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choice 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축제의 바통을 이어받은 봄의 절정
통영국제음악제
3.25~4.3 통영국제음악당
제20회 통영국제음악제(3.25~4.3)는 진은숙 예술감독의 취임으로 더욱 풍성해진 현대음악이 주축을 이루며 묵직한 울림을 남겼다. 기자는 폐막 공연의 하루 전, 베이스 연광철의 리사이틀(4.2/콘서트홀)과 다음날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와 테디 파파브라미의 듀오 리사이틀(4.3/블랙박스)을 관람했다.
연광철에게 봄은 독일 작곡가와 시인들이 목 놓아 부르던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아니스트 표트르 옵차로프와 함께 슈베르트, 슈만 등 낭만주의 작곡가의 가곡과 윤이상과 김순애 등의 한국가곡으로 무대를 꾸몄다. 은은한 미소를 띤 그가 피아노에 손을 얹고 첫 번째 곡인 슈베르트의 ‘봄의 믿음’을 시작했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깨어났네”라는 노래의 첫 가사처럼 이미 그의 첫 호흡과 표정, 그가 펼친 팔은 가사의 산들바람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는 성악가가 무대에서 갖추어야할 면모의 정석을 보여주었다. 자세의 흐트러트림 없이 드라마틱한 서사를 목소리로 표현했다. 볼프의 ‘나는 가끔 지난날을 생각한다’에서는 연기를 하지 않았지만, 음색에서 각 시어에 따른 극적인 음악의 표정이 그려지는 듯했다. 시어에 따른 음색의 변화도 인상 깊었다. 후반부의 R. 슈트라우스의 ‘밤’에서는 “모든 꽃”이라는 시어를 연음 처리하여, 뒤로 이어지는 가사 “모든 색”을 더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따금 연광철의 즉흥적인 악상 제안에 피아니스트가 본능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장면도 있었다. R. 슈트라우스의 ‘해방’과 김순애의 ‘그대 있음에’에서 베이스가 수비토 피아노(갑자기 작게)로 드라마틱한 크레셴도를 만들었지만, 피아니스트가 여전히 큰 악상으로 베이스의 진로를 방해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날 스베틀린 루세브와 테디 파파브라미의 듀오 리사이틀은 두 연주자의 음악적 캐릭터가 극명하게 달랐기에 더욱 의미 있는 연주였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악장을 역임한 루세브의 악기는 오케스트라를 이끌어야 했기에 뚜렷하고 앞으로 쭉 뻗는 음색을 가졌고, 파파브라미의 악기는 홀로 음악을 감당해야했던 시간이 배어있어 차분한 파스텔 톤의 음색을 가졌다. 첫 곡인 르클레르(1697~1764)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에서 통주저음을 맡은 제2바이올린을 파파브라미가 연주했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밀도 있는 음색으로 주선율을 바치고 곡의 빈틈을 꽉 채워간 그의 노련함이 돋보였다. 하지만 이번 프로그램에 안배된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루세브 연주)과 3번(파파브라미 연주)에서는 두 연주자가 가진 ‘소리의 습관’ 때문에 생긴 빈틈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루세브는 화려한 음색과 음의 첫 부분을 살짝 늘어트려 극적인 효과를 만들며 관객이 재미있게 느낄 포인트를 짚었다. 하지만 시종일관 큰 악상 때문이었을까,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파파브라미는 작품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듬은 흔적이 역력했지만, 끝에 도달할수록 커지는 음악적 에너지를 감당하기에는 악기의 소리가 가진 한계에 부딪히는 듯했다.
시인 최동완은 메기탕 대신 도다리쑥국이 상에 오르면 그의 고향인 통영에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고 했다. 하지만, 통영에 돌아오는 봄은 도다리쑥국만이 아니었다. 연광철이 노래한 시와 가사에 만개한 ‘꽃’과 수없이 부르는 ‘당신’ 속에 봄은 닿았고, 루세브와 파파브라미가 치열하게 부딪혀 조화를 이룬 연주 속에 깃들었다. 한반도에 가장 먼저 당도한 남쪽 봄은 통영국제음악제와 함께 절정을 이루었다.
