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종합학교 개교 30주년
미래를 품은 예술가들의 요람
오직 예술가를 배출하겠다는 의지와 저절로 배워지는 그 무언가를 학생들의 품에 안겨주기 위해 초대 총장 이강숙의 피땀은 어느덧 30년 세월을 열었다. 총장 김대진을 비롯해 같은 농도의 열정으로 그 길을 만들고 있는 6개원의 원장과 2대 총동문회장직의 배턴을 이어받은 배우 진선규의 이야기를 담았다. 총괄 임원빈 기자 사진 강태욱(Workroom K)
HISTORY & PRIDE
part 1 | 학교의 역사와 자랑 _송현민 INTERVIEW
part 2 | 총장 김대진 _송현민
part 3 | 6개원 원장을 만나다 이강호·김미희·남수영·김삼진·정주영·임준희 _허서현·임원빈·이의정
part 4 | 총동문회장 진선규 _홍예원 ————- 왼쪽부터 이강호(음악원)·김미희(연극원)·정주영(미술원)·김대진(총장)·남수영(영상원)·김삼진(무용원)·임준희(전통예술원)
Part 1 | HISTORY & Pride
꿈과 노력이 모여
예술계 지도를
바꾸다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어떤 환경 속에서 만들어졌을까.
학생들은 어떤 입시를 거쳤고, 어떤 학과목을
공부했으며, 졸업생들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을까.
한예종을 설립한 초대 총장 이강숙의 이야기부터 오늘날
예술계에서 ‘종합’적으로 평가받는 한예종의 성과와
동문의 활동을 살펴본다.
1980년대는 음악교육에 대한 체질 개선과 각성의 목소리가 나오던 시기였다. 1984년 9월호의 ‘객석’은 국내에 전문적인 음악 기관에 대한 필요와 그 탄생에 대해 점검하는 차원에서 ‘음악원 탄생은 필요한가?’라는 대특집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끊임없는 고민을 낳았고, 문화부는 1990년에 ‘문화발전 10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국립예술학교 설립계획을 공포했다 (이하 이강숙의 인터뷰는 본지 2016년 3월호에서 발췌·요약).
이어령의 기획, 이강숙의 실행
문학평론가 출신의 이어령이 문화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1990~1991)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령(대통령령 제13528호)이 제정되었고, 뒤를 이은 이수정 장관(1991~ 1993)이 이 ‘령(令)’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이강숙은 이를 위한 자문위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청사진과 추천 교수진에 대한 안목이 남달랐던 이강숙은 이내 곧 이수정 장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수정 장관은 이강숙에게 서울대 교수를 그만 두고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를 만들어달라는 뜻을 비추었다. 하지만 이강숙은 이를 거절했다. 이후에도 거절, 또 거절! 하다 못한 이수정 장관은 이강숙의 집을 직접 찾아갔으나, 역시나 거절당했다. “안 한다! 못한다! 다들 서울대 교수 못 되어서 오매불망인데!” 참다 못한 이수정 장관도 일침을 날렸다. “이런 속물 같으니라고!” “뭐라고요? 내가 왜 속물이요?” “예술교육에 대해 중요하다며 이렇게 글만 써놓고, 내가 장관의 명예를 걸고 당신 뜻대로 하게 해주겠다고 하는데도 행동을 안 하니 당신이야말로 속물 아니오!” 예술의 창조는 제도의 창조에서 나온다고 쓴 글들, 생각하기와 대안 찾기가 맞물려 있던 그의 글들··· 그 글들과 이론은 순간 이강숙의 자존심을 태워버리는 땔감으로 전락했다. 그에 대한 뜻 모를 변명이었는지 이강숙은 외쳤다. “내가 왜 속물이냐! 난 부분적으로만 속물이다!”
음악과 사회에 대해 언변을 토하던 자신의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했고, 글을 휘갈기던 손목에는 이론의 공허함이 주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서울대 교수로 활동하며 ‘나 만들기’에 일관하던 이강숙은 서울대를 사직하고 ‘학교 만들기’에 투신하기로 했다. 그의 뜻과 의지는 장대했다. 하지만 서울대 교수직을 내려놓은 남편을 바라보는 문희자 여사의 속은 타들어 가기만 했다고. ‘여보, 돌았나···’라며.
히든 커리큘럼과 최강의 교수진을 갖춘 학교
1993년, ‘전 서울대 교수’에서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장’이 된 이강숙의 집무실. 수많은 서적과 제자들의 논쟁이 오가던 연구실은 어제의 직장이 되었다. 이제 이 곳에서 공문서와 복잡한 업무가 시작됐다. 행정의 행, 직제의 직자도 모르던 그였다.
‘말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행사되는데 음악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은 왜 그렇지 못한가. 행사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왜 그런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모방 대상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원래에 있는 능력이고, 특정 언어 구사 능력은 원래에 있는 능력 덕분으로 얻어진 개발된 능력이라고 했는데 개발된 능력이라는 것은 모방에 의해서 얻게 된다는 것이다. (···) 모방 대상이 이렇게 일정치 않으니 소질 개발이 일정해질 이유가 없다’(이강숙 저, ‘음악선생님을 위하여 중’에서)
음악할 수 있는 능력의 학생들이 모여서 모방을 하고, 자신을 개발해야 하는 예술학교. 일단, 학생들이 모방해야 할 최고의 교수진이 필요했다. 그들은 이강숙이 만든 ‘히든 커리큘럼(hidden curriculum)’이었다.
“숨어 있는 교과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어떤 문화권에 있느냐에 따라 ‘저절로’ 배우는 것과 ‘억지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저절로 배우는 것은 억지로 배우는 것보다 중요하고 그 효과도 크죠. 저절로 배우는 것에 있어서 그 학교의 ‘히든 커리큘럼’이 무엇이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한예종의 히든 커리큘럼은 ‘연습을 굉장히 많이 하는 교수들’입니다. 학생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그 ‘분위기’입니다. 음악행위에는 음악성 외에 지식행위와 기술행위와 태도행위가 필요합니다. 삶의 태도, 학교에 대한 태도, 직업에 대한 태도 등이요. 어떤 태도 즉, ‘프레임 오브 레퍼런스’를 어떻게 갖느냐가 나를 바꾸는 것인데, 학교의 ‘히든 커리큘럼’이 그 역할을 합니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유명한 작가에게 매일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교정에서 한 시간씩 책만 보고 가면 전임 교수에 준하는 월급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작가는 정해진 시간에 따라 매일 책을 읽고 갔죠. 그랬더니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던 학생들의 태도와 학내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교육은 티칭(teaching)이 아니라 러닝(learning)입니다. 가르치지 말고 배우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타지 않은 심지가 세 개 있습니다. 진·선·미. 그것에 불만 당겨주는 게 교육입니다.”
이강숙은 서울대에 함께 재직하던 김남윤(바이올린)과 이건용(작곡·이론)을 비롯하여 외국에서 활동하던 정명화(첼로), 이영조(작곡) 등을 삼고초려했다. 스승은 제자를 쏘아 올리는 활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들은 그 어떤 화살도 높이 쏘아 올릴 수 있는 강한 활을 지닌 궁예 부대였다.
주위의 기대와 넘어야 할 산
1993년에 개원한 한예종 음악원은 예술의전당 내의 빈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총장도 교수도 학생도 있었지만 교사(校舍)가 없었다. 연꽃은 진흙에서 핀다고 했지만, 이건 너무 진흙이었다. 내로라하는 학업의 과정을 거쳤고, 일류 선생의 일류 제자로 입학한 학생들은 연습실이 부족한 나머지 화장실에서 연습하기도 했다.
