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복지의 사각지대
가난한 예술가는 돈을 벌어도 문제!
GAEKSUK’S EYE 독일/미국/이탈리아
from GERMANY
탄탄한 사회보장제도로 유명한 독일에는 오직 예술가를 위한 ‘예술사회보장기금(Künstlersozialkasse)’(이하 KSK)이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 제도는 약 20만 명의 예술계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의료, 연금 및 장기요양 보험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고용주가 부담해야 하는 몫을 국가가 대신 지급해준다. 이 기금이 아니라면 예술가들은 개인 자격으로 공보험 또는 사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는 그 기준이 철저한 만큼 높은 납부금을 전제로 하므로, KSK 보험 제도가 없었더라면 수입이 적거나 일정치 않은 많은 예술가는 복지의 사각지대로 몰렸을 것이다.
‘미니잡’의 함정
KSK에 가입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예술 활동을 통한 수입이 연간 최소 3,900유로(약 530만 원)면 된다. 그리고 KSK는 다른 분야의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미니잡’(Minijob)으로 버는 수입의 최고기준을 매달 450유로(약 60만 원)로 정하고 있다. 이런 일자리는 마치 한국의 ‘아르바이트’처럼 매우 흔하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미니잡’으로 450유로 이상 벌면 더는 ‘미니’가 아니어서 본격적으로 세금이 부과된다. 그래서 ‘450유로’라는 금액은 독일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미니잡’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450유로를 조금이라도 초과하면 과도한 세금 납부로 인해 오히려 실수입은 크게 쪼그라들게 된다. 이를 차치하더라도 세금 등급과 고용주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 등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그만큼 독일에서는 주업과 부업의 구분이 확실하다.
지난 1년 동안 코로나가 우리 사회와 삶을 변화시키는 동안 수많은 프리랜서 예술가들에게는 생계의 위기가 닥쳤다. 독일 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정치인들은 “빠르고 복잡하지 않다”라고 공언하며 긴급지원정책을 설파했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행정 절차로 인해 도움이 절실한 예술가들에게 경제적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는지는 의문이다. 그동안 많은 항의 시위와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이들의 절박한 목소리에 대한 응답은 코로나 방역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여전히 제외되고 있다.
벌어도 문제, 못 벌어도 문제
이에 다수의 예술가는 국가에 복지를 요청하거나, 막연한 지원을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로 했다. 전시·공연·강연 등의 기회를 잃은 예술가들은 피자 배달원, 예방 접종 도우미, 빵집 등 다른 일을 구해야 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용기를 낸 이들은 위로나 박수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위기에 몰렸다. 주업과 부업의 수입 역전으로 KSK 혜택을 잃을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중순 260개의 문화 단체가 연합한 독일문화협회는 KSK가 예술 이외의 영역(미니잡)에서 월 450유로 이상을 벌어들이는 예술가를 복지와 지원의 영역으로부터 배제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독일 유력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지는 4월 19일 기사에서 ‘450유로 이상 벌지 마세요’라는 제목 아래 코로나로 인해 다른 일을 하다가 KSK 가입 자격을 상실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상황을 보도했다. 같은 날 비슷한 내용을 보도한 독일 바이에른 방송(BR)도 ‘바이에른주 음악가 협회’의 회장인 안드레아 핑크를 인터뷰한 기사를 인용해, 협회에 속한 음악가 3천여 명 중 3분의 1이 직업을 바꿨다고 보도했다. 덧붙여 그동안 프리랜서로서 경력을 쌓았던 예술가들이 KSK보험 자격을 잃고 부모나 배우자의 보험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많은 예술가 협회는 팬데믹 상황에서는 미니잡의 소득 한도를 늘려줄 것과 관련법을 개정해줄 것을 KSK에 요구하고 있다. 과연 이번에는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정치권에 제대로 도달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글 오주영(성악가·독일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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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AMERICA
미국의 필름 오페라
짧지만, 알차고 단단하다
코로나19로 인해 최근 미국의 크고 작은 오페라단은 가능한 창의적으로 2020/21 시즌을 풀어가려 한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움직임은 영화 산업이다. 단순한 공연 스트리밍에서 더 나아가 영상 창작 작업에 박차를 가한 여러 오페라단의 시도는 다양한 직종의 아티스트에게 능동적으로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물은 새로운 스타일의 발성법과 촬영 기법을 고민하도록 하며, 성악이 한층 더 동시대 예술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든다.