글 임원빈 기자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기억의 감옥
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
4.14~30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할머니가 오랫동안 치매를 앓고 있다. 할머니는 그 많은 자식 중, 젊은 날 가장 큰 자랑이었던 자식 하나만 기억에 남겨두셨다. 할머니가 오히려 홀가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이 무거운 건 오히려 잊힌 자식들의 몫이니까. 기억을 다 지워버린 사람의 모습은 그저 순결하다. 고령인구보다 치매인구가 더 빨리 증가한다는 통계가 나오던데, 언젠가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면 나 역시 사라져가는 기억을 마주하겠지. 그때 무엇을 마지막으로 남겨둘까. 종종 생각해 보곤 했다.
2017년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화제작으로 주목받은 신체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이 한국을 찾았다. 조기치매에 걸린 중년의 남성, 톰의 머릿속 기억을 엿보는 공연이다. 연출을 맡은 기욤 피지는 “이 극은 단순히 조기치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이 사라진 순간에도 영원히 남을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라고 말했다.
무대 위에는 네모난 무대가 있다. 네모난 무대는 톰의 기억 상자다. 55세 생일, 톰은 “주머니 속에 빨간 넥타이가 있는 남색 재킷을 입으라”는 딸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시름에 잠긴다. 온통 빨간색이라는 단어에 휩싸인 톰. 어디선가 들려오는 ‘재킷’이라는 목소리에 이끌려 그는 네모난 무대, 즉 기억 상자로 무심코 들어간다.
네 배우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가득하다. 톰의 기억 속을 헤엄치는 여릿한 잔상들은 그 공간을 벗어나려 치열하게 발버둥 친다. 배우들의 몸짓에 2인조 라이브 밴드의 음악이 더해진다. 대사는 거의 없고, 몸짓만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배우들의 몸짓만큼이나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이올린과 키보드, 드럼의 소리에 사운드 샘플러, 페달과 같은 전자음악이 겹쳐져 대사의 빈자리를 음악이 대신한다. 기억과 망각이라는 추상적인 소재를 다루지만 안무와 음악은 구체적이다. 무대 위 배우들과 사물들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매끄럽게 이어지고, 모든 움직임은 톰의 기억이다.
추억은 아름답다는 말에 단 한 번도 공감한 적이 없다. 기억의 편린은, 나를 더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 끔찍한 감옥이었다. 네모난 상자 위에 갇혀 있는 톰이 너무 애잔하여 구해주고 싶었다. 사라져가는 삶의 조각을 모으려, 당최 어찌할 줄 모르던 톰. 그 끝에는 홀가분함만 있을 것이니 너무 애쓰지 말라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연극열전
스포 주의! 타임 루프 물을 가장한…
뮤지컬 ‘렛미플라이’
3.22~6.12 예스24스테이지
막상 극은, 그다지 오래 관객을 속일 생각이 없다. 미래에 도착한 ‘남원’은 할머니 ‘선희’를 만난다. 선희는 남원을 안다. 지나치듯 중얼거리는 몇 마디, 돋보기안경 뒤 가려진 눈빛에서 관객은 이들의 관계를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능청스럽게 미러볼 아래에서 소울 넘치는 알앤비를 부르는 남원의 연기나, 무대 가운데 조명을 두고 ‘두 남원’이 거울처럼 움직이는 넘버를 즐기다 보면 말이다. 극의 초반 굳이 청년 남원과 남원을 구분하지 않고 동시에 등장시키는 연출도 흥미롭다.