“인생을 걸고 하겠다”고 외친 이강숙은 개교한 지 1년도 안 됐을 때, 국회 상임위원회에 불려나갔다. ‘착석하십시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학교 잘 되갑니까?”라는 말이 나왔다. “네, 잘 되어 갑니다”라고 이강숙이 답하자 “그게 무슨 잘 되어가는 겁니까? 당신이 외국 유학을 가지 않고도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나오는 학교 만들겠다고 했는데”라는 말이 나왔다. 이강숙은 “존경하는 의원님···”이라며 입을 열었다. “의원님, 결혼한다고 아이가 바로 나올 수 있습니까?” “거, 총장, 지금 무슨 소리요?” “임신했다고 바로 아이가 나옵니까?” “임신하고 바로 어떻게 낳소?” “입덧을 거치고 10개월이 되어야 아이를 낳을 수 있지 않습니까?” “왜 그런 소리를 지금 하는 거요!” “그럼 아이가 나오면 바로 걷습니까? 말은 바로 합니까? 시간이 지나고 기다려야 걸어 다니지 않습니까?” “거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하시오!” “우리 학교는 아직 임신도 안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야 임신도, 입덧도, 출산도, 걷기도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이를 듣고 있던 의원은 “그 말 맞네, 그 말이 맞아!”라고 했다고 한다.
산 넘어 산. 서울대 교수라는 전직도, 장관 예우에 준하는 교장이라는 현직도 모두 내려놓아야만 했던 시간들은 계속 이어졌다. 모든 게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설치령(設置令)’이 아니던가. 령(令). 이것은 명령이었다. “6개원을 완성하는 게 나의 임무였어. 안 그러면 난 직무 유기였죠.”
오직 믿음뿐이었다. 최고가 모여야 최고가 나올 수 있다는 믿음. 물색과 탐색 끝에 연극원장 김우옥(1994), 영상원장 최민(1995), 무용원장 김혜식(1996), 미술원장 오경환(1997), 전통예술원장 백대웅(1998)을 원장으로 임명하며 6개원을 차례대로 개원했다. 하지만 이강숙 앞에는 ‘걸어야 할 길’이 아니라 ‘넘어야 할 산’이 계속 이어졌다. 산 넘어 산. 한 산을 넘으면 다음 산이. 그중 산 중의 산 ‘예산’은 매년 넘어야 할 큰 산이었다.
증명만이 살 길이었던 시간
예산은 늘 부족했고, 한정되었다. 삼고초려한 6개원 원장들은 교육공간과 예산을 달라고 아우성쳤다. 장관 예우를 받는 그였지만 학교를 위한 몇 푼의 예산이라도 쥐고 있는 경제기획원의 7급 공무원이야말로 그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 앞에선 전직 서울대 교수라는 것도, 장관 예우를 받는 교장직이라는 것도 내려놓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갔다. 아침에는 정중한 목소리에 담긴 “안 됩니다”가, 점심에는 “안 된다고 했잖아요!”로 변했고, 저녁에는 모두 “저 영감 또 왔네”라며 혀를 끌끌 찼다. 이강숙을 보좌하던 국장이 보다 못해 그 현장에 끼어드니, 오히려 “가만 있으시오. 이건 내 일이니까 가만 있어요. 장관 폼 잡고는 예산 한 푼도 못 땁니다”라며 말린 이는 이강숙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11시. 다시 찾아간 이강숙은 캔에 든 식혜를 책상에 하나씩 내려놓으며 말했다.
“얼마나 출출하겠습니까? 사실 맥주 사 오려고 했는데요. 한잔 하시고 ‘아~ 기분 좋다’며 ‘까짓 예술학교 예산 줘버리자!’ 하시면··· 저도 나라 사랑하는 사람인데요. 예산 골고루 나눠주셔야 하는데 그러면 다른 곳하고 밸런스가 맞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식혜 사 왔습니다.”
다음날의 아침, 예산은 거짓말처럼 올라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넘어 산이었다. 이번에는 학습공간과 교사(校舍)가 문제였다. 명색이 국립예술학교인데 6개원은 예술의전당과 국립극장, 안기부(구 중앙정보부) 등의 한구석에서 포문을 열었다. 이강숙은 1996년에 석관동 안기부 건물로 연극원, 무용원, 영상원, 미술원을 모았고(석관동 제2사는 2006년에 준공되었다), 1999년에 지금의 서초동 교사를 완공시켜 음악원과 무용원을 옮기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국제 콩쿠르 성과야말로 우리 학교의 예산을 끌어올 수 있는 방편이었어요. 우리는 ‘이제 하려고 합니다’ 하면 아무 것도 안 되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일단 ‘나아가다 보면 된다’라고 생각했죠. 남들이 뭐라고 해도 ‘우리 학교는 큰 배다. 태평양을 건너는 큰 기선을 작은 상어가 건드린다고 해서 방향이 바뀌겠느냐’며 우리는 계속 갔어요.”
1993년 음악원 개원 이래, 1995년 민유경(바이올린)의 메뉴인 콩쿠르 3위를 시작으로 한예종은 이제 국내 교육만으로 국제 콩쿠르의 별을 따오는 토종(土鐘)을 배출하는 곳이자 음악의 본국이 부러워하는 ‘우리만의 본종(本種)’을 기르는 곳이 되었다. 오늘날 이 학교의 명성은 세계가 기억해주고 있다.
두 번 입학해도 후회 없는 학교
한예종은 입시 방식부터 남달랐다. 수험생들 사이에서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지 않고 실기 성적만으로 입시에 응할 수 있는 학교”로 개원 때부터 유명했고, 종합생활기록부가 일정 비율 반영되었다.
1997년 개원한 미술원은 기존 미술 교육의 틀을 뒤집는 대안 제시가 목표였던 만큼 입시와 교육 방식도 남달랐다. 다른 미술대학들이 입시에서 으레 택하는 석고 데생 대신 미술원 조형예술과의 입시장에는 시험관이 염소 한 마리를 끌고 들어왔다. 이듬해에는 첼로를 연주하는 사람이 등장했고, 배경음악이 펼쳐지기도 했다. 대학 입학 후 학내 서클과 동아리 활동을 통해 예술의 맛을 본 대학생 중 실기를 부단히 연마하여 한예종에 응시하는 학생들은 예나 지금이나 많다. 고교 시절 영화감독을 꿈꿨던 박정민은 한예종 영상원에 지원했지만 낙방하고 수능에 응시하여 고려대 인문학부에 진학했다. “한예종이 예술학교라서 예술적으로 자기소개서를 썼다가 면접관이 ‘자네는 자기소개서가 뭔지도 모르나’라는 말로 엄청 혼났다”라고 고백한 일화는 지원자들이 한예종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과 동경심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한예종의 커리큘럼은 ‘예술이란 곧 인문학과 상통한다’는 이념으로 예술실기의 이론적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철학, 예술학, 미학 등의 이론적인 학과목들로 무장되어 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예술 특유의 자유로움과 환상에 적합한 논리적 구조를 배운다. 결국 박정민은 배우의 꿈을 이루고자 연극원 연기과에 입학했다.
광화문 일대의 새로운 볼거리로 등장한 서울도시건축박물관을 설계한 건축가 조경찬도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술원 건축과에 재입학한 뒤 졸업했다. 이후 건축가 라파엘 비뇰리의 사무소에서 8년간 근무한 뒤 2015년 뉴욕에 자신의 사무실 ‘터미널7아키텍츠’를 열어 활동하다가 이 사업이 당선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국내 건축과들이 대부분 공과대학 소속으로 4년제인 것에 비해 한예종의 건축과는 독특하게도 미술원(미술대학) 소속이며 5년제로 운영 중이다.
배우 김신록(2022년 청용시리즈어워즈 드라마부문 여우조연상)은 서울대 지리학과 재학 당시 사회대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연극과 연기에 재미를 느꼈다. 졸업 후에 대학로의 연극 무대로 바로 향했지만, 한계를 느꼈던 그녀는 연극 공부를 위해 한양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연극 전반의 이론과 역사, 연출과 기술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연극사 책에서 봤던 무수한 연기를 실제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연기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한예종 전문사에 진학(씨네21)”했다.
입학 후의 엄청난 과제와 눈뜸의 계기
신입생들은 청춘의 자유보다 엄청난 과제와 작업의 시간에 파묻힌다. 학과마다 수업의 분위기도 남다르다. 미술원 미술이론과는 수업 대부분이 교실의 불을 끈 상태에서 진행된다. 빔프로젝터를 통해 명작들을 감상·분석하며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어둠 속에서 교수의 강의를 부지런히 메모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미술이론과 학생들에게는 ‘어둠속의 속기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2016년 미술원 개원 20주년을 준비하는 기념 행사에서 미술이론과는 ‘어둠속의 속기사’라는 주제로 1999년부터 2016년까지 18년간 진행된 과 특유의 학술답사의 자료를 살펴보고 그 역사를 조망했다.
