짓밟을 뿐이다. 이 폭력과 모멸을 딛고 일어서도록 이 낯선 이름을 나의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민은 깊어진다.
옳지만 아직은 미치광이인 이름 돈키호테와 고귀하지만 아직은 내 것이 아닌 이름 둘시네아가 진짜 이름이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알돈자가 죽어가는 알론조를 돈키호테로 호명할 때이다. 돈키호테의 이름으로 둘시네아를 호명할 때 천하고 거친 알돈자는 고귀한 둘시네아가 되고, 둘시네아의 이름으로 돈키호테를 호명할 때 초라한 노인 알론조는 용맹한 라만차의 기사가 된다. 이 자리에서 꿈과 현실의 관계는 완전히 뒤집어진다. 돈키호테를 살았던 시간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음을, 둘시네아의 고귀함이 내 안의 진짜 나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들의 정체성은 어느새 달라져 있다.
‘이룰 수 없는 꿈’의 아름다움
세르반테스는 왜 돈키호테의 이름을 빌려 자기를 변호하고자 했을까. 어떠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자기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돈키호테의 이름만큼 적절한 이름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돈키호테의 노래 ‘이룰 수 없는 꿈’은, 어떤 희망도 이 현실 안에서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의 노래가 된다. 죽음을 앞둔 돈키호테의 노래이며,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여전한 모멸을 견뎌야 할 알돈자의 노래이며, 아직 감옥 안에 갇힌 억울한 사람들의 노래이다. ‘이룰 수 없는 꿈과 이길 수 없는 싸움과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정의와 사랑을 따른다는 것은 마치 찾을 수 없는 별을 찾아 힘껏 팔을 뻗는 것과 같지만, 희망조차 없는 험한 길이라 해도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면 기꺼이 따르리라, 이 길에 죽음도 빼앗지 못할 평화와 영광이 있으리니!’
꿈은 별과 같다. 별을 따다 주겠다는 사람에게 꿈은 이루어져야 할 미래의 과제이겠지만, 별을 따라가는 사람에게 꿈이란 삶의 방향을 밝혀주는 현재의 이정표다. 어두운 밤에 별을 보고 길을 잡듯이 놓치지 말아야 할 방향을 붙잡고 묵묵히 걸어가는 이가 꿈을 꾸는 사람인 거다. 길의 끝에 가닿지 못한다 해도, ‘이루었다’는 완료형의 동사를 얻지 못한다 해도, 의미를 찾아가는 의지를 놓지 않는 사람은 어느새 별처럼 빛나는 이름을 얻는다. 돈키호테와 둘시네아는 그 길을 나선 사람들의 이름이다.
‘맨 오브 라만차’를 뮤지컬의 고전으로 만든 ‘통속’의 힘은 여기에 있다. 통속이란 세상(俗)과 소통(通)하기를 원하는 모든 이야기가 얻어야 할 필수적인 미덕인바, 돈키호테의 노래는 뮤지컬의 통속이 인간(人)이 살아가는 도리(文)와 맞닿아 있음을 잘 보여준다. 통속화된 인문학, 뮤지컬의 이름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 정수연(뮤지컬 평론가)
문학과 연극학을 공부했다. 공연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찾으며 마음을 키워왔으며, 앞으로도 같은 꿈을 키워나갈 것이다. ‘더 뮤지컬’ 등 여러 매체에 공연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