‘렛미플라이’(작·작사 조민형, 작·편곡 민찬홍, 연출 이대웅)가 선보이는 감동은 익히 뮤지컬 ‘빨래’ 류에서 느낀 소소하고 따뜻한 드라마다. 누구나 공감할 보편적 감정을 시시콜콜한 에피소드의 재미와 중독성 있는 노래로 풀어낸다. 뮤지컬이 끝날 때쯤 관객 모두가 마스크를 썼음에도 곳곳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일 테다. 엄청난 반전이나 사건은 없음에도 푹 빠져든다. 평범한 이야기가 가진 힘이다.
남원은 과거에 두고 온 자신의 연인 ‘정분’을 찾는다. 정분은 나사 최초의 우주 비행사가 꿈인 소녀였다. 패션 디자이너가 꿈이었던 자신이 미래에 고작 수선집이나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없다. 배우의 등장에 따라 극은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젊은 날의 남원과 정분은 천진난만하게 꿈을 노래하며 그 순수성을 자랑하지만, 현실을 이미 아는 관객에게 어쩐지 그들의 감정은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오히려, 꿈을 좇는 그들보다 꿈을 놓친 지금에 이입하게 된다. 남원이 정분의 우주복을 만들어, 미래의 정분인 선희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그 예다. 단지 세월이 흘러 뜨거운 감정을 훈훈한 온기로 지속하기 위해 선택을 했을 뿐, 꿈을 이루지 못한 지금도 여전히 달을 여행할 뜨거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마음을 울리는 노래가 이를 증명하듯 위로한다.
극장을 나오고서도 ‘레-엣 미 플라이’와 ‘내 눈에 담긴 그대 모-습’을 한참 흥얼거렸다. 결국 마주 앉아 다정히 나눈 이 노부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며. 그리고 오늘을 사랑하며.
“다시 현실이야. 나와 함께 여기 묶여버린 현실”/“묶인 거 아냐, 선택한 거지”/“돌아가서 다 바꾸고 싶은 거 아니었어?”/“아니, 나는 다시 돌아가도 여기, 우리들의 달에서 살 거야”
“달에 간다는 게 말야, 그게 꿈인 줄 알았더니 현실이더라고”
글 허서현 기자 사진 프로스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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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
국립오페라단 ‘아틸라’
리노베이션 클래식
4월 7~10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장대한 무대장치였다. 국립오페라단에서 국내 초연한 베르디 오페라 ‘아틸라’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 전체를 넓고 깊게 사용하며 웅장함을 넘어 압도적인 느낌을 주었다. 외국의 오페라에서는 무대의 천장까지 무대 세트로 활용하는 것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천장에는 별다른 장치를 하지 않는데, 이번 오페라에서는 천장까지 큰 폭의 천을 늘어뜨려 폐허로 꾸민 바닥과 조화를 이뤘다.
이 공연의 연출과 무대미술, 의상은 한 사람이 담당했다. 전설적인 드라마틱 테너 마리오 델 모나코의 아들인 연출가 잔카를로 델 모나코(1943~)다. 이번 프로덕션에 대해 ‘리노베이션 클래식’이라고 밝힌 대로 델 모나코는 아틸라와 훈족의 침략으로 초토화된 도시 아퀼레리아를 고전적이고 사실적인 무대로 구성했다. 아직도 불타오르고 있는 도시의 모습을 원경으로 처리했고, 파괴된 아퀼레이아와 로마의 대리석 건물과 동상들이 무대 끝자락까지 나뒹굴었다. 조형적 질서가 강했던 공간은 오페라의 무대라기보다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회화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이 같은 무대 위에 인물들은 시대를 고증한 의상을 입고 등장했다. 최근 오페라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나 특징과 상관없이 미니멀하고 현대적인 무대와 의상디자인을 선보이는 경향이 많아 이날 오페라가 외려 생경하게 다가왔다.