연극원 무대미술과에서 수학한 손요나는 “다른 학교 친구들은 1~2학년 때 교양과목을 많이 들어야 하는데 한예종은 90% 이상 전공 실기 과목을 들어야 한다”라며 “전공 실기에만 매진하다 보니 일반 대학보다 일찍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한국경제)”고 말했다.
재학생들이 낮에는 대학생이지만, 수업이 끝나는 저녁이 되면 콩쿠르나 공모전을 준비하는 전사로 변신하는 것도 한예종 학생들만의 독특한 일과다. 그래서 학기 중은 물론 방학 때도 연습실과 실습실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 전통예술원을 졸업한 문새한별(해금)은 “한때 한예종에 가면 화장실을 한번 가보라는 말이 있었다”라며 “콩쿠르를 앞두고는 연습실이 모자라 강당이나 화장실에서 연습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그 정도로 연습벌레들만 모였다(한국경제)”라고 한다. 문새한별도 2학년 재학 중이던 2011년에 동아국악콩쿠르에서 금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금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 활약 중인 김선욱은 특별한 외국 유학 경험 없이 2006년 영국 리즈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하며 음악계에 이슈가 되었다. 중학교 과정인 예원학교 졸업 후 음악 영재로 곧바로 한예종에 입학했던 그는 다른 공부보다도 피아노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한예종의 환경을 추억한다. “1년 내내 매일, 심지어 명절에도 눈을 뜨자마자 학교에 갔다. 지하 1층에서 연습도 하고 책도 읽었다(매일경제).” 세계적 수준의 음악가들 공연이 연일 오르는 예술의전당 옆에 음악원 교사가 위치한 것도 장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공연을 보거나 리허설을 참관했던 것도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연습과 창작을 위한 고급의 실기·실기실습 장비를 갖춘 것도 큰 장점이다. 1993년 개원한 음악원은 당시 메이저 공연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연습실에 배치하여 학생들에게 ‘국제적인 터치감’을 익히도록 했다. 영상원은 당시 학생들이 실습에 사용하기에는 고급인 촬영 장비들을 대여해주어 과제를 수행하도록 했다.
학생들의 자극제, 교수진의 열정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낮에 교육에 종사한 이들은 저녁이 되면 공연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활약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실전에서 쌓은 경력과 경험은 학도들에게 다음을 위한 ‘날개’가 되기도 한다.
무용원 교수 김용걸과 파리 오페라 발레 에투알(수석 무용수)로 활약 중인 박세은이 대표적인 예다. 박세은은 예원학교를 거쳐 서울예고 재학 중 무용 영재로 무용원에 입학하여 서울예고 명예졸업장을 받았고, 2009년 국립발레단에 특채로 입단해 최연소 주역을 맡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파리 오페라 발레의 밑바닥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데, 이러한 계기의 눈뜸과 결심에는 김용걸 교수의 영향이 컸다. 김용걸도 국립발레단 수석으로 활약(1995~1999)하다가 27살 늦은 나이로 오디션을 거쳐 2000년 동양인 최초로 파리 오페라 발레에 입단하고 솔리스트로 승격하여 활동했다. 2021년 6월에 에투알 승격 소식을 전한 박세은은 무용원 3학년 때 김 교수와의 수업을 통해 ‘프랑스 발레’를 처음 알게 되었다. 국내의 발레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대부분 러시아발레로 익숙한 바가노바 메소드로 교육받는데, 박세은은 김 교수가 행하는 프랑스 스타일의 춤과 교육에 매료된 것이었다. 이후 박세은은 프랑스 무용수들의 영상물을 부지런히 찾아보았고, 김 교수에게 파리오페라발레단 입단의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1998년 개원한 전통예술원은 파격적인 교수 채용으로 국악계에 화제를 낳았다. 음악과의 안숙선 교수와 연희과의 김덕수 교수였다. 한국의 근·현대사 시기에 활동했던 국악 명인들은 정식 대학교육보다는 선배 명인들을 사사하며 구전심수로 전승받은 기예로 다음 명인의 세대를 일구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에게 있는 것은 실력이고, 없는 것은 학위였다. 많은 대학교에서는 이들을 시간 강사로만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통예술원은 안숙선과 김덕수에게 정식 교수 자리와 연구실을 내주었다. 이로 인해 보수적이고 계보를 중심으로 전승되던 국악계에서, 안숙선과 김덕수에게 배우고자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전통예술원에 입학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학생들의 학창시절
재학생 중에는 신춘문예나 여러 공모전을 통해 사회적으로 ‘예술가 자격’을 획득한 학생들도 많았다.
소설가 김애란은 연극원 극작과에 2000년에 입학하여 재학 당시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에 ‘노크하지 않는 집’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했다. 당시 극작과 학생들은 ‘희곡 쓰기’ 등의 강도 높은 수업을 거쳐 나온 결과물들로 ‘가면과 거울’이라는 단행본을 계간으로 내기도 했다. 2000년 가을호(16권)를 편집했던 소설가 서준환은 “‘가면과 거울’은 희곡에 뜻을 둔 습작생들이 세상과 타인에 대해서 고민하고 상상하는 가운데 학교 수업을 통하여 희곡과 연극이 무엇인지를 익히고 자신의 내부가 좀 더 치열해져 가는 궤적을 그려 보이는 공간이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서준환도 2001년 ‘문학과 사회’로 이미 등단한 후 학교 수업을 들었던 학생예술가였다. 한예종은 학사 과정에 준하는 ‘예술사’ 과정, 석사과정에 준하는 ‘예술전문사’ 과정이 있다(보통 석사과정을 2년으로 생각하지만, 한예종은 장르의 특성상 3년 과정도 있다. 음악원 기악과의 고음악 전공·음악테크놀로지과·지휘과, 영상원의 멀티미디어영상과·애니메이션과, 협동과정의 음악극창작협동과정 등이다. 이들은 2년 과정보다 심화된 공부를 이어 나간다). 예술전문사 과정은 현장 경험을 쌓은 학생들이 입학하기도 하고, 이러한 경험에 교육이 더해지면서 교내 수업을 통해 빚은 성과물들이 예술계에서 주목받는 역작이자 다음 세대를 이끌어나갈 차기작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극작가 김태웅의 연극 ‘이(爾)’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김태웅은 연극원 예술전문사 과정에서 공부했는데, 이 희곡이 그의 전문사 졸업 작품이다. 작품은 나중에 이준익 감독의 화제작 ‘왕의 남자’(2005)의 원작이 되는데, 연극에서 공길 역을 맡은 이는 당시 연극원에 재학 중이던 오만석이었다. 졸업작품으로 교내에 올랐던 연극은 대학로에 나오면서 동아연극상 작품상, 한국연극협회 선정 베스트 5 작품상 등을 받았고, 오만석도 남자신인연기자상을 수상했다. 이후 영화가 인기를 얻자 원작인 연극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태웅과 오만석은 각각 연극원 극작과와 연기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학생예술가라면 영화감독 나홍진도 빠질 수 없다. 이제 그는 영화 ‘황해’(2010)와 ‘곡성’(2016)의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08년 영화계는 영화 ‘추격자’가 남긴 최대 수확을 나홍진이라는 걸출한 신예 감독의 발굴로 꼽을 정도로 그는 화제를 낳았다. ‘추격자’는 나홍진이 제작한 단편영화 ‘5 미니츠’(2003)와 ‘완벽한 도미 요리’(2008) 등으로 호평을 받은 후 제작한 첫 장편영화였다. 당시 나홍진은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 재학 중이었는데 2학기를 남겨 두고 졸업 작품을 준비 중이었다. 그때 충무로의 A급 배우들이 그의 졸업작을 돕고 싶다는 의향을 전해오기도 했다고 한다.
