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냥……내 인생에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2014년 작 ‘보이후드’의 후반부에 주인공의 엄마(패트리샤 아케트)는 이렇게 울부짖는다. 매일 시간을 흘려보내고 걸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삶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멈칫하게 된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련을 거쳐 훌쩍 어른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성장담은 일종의 판타지이다. 먼지처럼 수많은 시간이 쌓여 언제 나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삶 속에서 성장은 대부분 일상 속에 묻히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별할 것 없이 촘촘하게 이어진 일상은 지금의 나를 이뤄낸 작은 발판이다. 때로 초라하고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내 삶은 남들과 달리 특별한 것이 없다고 비관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 모두에겐 똑같이 내일이란 시간이 허락된다.
내 마음의 소리가 향하는 곳
그간 우리가 만난 성장영화들은 지금과는 달라질 미래를 꿈꾸지만 그것이 현실처럼 녹록지 않으리란 사실을 직시하게 하거나, 몽롱한 희망으로 달뜨게 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인생에 다양한 길을 보여준다. 당연히 영화 한 편이 내 인생을 바꾸는 나침반이 될 수는 없지만, 물기 없는 인생에 ‘너는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어. 네 인생이 잘못된 것이 아니야’라고 포근하게 안아줄 수 있는 격려는 믿어보고 싶은 판타지다. 그리고 나의 일상을, 나의 길을 바꿔 가는 성장영화는 역시 믿어보고 싶은 소망을 담아낸다. 성장영화는 우리들의 소소한 시간에 박수를 보내고, 다가올 내일엔 달라져 있을 거라고 속삭인다. ‘빌리 엘리어트’(2001)는 탄광촌에서 발레리노가 되고 싶은 소년의 달뜬 꿈과 그 꿈을 일깨워준 스승이 알려준 소리에 귀 기울여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소리를 발견하는 영화다. 주인공 빌리는 탄광촌에서 자라나는 소년이다. 모두 가난하고, 모두 힘든 삶 속에 있는 이곳에서 남성다움은 생존을 위한 필수 덕목이다. 권투를 배워야 하는 체육관 한편에서 발레 클래스가 벌어진다. 빌리(제이미 벨)는 권투가 아니라 발레에 끌린다. 그 이끌림에는 작정이 없다. 그저 무심하게 팍팍한 현실에서 벗어나 날아가고 싶은 빌리의 욕망은 그렇게 작정이 없는, 분홍신 같은 이끌림이다. 그리고 분홍신에 대한 그의 욕망은 저주처럼 그를 괴롭힌다. 그런 빌리의 마음을 읽고 그를 발레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윌킨슨 부인(줄리 월터스)은 편견과 오해로 가득 찬 탄광촌에서 빌리가 꿈을 이룰 수 있는 첫 번째 열쇠를 손에 쥐여 준다. 뮤지컬 영화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빌리 엘리어트’는 마냥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 속에 어쩔 수 없이 강퍅한 세상을 감내해야 하는 어른들의 삶을 녹여내면서, 무지개빛 세상을 향해 뛰어 오르는 분홍신을 다시 세상 아래, 더 깊은 진창으로 끌어내린다. 영화 속 빌리의 아버지는 일생 가족을 위해 힘든 노동을 했고, 폐광에 격렬하게 맞서 싸운다. 이 모든 것은 생존을 위한 거칠고 애달픈 몸짓이다. 그런 그에게 발레를 하겠다는 빌리의 꿈은 이해 불가한 욕심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연히 빌리의 춤을 보게 된 아버지는 빌리를 응원하는 든든한 지원자가 된다. 그가 발견한 것은, 빌리가 그토록 원하고 바라는 마음의 소리였다. 그 소리가 향한 곳에 조용하고 묵묵하게 손을 내민 아버지와 가족들의 격려로 빌리의 꿈은 막연한 장밋빛 미래가 아닌, 단단하게 땅에 발을 디딘 현실이 된다. ‘빌리 엘리어트’는 그렇게 끈질기게 자기의 삶을 존중하는 소년을, 그리고 함께 그 삶을 격려하고 박수쳐줄 줄 아는 관용과 이해에 대한 헌사가 된다. 마음의 소리를 따라 꿈을 이룬 소년과 그 손을 잡아준 아버지의 관용을 따라가다 보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길을 잃고 있는 내 아이, 내 가족, 내 부모에게 따뜻한 손길을 건네고 싶어질 것이다.
푸르른 심장으로, 어른들도 자란다
성장이 어린아이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삶의 중심을 잡지 못하거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펼칠 기회를 잡지 못한 어른들을 독려하고 이끌어가는 이야기도 있다. 영화의 관점을 바꿔 보면 이 영화는 빌리 아버지가 편견을 버리고, 다음 세대와 소통하고 그 꿈을 존중하면서 변화하는 어른의 성장영화로 읽힌다. 아버지의 격려로 마음이 열린 빌리는 탄광촌에서 발레를 욕심낸다는 자괴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위해 한 발 나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빌리 아버지는 생존하는 삶 속에 파묻혀 갇혔던 딱딱한 마음을 걷고, 푸르른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아들을 따뜻하게 품고 안아줄 수 있는, 물기 있는 마음을 가진 진짜 어른으로 성장한다. 인생이 다양하듯 성장에 대한 고민은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일관된 한 가지 마음을 갖고 있다. 그건 흔들리는 현재만큼이나 나의 미래가 무섭고 불안하다는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 앞에 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다. 위로의 말 한마디가 주춤거리던 뒷걸음질을 멈추고, 내일을 향해 한 발 나아가게 만드는 큰 힘이 된다. 지금 내 꿈, 내 가족의 꿈, 그리고 미래를 향한 작은 발걸음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박수와 격려가 필요하다. 박수받으면서 걸어가는 길 위, 우리 인생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길은 바로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 그 소리가 향하는 곳이다.
글 최재훈(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후 각종 매체에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