잿빛의 무대와 톤 온 톤으로 색조를 맞춘 의상으로 인해 무대는 상당히 침침해 보였다. 여기에 오페라 내내 무대를 감싼 망사막(Scrim)은 전쟁터의 뿌연 연기와 흙먼지를 표현하기에는 효과적이었으나 노래를 하고 있지 않으면 주요 인물들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공간을 어둡게 만들었다. 무대 위에서 강한 존재감을 가진 합창단을 비롯한 연주자들은 하나의 유기체로 보였다.
이처럼 시각적 효과가 강렬했던 무대를 이겨낸 것은 성악가들의 가창력이었다. 타이틀롤을 맡은 베이스 전승현은 외국에서는 ‘아틸라 전’으로 불리며 활동했지만, 이 오페라가 전막으로 공연되는 것은 드문 까닭에 첫 출연이라고 했다. 저음 가수에게 애정을 가졌던 베르디의 작품답게 아틸라는 침략자이지만 인격을 갖춘 인물로 그려진다. 전승현은 이런 아틸라의 모습을 묵직하고 진중한 저음으로 잘 그려냈다. 오다벨라 역할의 소프라노 임세경은 예의 송곳 같은 음색과 풍성한 성량으로 전사에 가까운 강인한 여성을 노래했다. 그녀의 연인인 포레스토를 노래한 테너 신상근은 시종일관 날카로운 칼과 칼이 부딪치는 결투와도 같은 이 오페라에 유일한 서정성을 부여했다. 로마의 장군 에치오를 맡은 바리톤 유동직은 고급스러운 음색과 뛰어난 표현력을 바탕으로 한 가창을 들려주었고 아틸라의 또 다른 상대역으로서 든든하게 작품을 받쳐주었다.
이날 등장인물들이 무대의 중간 부분에서 노래하는 부분이 종종 있었던 탓에 오케스트라의 음량은 상당히 크게 들렸다. 자칫 조화가 무너질 뻔도 했지만 임세경이나 유동직 등 소리의 볼륨이 큰 성악가들이 오케스트라에 맞추면서 성악과 기악의 불균형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로 이름을 바꾸고 국립오페라단과 처음 함께하는 공연이었다. 발레리오 갈리가 이끈 이번 오페라는 국립심포니의 장점인 매끄러운 현악이 돋보였다. 섬세함보다는 베르디의 리소르지멘토 오페라 다운 다소 투박하고 씩씩한 연주라는 인상을 받았다.
지난해와 올해, 국립오페라단은 유독 국내 초연 작품을 많이 선보이고 있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도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데 확장만큼 중요한 것이 지속적인 공연이라고 본다. 공들여 시도한 초연 작품들이 국립오페라단의 상설 레퍼토리들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글 손수연(오페라평론가) 사진 국립오페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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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ITIONAL
역량과 기량의 소유자들
국립창극단 ‘리어’
3월 22~3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희극과 비극으로 나누는 연극에서, 정극은 비극일 경우가 많다. 희극이 정극인 경우는 적다. 국립창극단의 ‘리어’는 엄연한 비극이고, 확연한 정극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판소리로 풀어냈는데, 비극적 정조를 그려내는 데 판소리만 한 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소리의 힘이기도 했지만, 배우의 역량이기도 했다. 국립창극단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연기를 가장 잘하는 집단이다. 국립창극단은 그간 희극에 강했다. ‘변강쇠 점찍고 옹녀’(2014), ‘흥보씨’(2017)가 그러한데, 정극은 아니다. 비극적 정극에 어떤 작품이 있었을까? ‘장화홍련’(2012)이 그러했고, ‘트로이의 여인들’(2017)이 확실했다.