2021년 칸영화제의 유일한 한국영화 수상작이었던 윤대원의 ‘매미’도 영상원 졸업작품이다. 해당 부문은 영화 전공 학생들의 졸업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섹션으로, 신예를 발굴하는 등용문이다. 김봉렬 전 총장(2013~2019년 재직)은 “출연 배우들과 스태프는 재학 시절부터 학생들이 제작하는 독립·단편영화에서 실력을 갈고닦을 수 있었다(MBN)”며 학예종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협업 구조에 말하기도 했다.
영화·드라마계에서도 인정받은 시스템 구축
봉준호의 2019년 영화 ‘기생충’이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2020년 아카데미 작품상·각본상·국제장편영화상·감독상까지 4관왕을 기록한 가운데 영화에 출연한 배우는 물론 스태프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연극원 출신의 배우 이선균(연기과 1기), 장혜진(연기과 1기), 박소담(연기과 17기)은 201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이어 2020년 아카데미 수상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이하준 미술감독(연극원 무대미술과 3기)은 한국 최초로 아카데미 미술상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비록 아카데미 수상은 불발됐지만, 미국 미술감독조합(ADG)이 주최한 제24회 ADG상 시상식에서 현대극 부문 미술상을 받기도 했다. 함께 한 김병인 감독(영상원 영화과 전문사 음향전공 11기)도 미국 영화음향편집자협회(MPSE) 주최 제67회 MPSE 골든 릴 어워드(Golden Reel Awards)에서 외국어영화부문 최우수 음향상을 수상했다.
드라마 ‘작은 아씨들’(tvN)의 작가 정서경도 서울대 철학과를 중퇴하고 한예종 영상원 시나리오과에 재입학하여 공부했다. 특히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 한데 만나며 그 경계 넘기가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는 지금, 동문들의 폭 넓은 활동을 통해 한예종 출신의 활동 반경은 더욱 넓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드라마와 영화에서 이러한 분위기에 가속도가 붙고 있는데,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들의 ‘종합’적인 활약이 더욱 기대된다. 글 송현민(편집장)
세계 콩쿠르를 빛낸 한예종 출신들
오로지 실력으로만 뽑았던 교수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예종 출신과 교수
영화와 문학에서 주목받는 한예종 출신들
Part 2 | Interview_ PREsident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김대진
예술의 ‘상징’과 현장의 ‘실용’이 어우러진 교육으로
학교의 발전을 위한 큰 그림을 다시 그리다
예술가가 총장을 맡는 것도 한국예술종합학교만의 특징이다. 제1·2· 3대 총장 이강숙(1992.11~2002.2)은 음악학자, 4대 총장 이건용(2002.3~2006.2)은 작곡가, 5대 총장 황지우(2006.3~2009.5)는 시인, 6대 총장 박종원(2009.8~2013.8)은 영화감독, 7·8대 총장 김봉렬(2013.8~2021.8)은 건축가 출신이다.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 활동해온 김대진은 2021년 8월부터 9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음악계에서 만난 김대진은 ‘상징성’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음악가였다. 음악계 현장에서 그는 어떤 작곡가의 탄생이나 사망 기념해가 되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작품을 모조리 연구하여 위대한 예술가가 지금 시대에 남긴 의미와 의의를 되짚으며 ‘상징성’을 내세웠고, 이를 위해 작곡가의 주요 작품들로 공연을 일구어 음악계의 자원을 풍부하게 하는 ‘실용성’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한 분야에 능통하면 다른 분야와도 통한다는 말처럼 김대진의 전략들은 이제 음악을 넘어 학교 곳곳에 녹아들고 있다. 총장으로서 개원 후 30년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세인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상징’의 깃발들을 높이 세웠고, ‘실용’적인 행정으로 향후 30년의 시간을 준비 중이다. 한예종 홈페이지를 통해 만난 총장의 인사말에는 ‘21세기의 시대적 도전에 대응하는 예술교육과 행정체계의 정립’이라는 슬로건이 걸려 있었다.
한예종은 여러 분야와 장르에서 성과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재학생과 졸업생 중에 스타급 음악가들이 많이 나오고, 언론이 콩쿠르 입상자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다 보니 학교가 음악 중심으로만 비춰지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대외 인지도를 위한 균형 잡기도 필요하고, 학교가 여러 장르가 모인 ‘종합’학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궁금하다.
음악원의 성과가 눈에 띄는 게 사실이고, 덧붙이면 공연예술이 주인 무용원, 연극원, 전통예술원의 활동이 다른 원에 비해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과 달리 각 원의 활동들은 ‘종합’적으로 특색 있게 잘 이뤄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세부적인 움직임을 홍보하기 위해 더 많이 신경 쓰고 있다.
총장직을 맡으면서 나 역시 한 명의 음악가였다는 사실을 기억에 묻어두었다. 여러 원의 업무를 검토하고 수행할 때마다 이 생각은 더욱 절실해진다. 왜냐하면 총장으로서 각 원에 대해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994년 음악원 교수로 부임하여 몸담은 지 28년이 되었는데, 지나온 시간이 나만의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여러 사람과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이곳까지 온 것이다. 특히 음악원 원장직을 수행(2018~ 2021)하면서 다른 원의 상황과 행정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고, 좋은 사례는 공유하기도 했다. 그때 다른 원의 생리에 대해 알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었던 방법 중 하나는 각 원의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한예종은 예술가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주로 예술 활동과 표현을 통해 각 원의 비전과 특성을 드러내고, 이러한 현장에서 이야기와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것이 회의실에서의 소통보다 더 원활하고 효율적인 경우가 많았다. 지금 학교 현장에서도 ‘총장으로서의 균형성’을 상당히 많이 요구한다. 그래서 지금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오늘도 석관동 교사 내 미술원 학생들의 공방에 다녀왔고, 예술정보관(도서관)과 그 안에 위치한 케이시네(영화관)도 다녀왔다. 이제는 학교 곳곳이 업무를 위한 산책 코스가 되었다.
재학생과 졸업생 등 동문의 수상 소식과 더불어 한예종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는 소식도 보도자료를 통해 매일 접하고 있다.
한예종에는 6개원 외 문화예술교육센터, 공연전시센터 등의 여러 부설기관이 있다. 두 기관은 주로 한예종이 지금까지 쌓은 여러 콘텐츠를 보급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문화예술교육센터는 체계적인 교육 방식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소외 지역의 예술교육 활동을 담당한다. 공연전시센터는 지방에 공연을 보급하여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줄여나가고자 한다. 강원도 철원군과 교류를 하고 있으며, 9월에 구례군과 업무협약을 맺기도 했다. 현재 수도권에는 대규모 공연이 많이 오르고 있다. 많은 이들이 ‘공연’이라고 하면 으레 화려하고 대형 공연만 생각하곤 한다. 물론 예술계 활성화를 위해 이러한 움직임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 기초자치단체에서 소규모 공연과 작은 움직임도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교와 구 단위 문화재단들과의 업무협약을 추진하려고 구상 중이다. 이는 졸업생들의 활동으로도 연계될 수 있을 것이다.
20대 신진 예술가나 청년 예술가를 위한 사회 지원 정책도 활발하고, 예술대학이나 학과마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사회 진출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한예종이 기획 실행하고 있는 발판이 있다면 무엇인가.
‘예컨대 프로젝트’는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우수한 청년예술가를 선발하여 창업자금부터 기업 브랜딩, 컨설팅까지 패키지로 지원하는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다. 5월에 공모를 통해 68개 스타트업 기업을 선정했다. 특히 현장에 있는 졸업생들과의 만남이나 상담, 특강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 중인데, 이 프로젝트를 통해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만남도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어서 좋다. 오늘날 예술 현장도 변하지만 이를 위한 예술대학이나 학과도 변화하고 있다. 학생들의 교육에만 전념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사회와의 연결과 적응까지 어느 부분 책임져야 하는 시대다. 예술 분야는 이러한 사회적 연계가 쉽지 않은 분야인데, 사회에 먼저 진출한 선배들의 노하우와 현장 감각을 ‘예컨대 프로젝트’를 통해 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한예종의 동문 중에는 학교를 빛내고 국위 선양하는 스타 예술가들도 있지만, 학교의 실질적이고 내실적인 인프라는 그 외의 학생들이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 학생이 예술 현장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설치법 개정안 추진도 필요하다.