LA 오페라, 짧지만 강렬하게
LA 오페라는 동시대의 스타 작곡가와 비주얼 아티스트를 짝지어 단편 영상을 제작하는 ‘디지털 쇼츠’ 시리즈를 야심차게 출항시켰다. ‘디지털 쇼츠’ 시리즈는 LA 오페라 웹사이트와 유튜브 채널을 통해 무료로 제공된다. 지난 12월부터 매달 한두 작품씩 출시된 이 시리즈는 현재 미국의 사회상을 반영한 듯 여성과 유색 인종 음악가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주요 작곡가로는 두 윤(1977~), 가브리엘라 레나 프랭크(1972~), 미시 마졸리(1980~), 데이비드 랭(1957~), 매튜 어코인(1990~) 등이 함께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1950~1970년대생 오페라 작곡가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가장 최근 개봉한 작품 ‘나를 들여보내 주세요’는 독특하다. 작곡가 데이비드 랭의 독립적인 음악은 영상과 함께 어우러져 몽환적인 감정의 와류 속에 관객을 끌어당긴다. 영상의 출처는 펜실베니아의 한 헛간에 오랜 기간 방치되어 사라질 뻔한 독일의 한 무성영화 필름이다. 감독 빌 모리슨(1965~)에 의해 디지털화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퓰리처상을 받은 데이비드 랭은 성경의 아가서에서 영감을 얻은 가사와 미니멀한 음악을 결합해 두 주인공의 사이의 긴장감과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그려낸다. 랭은 요즘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소프라노 앤젤 블루(1984~)를 염두에 두 고 이 곡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의 목소리는 벨칸토와 벨팅의 경계를 넘나들며 과하지 않고 담담하게 스토리텔링을 한다.
보스턴 리릭 오페라, 어른들의 애니메이션
유료 콘텐츠를 선보이는 보스턴 리릭 오페라의 ‘오페라박스’는 비장하다. 자신감 있게 선보인 오페라 ‘어셔 가족의 몰락’은 애니메이션과의 협업을 모색했다. 미국 추리소설의 창시자로 불리는 에드거 앨런 포(1809~1849)의 스토리에 필립 글래스(1937~)가 음악을 입혔다. 핸드 드로잉 애니메이션과 스톱모션을 이용한 인형 기법 등이 화면을 채운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나는 오페라이지만 시종일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폭력적인 부분이 많은 편이어서 어린이가 보기엔 적합하지 않다. 에드거 앨런 포의 차가운 공포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오는 6월 3일, 첫 초연 방송될 ‘사막여관’은 8부작 오페라 미니시리즈이다. 미국 서부에 위치한 미스터리한 여관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간다. 세 번의 그래미 수상에 빛나는 메조소프라노 이사벨 레너드(1982~), 여덟 명의 작곡가와 여덟 명의 작가, 이외에도 네 명의 디렉터가 붙어 화려한 창작진을 구성했다.
미네소타 오페라, 작은 오페라
미네소타 오페라의 ‘미니어쳐스’는 미니 시리즈이다. ‘작은 오페라’로 ‘큰 아이디어’를 구현한다는 취지로 제작됐다. 공모를 통해 뽑힌 네 팀의 창작진이 각각 10분여 길이의 실험적인 오페라 작품을 선보이는 형식이다.
작곡가 아사코 히라바야시(1960~)의 ‘디어 아메리카, 너의 심장을 도전적으로 뛰게하라, 사랑을 담아 있는 그대로 드러내라’는 팬데믹과 씨름하면서 느낀 고통과 슬픔, 상실에 대한 감정을 한 명의 여성 성악가가 편지를 읽듯 담담히 노래한다. 작곡가 찰리 맥캐런과 인형극 제작가 와잉 부의 ‘잃어버린 새’는 그림자를 활용해 연출한 현대 인형극이며, 작곡가 리티카 강굴리의 ‘XYLEM’은 스톱 모션을 활용한 시각 영상이 특징이다. 작곡가 카시마나 아우아의 ‘나를 밟지 마라 : 인종 차별의 세기’는 지난 100년 동안 펼쳐진 미국의 인종 차별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탐구한다.
짧지만 그 속은 알차고 단단하다. 팬데믹의 여러 양상은 예측할 수 없는 음악 장르로 혼합되고, 현대인의 고립은 그림자 인형극으로 고찰된다. 방글라데시 블루스와 유러피안 체임버 음악의 협업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인종 차별에 관한 화두가 던져지기도 한다. 네 작품 모두 미네소타 오페라 웹사이트·유튜브·페이스북 채널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