정극(正劇)은 한자로 풀면 ‘바른 연극’이다. 창극 ‘리어’는 바른 연극이기도 했다. 창극이란 특정 장르를 떠나서, 국립창극단은 한국의 무대극에서 중요한 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의 연극(정극)은 확실히 힘도 잃었고 방향도 잃었다. 정극의 힘은 배우에서 나온다! 과거 국립극단에는 김동원(1923~2006)과 장민호(1924~2012)가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극 배우는 단연 이호재(1941~)와 정동환(1949~)이다. 정극이 정극인 이유는, ‘배우의 품격’에 있다. 창극 ‘리어’가 정극인 중요한 이유는, 캐릭터에 몰입한 배우의 진지함이 객석에 그대로 전달되기에 그렇다.
조역을 확실하게 해내면서 작품을 살린 박성우(기사 역), 최용석(콘월 역), 최호성(올버니 역)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창극 ‘리어’는 리어와 글로스터의 두 축으로 진행한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김준수는 리어왕을 잘 해냈다. 그간 외모가 연기를 가렸단 생각마저 든다. 글로스터의 유태평양은 배우로서 부족함도 없고 지나침이 없다. 연극 ‘오이디푸스’의 정동환과 창극 ‘리어’의 유태평양에겐 평행이론을 적용할 수 있다. 김준수는 이호재, 유태평양은 정동환! 대한민국 연극의 훌륭한 계보가 창극을 통해 이어진다는 게 놀랍다. 판소리라는 장르, 국립창극단의 가치를 두 배우가 빛내주었다.
이광복(에드거 역)은 이번 작품을 통해 재기(再起)에 성공했다. 판소리뿐 아니라, 경기민요를 했었고, 장타령은 물론 랩까지 소화할 줄 아는 재기(才氣)를 작품 속에 녹여냈다. ‘춘향전’을 공연할 때, 몽룡, 방자, 변학도를 모두 할 수 있는 전천후 창극 배우가 이광복임을 다시 증명해주었다. 첫째 딸(거너릴)의 이소연과 둘째 딸(리건) 왕윤정의 팽팽한 긴장감이 창극을 더욱 쫄깃하게 만들어준다. 이소연은 말해 무엇하랴. 욕망의 주체로서의 여성 서사를 대사와 노래로 짜릿하게 전달해준다. 그녀가 출연하는 장면에선 확실히 선악의 이분법은 무너졌다. 이런 선배의 연기와 가창에, 왕윤정은 확실하게 도전장을 냈고, 1:1의 무승부로 끝났다.
민은경이 좀 아쉽다. 광대 역할은 참 잘했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셋째 딸(코딜리어) 역이 아쉽다. 등장부터 존재감을 뿜어내지 못했다. 민은경은 늘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만 알려진다. 이건 20세기적인 칭찬이다. 민은경의 코딜리어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결국 코딜리어 자체로 이입되진 못했다. 김수인(에드먼드 역)도 아쉽다. 출생부터 갈등의 주체인데, 그런 갈등이 선명하거나 깊숙하지 못하다. “나도 내가 두렵다”란 명대사가 관객의 폐부에 꽂히지 못했다. 두 배역의 아쉬움은 연출가(정영두)에게도 묻고 싶다. 의상이나 무대의 움직임 등 여러 면에서 두 역할의 특별함이 보이지 않았다. 배우와 연출이 함께 고민하면서 배역을 살려내야 한다.
국립창극단의 ‘리어’는 배우의 역량을 바탕으로, 비극적 정극을 아주 잘 그려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국립창극단만큼 클래식과 컨템포러리를 동시에 만족해주는 국·공립단체가 또 있을까? 지난 세기 국립극단이 대단했음에도, 클래식은 때로 고리타분했고, 컨템포러리는 때론 어색했다. 지금의 국립창극단은 둘 다 확실하다. 판소리라는 강력한 매체를 바탕으로 해서 고전 작품을 가져와 동시대성까지 충족해주고 있다. 예전(20세기)의 ‘국립극단’이 지금(21세기)의 ‘국립창극단’이다. 작품의 진지함과 배우의 노련함에서 있어서, 국립창극단이 단연 선두다! 활화산과 같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국립창극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