자연스레 설치법 개정과 관련된 질문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현재 한예종은 학사에 준하는 ‘예술사’, 석사에 준하는 ‘예술전문사’ 과정이 있다. 어떻게 보면 박사과정이 없는 예술대학이다. 이를 위해 1999년과 2006년에도 설치법을 개정하여 전문적인 석·박사 과정 설치를 추진했으나 ‘한예종에 대한 특혜’를 주장하는 다른 대학들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지난 3월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이를 위한 공청회를 갖기도 했고, 설치법 개정안은 총장으로서 중요한 공약이기도 하다.
세계 콩쿠르나 국제 공모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며 학교를 빛내고 국위 선양하는 학생들은 앞으로도 많이 나올 것이라 믿는다. 한편 이러한 성과에 도취하기보다 졸업생들이 예술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오늘날의 예술 현장은 과거보다 더 높은 수준과 다양한 학위를 요구한다. 기본적이고 최소한의 조건이 높아져 있는 상태다. 그런 점에서 설치법 개정은 스타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게 아니라, 현장에 몸담은 졸업생들이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을 갖출 수 있게 하는 실용적인 시스템이다. 그리고 과거에 ‘유학 갈 필요가 없는 학교’로 시작한 이 학교는 이제 ‘유학을 오는 학교’로 점점 변신 중이다. 이처럼 외국 유학생들이 많아지면서 예술학교로서의 위상 역시 높아지고 있는데, 그들에게도 필요한 학위를 수여하도록 하는 설치법 개정은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오늘날 예술은 인문학이 기술과 만나는 융·복합의 시간을 걷고 있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창의력인데, 자신의 분야에만 매진한다고 창의력이 생기던 시대를 우리는 지나가는 중이다. 이제 경계를 넘어 새로운 경험을 하고 이를 통해 자신과 다른 장르를 동시에 심화해야 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예술학도와 기술학도가 만나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만들려고 할 때 상대편 공과 대학에 준하는 학위 시스템과 균형이 맞아야 하고, 이를 통해 한예종의 박사 과정생과 어느 공과대학의 박사 과정생이 함께 연계된 교과를 통해 상상력과 기술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작년에 총장으로 취임할 때, 2022년에 있을 개원 30주년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분명 학교의 역사 30년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할 테지만, 한편으로 향후 30년을 내다보는 시간이기도 할 텐데, 그러한 미래를 위한 구상으로 설치법 개정안을 생각했다. 예술계를 위한 새로운 비전 제시와 이를 위한 상상력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실질적인 변화와 실용적인 노선의 변화도 큰 역할을 하리라 본다. 따라서 설치법은 학생들을 위한 실용적인 노선이다.
한예종은 국내외 여러 예술학교와 교류 중이고, 학교의 청사진 설계를 위해 여러 예술학교의 정보를 탐색했을 텐데, 세계 명문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가.
명문 학교들은 예술 현장과의 협업 구조를 굉장히 잘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뉴욕 줄리어드 예술학교는 링컨센터와, 빈 국립음대는 무지크페라인과, 뉴욕 대학교는 인근 공공 연극공연장과 연계의 고리가 튼튼하다. 이처럼 연계된 구조를 통해 학생들이 성장의 시간을 갖는 것은 기본이고,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시너지도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런 학교들의 우수사례를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하려고 한다.
유럽에는 ‘학교’가 중심이 된 예술단체나 연구소, 갤러리 등이 있다.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 독일 카를스루 예술대학을 거점으로 하는 미디어아트센터(ZKM, Zentrum für Kunst und Medien), 영국 왕립미술아카데미 갤러리 등이 그 예다. 한예종을 토대로 이러한 구상을 해본 적이 없는지 궁금하다. 한예종 오케스트라의 상설화, 서초동 ‘이강숙홀’이나 석관동 캠퍼스의 ‘이어령 예술극장’의 적극적인 개방과 활성화 등이 예가 될 수 있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교에 대한 인지도도 올라갈 것 같은데.
대외 인지도나 학교 기관, 단체의 활성화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예술학교답게 예술 활동이라 생각한다. 나도 줄리어드 음악원 재학 당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학교 측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수요일 1시에 음악회를 열었는데 외부인들을 위한 교내 행사였고,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학교의 분위기와 예술을 즐길 수 있었다. 한예종도 ‘K-Arts 런치 콘서트’를 이강숙홀에서 3년째 진행하고 있다. 지난 10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한 한재민(첼로)도 콩쿠르에 나가기 전에 공연했는데 이강호 음악원장이 직접 해설을 맡기도 했다. ‘K-Arts 런치 콘서트’가 점점 브랜드를 갖춰 나가고 있고 이젠 제법 찾는 이들도 많다.
석관동 교사에도 작은 연못이 있는데 이곳에서 야외 공연을 하기도 한다. 야외인 만큼 지나가던 학생들이나 산보객들이 자유롭게 감상한다. 공연을 볼 때마다 관람하는 학생들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곤 하는데, 전공 공부에 쫓기는 그들이 이를 통해 또 하나의 예술을 알아가는 재미와 깨달음이 담긴 표정이 보이곤 한다.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 현장의 선배들과 졸업생들이 재학생들과 함께하며 노하우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한예종에 동문회는 있지만, 기능과 역할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총장직을 맡으면서 동문회를 재구성했고, 진선규 배우가 동문회장을 선뜻 맡아주었다. 연극원 출신의 진 배우는 연기도 일품이지만, 인간미도 넘치고 애교심도 많다. 그가 동문회 변화와 필요성에 십분 공감하고 회장직을 흔쾌히 수락해줘서 30주년을 맞이하면서 재정비했다. 앞으로 동문회의 활동도 많이 기대해 주기 바란다.
1994년 교수로 부임한 뒤 28년의 세월을 보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잊혀지는 것도 있고 어려웠던 시절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뀌기도 하는 것 같다. 2020년 12월에 이강숙 전 총장님이 돌아가시고 추도식이 서초동 캠퍼스에서 있었다. 고인의 업적을 마지막으로 보여드리고자 영정 사진을 들고 캠퍼스를 한 바퀴 돌았는데, 눈에는 눈물이 나고 가슴에는 사명 의식 같은 게 움트더라. 그러면서 전 총장님의 기와 뜻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설립자의 철학이 이어진다는 것은 힘들다. 서초동 KNUA홀을 ‘이강숙홀’로 명칭을 바꾼 것도 당신의 존재와 이름을 통해 학생들이 설립자의 의지와 의도, 비전을 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30주년을 맞아 향후 30년의 대계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앞으로 한예종을 어떤 학교로 이끌어나가고 싶은가.
개교했을 당시에는 총장과 교수, 학생들이 ‘신생 학교로서 증명하고 입증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를 위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다 보니 주변 예술대학과의 교류도 없었고 오로지 사명감으로 이 시간을 헤쳐 나왔다. 이제는 성과 쌓기와 증명의 시간을 넘어 주변도 살피고 교류도 하고 학교의 교육 자원이 사회로 녹아들어야 하는 시간이 온 것 같다. 학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증명’의 시간을 지나, 사회와 ‘공명’하기 위한 시간으로 접어들었다. 고독한 커뮤니티에서 벗어나 함께 하자고 사회에 먼저 손 내미는 학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글 송현민(편집장) “학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증명’의 시간을 지나, 사회와 ‘공명’하기 위한 시간으로 접어들었다. 고독한 커뮤니티에서 벗어나 함께 하자고 사회에 먼저 손 내미는 학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글 송현민(편집장)
Part 3 | Interview_ Dean
음악원 원장 이강호
세계 음악계의 리더 만들기
음악원은 이제 세계 음악 교육의 방향성까지 제시하는 ‘퍼스트 무버’를 꿈꾼다
음악에 대한 애정으로 모인 학생들이 예술혼을 불태우며, 교수들은 교육에 오롯이 헌신하는 곳. 이강호 원장이 묘사하는 음악원의 일면이다. 이들은 국제무대에서 인정받는 음악가들을 배출하며, 국내 음악 교육에 파장을 가져왔다. 음악원(성악과·기악과·작곡과·지휘과·음악학과·음악테크놀러지과)은 이제 세계 음악 교육의 변화를 이끌 꿈을 꾸고 있다. 지난 30년이 국제의 룰을 따라잡은 ‘패스트 팔로우’로서의 시간이었다면, 다가올 30년은 룰을 직접 세계에 제시할 ‘퍼스트 무버’로 거듭날 시기다.
음악원의 성과는 국제 콩쿠르 수상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내부에서 느끼는 관심의 방식은 다양하다. 국내외에서 졸업생들의 활약을 피부로 많이 느낀다. 올해는 한예종 오케스트라가 폴란드 베토벤 페스티벌에 초청받기도 했는데, 내년 봄 개막 공연으로 다시 초청받았다. 우리의 교육 방식 자체에 대한 관심도 느껴지고 있어, 다방면의 변화를 주도해나가고 있는 상태다.
기존 음악대학과 다른 ‘실기 중심의 교육’을 강조했다. 이를 반영한 대표적인 커리큘럼이 있다면.
처음 부임했을 때 ‘서양음악문법’ 수업이 참 인상적이었다. 음악적 이론들을, 실기를 잘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언어 방식으로 인식한다는 교육 철학이 돋보였다. 커리큘럼의 상호작용이 잘 이뤄져, 좋은 연주자를 만드는 것이 학교의 방향이다. 음악원은 매 학기 시험을 위한 과제곡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피아노과의 경우 40여 분의 독주 프로그램을 소화해야 해서, 실기 시험만 1주일이 넘게 걸린다. 첼로도 마찬가지로 콩쿠르의 모든 라운드를 소화할 수 있는 양을 요구하고 있다. 학생들을 연주가로 키워내겠다는게 철학이고, 타 음악대학과의 차별점이다.
어린 나이에 주목받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있다. 조기 교육 접근 방식에 대한 노하우가 있다면.
중요한 것은 재능 있는 아이들을 발굴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고, 시행착오 없이 성장하도록 기초와 방향을 잡아 주는 것이다. 조기 교육은 중요하고, 일찍 주목받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음악에 대한 올바른 훈련이다.
앞으로 음악원이 추구할 교육의 주요 방향은.
한동안 이강숙 전 총장님이 말씀하신 ‘미래의 고전을 만들다’가 한예종의 비전이었다. ‘고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치다. 이제 음악원이 교육 기관으로서 방향을 제시하는 선구자 역할을 하길 바란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음악가들을 키워내고 싶다.
현재 설치법 제정을 통해 학위 수여가 가능하도록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음악원 내에서 느끼는 학위 인정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여러 필요성이 있지만 앞서 말한, 글로벌한 교육기관으로서 뻗어나가기 위해서라도 학위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타 교육기관과 동등한 학위로 인정되지 못하면 교류에도 어려움이 생긴다. 교육의 영향력을 잘 펼칠 수 있도록 환경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예술 현장의 변화와 함께 학생들의 관점도 달라지고 있다. 이를 수용하는 교육 시스템의 변화는 어떤 과정에 있나.
국제적 활동의 범위가 늘어나고 있다. 콩쿠르는 물론, 오케스트라 등에서 많은 학생이 활약하고 있다. 이를 잘 뒷받침할 수 있도록 교육기관의 학위가 인정되길 바라고 있다. 또한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학교 내에서 K-Arts 오디션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도록 기회를 만들고 있다.
글 허서현 기자
이강호(1971~) 예일대·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펜데레츠키 콩쿠르·포퍼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2012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로 재직, 지난해 9월 음악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연극원 원장 김미희
소통·배려·성숙으로 무대를 만든다는 것
유명인들이 거쳐간 연극원의 히든 커리큘럼
연극계는 팬데믹 이후 직접성·시간성·동시성 등 연극이 갖는 전통적인 특성들에 끊임없는 위기를 겪으며 많은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연극원(연기과·연출과·극작과·무대미술과·연극학과)은 다시 전통적인 무대와 극장이라는 공간을 지표 삼아 예술가들의 상상력으로 동시대의 감각을 새롭게 할 예술가들을 양성하고 있다.
총장 이강숙은 언제나 ‘히든 커리큘럼’을 강조해왔다. 연극원 대부분의 수업과 작업은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기에 협업할 수 있는 소통의 자세도 중요할 것 같다.
‘연극원’이라는 정체성은 결국 공연이라는 최종적인 결과와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다. 학생들은 각자의 전공에 해당하는 역할로 공연 수업에 들어오지만, 하나의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서로 소통하고 배려하는 공동작업 자체가 가장 핵심적인 ‘히든 커리큘럼’이다.
특히 연극은 동시대성이 적극적으로 적용되는 예술 분야인 만큼 사회를 읽어내는 능력도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기술이나 기량의 습득과 함께 실험적이고 열린 정신을 배우는 수업들이 균형 있게 교육과정에 스며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극계는 특히 ‘미투 운동’의 영향을 받아 최근 연극원 출신 예술가들의 젠더 감수성이 대단히 높다. 그러나 원론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인간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으로 넘어갔으면 한다. 모든 성적 차이를 존중하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권들과 충돌할 때가 종종 있다. 이와 같은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결국 인문학적인 지식으로 현상들을 넓게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코로나 이후 비대면 공연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무대와 객석’이 아닌 ‘화면·객석·무대’로 폭이 넓어졌다. 이러한 변화를 위한 교육 시스템은 어떻게 전환되고 있는가?
무대예술과 영상예술은 유사한 부분이 존재하지만, 그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 학교에서는 ‘카메라 연기’ 과정을 통해 무대예술과 영상예술에 대한 특성과 차이를 인지하고 각 분야의 어법에 맞는 접근 방법을 찾도록 교육하고 있다.
무대미술과가 연극원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무대란 공연예술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미적 감각을 활용해 무대가 꾸며지기에 미술의 영역에 속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공연예술은 시각적 언어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각적인 분야를 활용하여 서사를 만드는 적극적인 작업이다. 무대 외에도 유튜브와 같은 영상 언어를 포함한 시청각적인 요소를 자유롭게 구사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연극원은 2024년에 30주년을 맞는다. 연극원 내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교육과정이나 계획이 궁금하다.
시대와 기술의 변화가 연극에 요구하는 다양한 분야와의 융복합 작업을 위해 선택 수업이나 워크숍을 열고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다양한 연극적 실험이 가능하도록 할 예정이다. 또한 지난 25년간 연극원에서 진행된 정기공연, 졸업 공연 등을 디지털화하여 졸업생과 연구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아카이빙 작업을 해왔다. 하반기에 마무리되는 아카이빙은 내년에 플랫폼 형식으로 개설할 예정이다.
글 임원빈 기자
김미희(1963~)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일대 연극대학원 MFA과정을 마쳤으며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 원장, 여성활동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다. 현재 연극원 원장을 비롯해 한국연극학회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이사직을 맡고 있다.
영상원 원장 남수영
영화를 사랑하는
청춘들의 총집합체
소수정예들이 모여 실기위주로 성장하는 곳
학생들이 읽었으면 하는 도서가 있냐는 질문에 ‘이미 입학 전에 추천 도서를 다 읽고 온다’라는 답이 돌아온다. 석·박사 과정을 이어가는 학생들과 비슷한 고민을 나누니, 그들이 어느새 제자보다 동료 같다고.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모인 곳, 영상원(영화과·방송영상과·멀티미디어영상과·애니메이션과·영상이론과)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영상원만의 강점이 무엇인가?
소수정예로 학생을 선별한다는 점이 우선이다. 수업도 10명 이내로 실기 능력을 특히나 집중적으로 교육한다. 이 과정에서 선후배 간의 교류도 이루어져 실전 기술을 직접 전수하기에, 졸업 이후 곧바로 현장에 투입될 수 있게 한다.
예술사와 예술전문사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학사와 석사과정으로 설명하지만, 전문사를 예술사 ‘다음’ 단계라고만 할 수는 없다. 예술사는 영상 실기를 두루 익힌다면, 전문사는 보다 직업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방송영상과의 전문사 과정은 학생을 ‘다큐멘터리 작가’로 키우는 것이 그 예이다.
예술 현장의 변화가 커리큘럼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궁금하다.
영상 분야의 특징은 전문가와 일반 관객의 격차가 작다는 것이다. 관객이 트렌드를 가장 먼저 눈치챈다. 우리 학생들은 그중 가장 열심히 참여하는 관객이고. 다행히 영상원 교수진은 대부분 지금도 현장에서 작업하는 이들로, 예술 현장을 교육 현장으로 옮기는 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첨단 융복합 콘텐츠를 교육에 반영하기 위해 포항공대·고려대 대학원과 ‘산학협력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영상원은 그 어떤 전공보다 장비 체계와 지원이 중요하다.
그렇다. 개원 초기부터 스튜디오와 영상 장비를 갖추는 것을 가장 중요한 업무로 여겼다. 스튜디오는 미국의 영화학교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갖추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기자재와 장비예산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연차가 올라가는 학생들에게 좋은 장비를 제공해주려 노력하고 있다. 졸업을 앞둔 학생이나 전문사 과정에는 최첨단 장비를 개방하고 있으며, 영화과 전문사의 경우 ‘장편영화워크숍’에서 연간 3편 이내, 총 3억 원의 제작비를 지원한다.
각 과의 특징 또는 최근 행보를 간단히 소개한다면.
영화과는 최근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서 2등 상(윤대원)을 받는 등 좋은 실적을 꾸준히 남기고 있다. 방송영상과는 텔레비전을 대체하는 OTT 플랫폼에 적응하고 있다. 이에 맞춘 시나리오 특강이 열리기도 한다. 멀티미디어영상과는 컴퓨터 그래픽 최신 기술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VR과 SFX, 메타버스 환경의 작업을 다루고 있다. 애니메이션과는 ‘그리기 작업’을 움직임의 흐름으로 이어내는 과이다. 최근 소식으로는 안시국제애니메이션에서 1위(문수진)를 수상했다. 영상이론과는 이론과 연구를 중심으로 운영되며, 다른 과와 실제적 소통에 항상 활발히 참여한다. 매년 졸업작품 상영회에서 기획·모더레이터 등으로 협업한다.
글 이의정 기자
남수영(1972~) 워싱턴대 비교문학 학사·시카고대 인문학 석사·뉴욕대 비교문학 박사를 취득했다. 2021년 한국비평이론학회에서 우수논문상을 받은 그는 2010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2021년 9월 영상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무용원 원장 김삼진
현장을 품고, 한계를 벗어나다
장르 불문하고 실기·창작·이론만으로 나뉜 무용 교육의 장
김삼진 원장에게는 1995년 한 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연극원에서 학생들의 신체 훈련을 담당하던 그를 불러, 이강숙 전 총장은 “6개월 후에 무용원을 열 것이다. 어떻게 구성하는 것이 좋겠냐”고 물었다. “발레와 현대무용, 한국무용으로 나뉜 기존의 방식이 아닌, 실기-창작-이론 전공이 있어야 한다”고 대답한 지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 전공은 각각의 갈래에서 성과를 거두는 동시에, 협업을 통한 창의적 작업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1996년 무용원(실기과·창작과·이론과)이 시작된 이래, 다양한 성과를 얻었다. 가장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무용원은 실기와 창작, 이론으로 전공이 나뉘어 있다. 실기과는 세계 각지의 발레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다수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창작과 졸업생들은 직접 함께 단체를 창단해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론과는 현재 한예종에만 있는 분야로, 매년 무용 미학과 무용 인류학, 무용 과학 분야의 국내외 저명한 학자들을 초청해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데에 그 의미가 크다.
전공별로 어떤 교육이 이뤄지나.
실기과는 높은 수준의 신체적 표현을, 창작과는 실험적이면서 독자적인 예술관을 가진 안무가 양성을, 이론과는 인문학적 소양과 분석적 사고가 가능한 비평가 및 실무자 양성에 초점을 맞춘다. 전통적 성격의 교과목과 더불어 춤 현장에서 요구하는 협업 작업 능력의 향상을 위해 세 전공의 학생들이 팀을 이루기도 한다. 이들은 주도적으로 작품을 만들고, 전공 교수진들은 이들의 작업이 창의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함께 힘을 쏟고 있다.
해외 예술가들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다.
과마다 국제적 시야를 가진 안무가나 무용가를 초대했고, 초빙교수제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학생들도 해외에 적극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게 된다.
설치법 제정에 대해 무용원에서 느끼는 필요성도 크다고.
예전에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던 이유는 당시 일반 예술대학에 박사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많은 대학에 개설되었고, 오히려 우리 학교만 개설을 못 하는 실정이다. 해외 대학들과의 교류를 위해서는 학위가 필요하다. 그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서로의 상생에 대한 이해가 있길 바란다.
무용원에서 목표로 하는 졸업생들의 예술적 완성도는 무엇인가.
전공별로 역량은 다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열려 있는 시야, 예술적 안목, 협력할 수 있는 태도는 졸업생 모두가 함양해야 하는 역량이다.
시대에 변화에 따라 학생들이 추구하는 가치도 많이 달라졌을 텐데.
학생들이 정보를 얻고 수용하는 방식은 방대해졌다. 학교의 역할은 지식 전달 기관 이상의 것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특히 예술교육은 생각의 장을 펼치는 역할로 전환되어야 한다. 다양한 가치를 실험하며, 무엇보다 그 안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발견하는 중심에 자리해야 한다. 좋은 울타리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청년예술가 일자리지원센터’(현재 산학협력단에서 운영 중)를 통해 청년 예술가들의 활동을 돕는 데에도 힘쓰고 있다.
글 허서현 기자
김삼진(1961~) 한양대 박사 과정을 졸업하고, 1984년 김삼진 무용단을 창단했다. 대표작 ‘야회’ ‘시계 보는 아이’ 등이 있으며, 지난해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이사장으로 임명됐다. 1996년부터 무용원 교수로 재직, 2021년 3월 무용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미술원 원장 정주영
새로움을 그릴 용기
미술뿐 아니라 건축·과학까지 아우르는 융합의 효과
정주영은 2006년 미술원(디자인과·조형예술과·건축과·미술이론과) 교수로 임용되어, 학과장과 부원장을 거치며 16년간 교육자로서 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학과장으로서는 타과로 시야를 넓혔고, 부원장으로서는 행정과 실무를 배웠다”라고 소회를 밝히며 “이제 다른 원과 학교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그동안의 세월 동안 느낀 가장 큰 변화로 ‘세대 교체’라고 손꼽았다. 무엇보다 교육자이기 이전에 화가이기도 한 그는 스스로 구축해온 것을 갱신하는 것을 예술관으로 삼았다. 그러한 예술관은 그의 교육관과도 일치한다고 전했다.
미술원의 모든 전공은 회화·공예·건축·디자인 등의 분야에 고르게 숙달된 예술인을 양성하는 걸 목표 삼고 있다. 통합적인 교육 방식을 도입한 이유가 궁금하다.
네 개 학과는 각 분야의 고유성과 전문성에 기반한 가치를 존중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계로 인해 간과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서는 분야를 가로지르는 창의성과 경계를 넘어선 사고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예술 장르들이 갖는 차이와 다양성을 이해하고, 이들을 관통하는 본질·태도·관점을 통합적으로 실천하는 교육이 중요하다.
이러한 미술원의 목표는 공과대학에 소속되어야 할 건축과가 미술원에 편입되어 있는 것을 보면 잘 드러나 있는 것 같다.
건축과가 미술대학에 있는 것은 한예종이 유일하다. 건축과의 교육목표 중 하나는 ‘창조적 예술가로서의 건축가 양성’이다. 공학적 측면을 넘어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건축가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건축가의 ‘사관학교’였던 바우하우스(Bauhaus) 역시 ‘미래의 새로운 건축을 위해 조각, 회화와 같은 순수미술과 공예와 같은 응용미술이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목표를 안고 설립되었다.
경계 없는 사고와 다양한 매체를 훈련하고 융합함으로서 전통적 예술의 벽을 허무는 훈련을 한다. 이러한 교육에는 이론과 실무가 균형을 이룬 체계적 교육과정도 덧붙여 진다. 비영어권 국가로서는 최초로 2006년 영국왕립건축가협회(RIBA)의 건축교육인증을 획득했고, 2015년 한국건축학교육인증원(KAAB)으로부터 건축교육학 인증을 획득하여 그 균형을 맞추고 있다.
기술은 예술과 이미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AI, 데이터 등 미술 외적인 요소를 끌어와 융합한 작품들은 이미 옛것이 되었다. 선제적인 교육이 필요한 시점인데, 이를 위해 미술원 내 어떠한 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미술과 과학’이라는 정규 교과목 외에도 카이스트(KAIST)나 포항공대와 정규학기 및 계절학기에 교류수학을 할 수 있도록 시행 중이다. 향후 그 협업의 장을 확대해 실질적 교류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현재 잘 갖춰진 전통적 공방 외에 새로운 기술 관련 실습실(Lab)을 강화하기 위한 지원 계획도 마련할 예정이다.
임기는 총 2년이다.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가 있다면?
미술원은 2027년에 30주년을 맞는다. 원의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통해 협력과 통합의 분위기를 만들 것이다.
글 임원빈 기자
정주영(1969~) 서울대 서양화과와 뒤셀도르프 미술대를 졸업했다. 주요 개인전 ‘살과 금’(누크 갤러리) ‘풍경의 얼굴’(갤러리 현대) 등이 있다. 2006년 미술원 교수로 재직을 시작했으며 2022년 9월 미술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전통예술원 원장 임준희
지금 만드는 미래의 전통
현장 경험 풍부한 교수진 채용으로 이뤄낸 새로운 전통
밤낮없이 연습실에서 들려오는 악기 소리와 무용 연습 소리는 교수에게도 뜨거운 열정을 안겨준다. 기억에 남는 일화 중 버스킹으로 산티아고를 순례하던 제자 이야기를 전하는 임준희는 그들의 열정이 전통예술원(한국예술학과·음악과·무용과·연희과·한국음악작곡과)의 큰 자랑이라 밝히며, 학생들의 조력자가 되고 싶다고 전한다.
전통예술원이 바라는 인재상이 궁금하다.
설립 목적에 맞게 전공 분야의 탁월한 예술성을 성취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순수 전통예술의 전수를 넘어, 개인의 삶이 예술로 행복함과 동시에 경제적 안정도 고려할 수 있는 현실성을 고루 갖추길 바란다. 나아가 현시대는 실기 외에 인문학 교육도 놓쳐서는 안 된다. 전공마다 완성도 있는 논문 제출을 요구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사회 진출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나?
전통예술원의 특징은 다른 전공과 팀을 이루어 활발한 공연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다. 다양한 협업 무대에 오르고 있는 전통예술 앙상블 팀들이 그 예다. 현재도 가야금 앙상블 280·대금 앙상블 취·해금 앙상블 에헤이요 등이 있다. 나아가 졸업 후에도 팀 활동이 지속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시나위 앙상블·잠비나이·불세출·악단광칠·상자루 등이 그 과정을 지나 성장한 팀들이다.
전통예술이지만 시대에 적응하는 것을 바라는 것 같다.
설립부터 지금까지 전통예술의 보존뿐만 아니라 새로운 창조와 현대적 계승에도 신경 쓰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전통음악이 그 시대에는 새로운 현대음악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맞춘 창작 또한 미래의 전통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한국음악작곡과 뿐만 아니라 전통예술원 다른 과도 창작을 시도한다고.
그렇다. 음악과·무용과·연희과·작곡과 모두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새로운 창작작품에 도전한다. 정기연주회의 절반 이상이 학생이 직접 창작한 작품으로 구성된다.
연희과는 창설 시도 교수진으로 화제를 모았다.
사물놀이의 창시자이자 연희현장의 살아있는 역사인 김덕수 교수가 재직했던 탓에 차별적인 커리큘럼이 있는 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풍물·탈춤·무속·전문예인집단 등 전통연희를 총망라하는 교육과정을 가지고 있다.
한국음악작곡과가 음악원의 작곡과와 협업하기도 하나?
이 과는 서양음악을 작곡하는 음악원 작곡과와 혼동되지 않게 ‘한국음악작곡과’라 명명하였지만, 전통악기를 사용하는 작곡은 물론 전통음악의 토대 위에 행해지는 모든 작품을 다룬다. 전통악기와 서양악기의 결합작품·무용음악·음악극·연희극·뮤지컬·영화음악·컴퓨터 음악 등 현시대 모든 장르에 참여 중이다.
음악원 작곡과와의 교류가 활발한 것도 사실이다. 학생들끼리 서로 부전공을 신청해 수업을 듣고 함께 작품발표를 하는 협력관계에 있다. 추가로 전통예술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K-ARTS 국제작곡콩쿨’에도 음악원 교수진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하는 등 학교 차원에서도 두 과의 협력에 직접적으로 힘쓰고 있다.
글 이의정 기자
임준희(1959~) 연세대·인디애나 대학에서 작곡 학사·박사를 취득했다. 오페라 ‘천생연분’ ‘시집가는 날’ 칸타타 ‘어부사시사’ ‘한강’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대한민국 작곡상 최우수상, 난파음악상 등을 수상했다. 2020년 3월 전통예술원장으로 취임했다.
Part 4 | Interview_ Alumni
한예종 총동문회장·배우 진선규
소통과 협업으로 새롭게
학생들의 열정에 선배들 경험 보태고 싶다
진선규의 연기 인생에서 한예종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아내이자 배우인 박보경과는 같은 과 선후배 사이이며, 졸업 후에는 동문들과 함께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를 설립해 10여 년 넘게 연기 활동을 이어왔다. 지난 2019년, 영화 ‘극한직업’으로 ‘천만배우’가 된 지금도 후배 배우들은 그를 ‘한예종 선배’로 기억한다. 그의 삶의 궤적을 좇다 보면, 지난 5월 한예종 제2대 총동문회장으로 그가 선출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 ‘한예종 선배’에서 ‘한예종 총동문회장’이 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예종의 제2대 총동문회장 선출을 축하한다. 소감이 궁금하다.
총동문회장에 선출됐을 때, ‘이 자리에 걸맞은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는 힘들겠지만, 동문들과 함께 소통하며 활기찬 총동문회를 만들고 싶다.
개교 30주년을 맞은 해인 만큼 총동문회장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다.
총동문회의 입지를 다지고, 동문의 화합을 도모하는 것이 우선 과제이지만, 이 과정에서 생기는 동문 간의 협업이나 사업을 구상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로서는 졸업한 선배의 입장에서 후배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연극원 3기 졸업생이다. 당시 학업 분위기는 어땠나?
2000년대 초반의 한예종의 6개원 수업들은 전문적인 예술인의 기초 양성 단계였던 것 같다. 각 원내에서 협업 작업이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꿈을 품은 학도들이 모인 곳인 만큼 연극원의 많은 연출가와 배우들이 뜨거운 열정을 갖고 공부했다. 대학로에 데뷔하는 이들도 많았고, 교내 공연에 대한 외부의 관심도 집중되어 있었다.
뜨거웠던 열정을 가진 학생 중에는 진선규도 있었을 텐데, 당시 무엇에 관심이 있었나?
연기만큼이나 몸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았다. 언어나 표정, 감정보다는 몸으로 많은 것들을 표현하는 연습이 참 즐거웠다. 그래서 ‘움직임’ 수업이라든지, 현대무용, 전통무용을 배우는 ‘박(拍)과 사위’ 등의 수업을 들으며 온몸을 이용해 표현하는 방식을 익혔다. 졸업 전, 같이 운동하던 친구들과 몸으로 하는 공연을 만들어 대학로에서 장기 공연도 하게 되었다. 그 공연을 계기로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가 탄생했다.
총동문회장으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궁금하다.
유능하고 실력 있는 동문들이 협업할 수 있는 사업을 해보고 싶다. 함께 예술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창작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
글 홍예원 수습기자 사진 엘줄라이엔터테인먼트
진선규(1977~)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를 졸업했다. 2004년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연극 ‘거울공주 평강이야기’로 데뷔한 그는 제38회 청룡영화제에서 영화 ‘극한직업’으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