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NT
한국-유럽연합 수교 60주년 기념 유럽 순회공연
외교의 다리에서 만난 한국 클래식의 힘
벨기에,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서 만난 한국 젊은 음악가들의 저력과 관객들의 반응
작년은 한국과 유럽연합(European Union/EU)의 수교 60주년인 해였다. 이를 기념하고자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와 주벨기에·유럽연합한국문화원(원장 김동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원장 정길화)이 유럽에서 순회공연을 진행했다. 작년 11월 14일에 시작된 공연은 올해 1월 17일까지 유럽 5개국 7회 공연으로 이어졌다.
발트앙상블의 첼리스트들이 모인 발트첼로앙상블의 11월 14일 주오스트리아 한국문화원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28일 벨기에 플라제에 황수미(소프라노)와 김태한(바리톤)이 헬무트 도이치(피아노)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올해 1월에는 5개국에서 다섯 공연이 펼쳐졌다. 10일과 14일에 발트앙상블과 문지영(피아노)이 함께 브뤼셀 플라제와 빈 무지크페어아인(브람스홀)에 올랐고, 이지혜(바이올린)와 문지영의 듀오 공연이 15일 로마 바스텔로 극장과 16일 마드리드 시르쿨로 데 베야스 극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문지영의 독주회가 17일 부다페스트 리스트음악원 솔티홀에서 있었다.
‘다양성’의 나라 벨기에에서
유럽연합은 1951년에 설립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로부터 출발해 1957년 유럽원자력공동체(EEC)로 창설되었다. 1963년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유럽연합은 냉전이 끝난 1990년대에 에너지 자원은 물론 안보 및 외교 분야까지 교류를 확장했고, 현재는 한국과 다방면의 외교를 통한 협력과 교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브뤼셀은 벨기에의 수도이자 유럽연합 의회가 있는 곳이다. 음악계에 벨기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나라이자,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선호하는 외젠 이자이(1858~1931)의 나라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을 주도한 주벨기에한국문화원은 2013년 개원했다. 길 건너로 벨기에 왕립미술관과 마그리트 미술관을 비롯해 인근에 악기박물관과 보자르 예술센터가 있었다.
벨기에는 다국적 나라답게 표기법이 대부분 프랑스어·영어·네덜란드어·독일어로 되어 있었다. 미술관의 작품 제목도 4개 국어로 된 ‘4줄’짜리 소개가 대부분이었다.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다보니 손에 잡히는 안내서 분량은 두툼하고, 각각의 언어가 많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으니 텍스트의 분량은 간결하다. 다양성을 위한 공존과 양보의 미덕이랄까. 생각해보면 벨기에가 현대무용의 강국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발레처럼 ‘전통’과 ‘전형성’이 강한 예술보다 추상적 표현을 통해 다국적 보편성을 취득하는 것이 이들이 문화를 향유·소비하는 방식 중 하나인 것이었다. 브뤼셀 필하모닉의 시즌 프로그램도 그러했다. 다국적 문화권의 악단은 일본 지휘자 오노 가즈시가 감독이었고, 2023/24 시즌의 레퍼토리에는 호소카와 토시오(일본)를 비롯한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이 고전과 공존하고 있었다.
1월 10일 오후 8시 브뤼셀 플라제에 오른 발트앙상블 공연은 이러한 벨기에의 문화와 닮은 ‘다양성’이 돋보였다. 폴란드 여성작곡가 그라지나 바체비치(1909~1969)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현악 앙상블 편곡 버전),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Op.48 등 고전적 낭만과 동시대적 감각이 공존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발트앙상블이 충족시킨 조건
발트앙상블은 독일 노트하우젠 오케스트라 단원인 최경환(비올라)이 대표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제2악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인 이지혜가 음악감독인 현악 실내악단이다. 김미린 주벨기에한국문화원 실무관은 수교를 기념하는 이번 공연에서 발트앙상블과 함께 한 이유가 “한국 클래식 음악의 젊음과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교향악단이나 앙상블이 유럽 순회공연을 가질 때, 몇몇 단원을 유럽 현지에서 공수해 객원으로 초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좋은 연주를 선보이기 위한 특별방책이지만, 현지 관객들의 시선에 ‘앙상블 구성원이 전원 동일 국적인가’는 늘 중요한 화두가 되곤 한다. 예를 들어 30여 년 전인 1995년 KBS교향악단이 UN창설 50주년을 위해 UN본부에서 공연을 가졌을 때, 한국 지휘자 정명훈과 함께, 김덕수패 사물놀이가 함께 하는 강준일(작곡)의 협주곡을 전략적으로 선보인 적이 있다. 이처럼 한국인으로만 이뤄진 앙상블과 음악적 화력을 외지에서 어떻게 드러내는가는 중요한 전략이다. 그런 점에서 발트앙상블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단체였다. 젊으며, 멤버들 대부분이 유럽 교향악단의 단원으로 활동하고, 전원이 한국의 청년음악가라는 점.
브뤼셀 플라제에서의 감동
플라제 무대에 오른 21명 음악가는 결구가 깔끔하게 맞아 떨어지는 합의 미학으로 바체비치의 현악 협주곡을 선보였다. 현을 위한 세레나데(차이콥스키)에서도 역동적인 움직임과 깔끔한 조화는 현지 관객들의 큰 박수를 끌어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유럽 교향악단에서 실전의 공연을 치르고 있는 첼로·비올라·더블베이스 단원이 일구는 중저음은 일품이었다.
플라제는 우리에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경연장으로 알러져 있다. 로비에는 올해 개최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알리는 붉은색 브로슈어가 곳곳에 비치되어 있었다. 공연장의 음향이 객석 위치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느껴지는 변수와 단점이 있었지만, 공연 뒤 만난 현지 관객들은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아요브는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은 소녀였다. “한국의 문화가 궁금해 찾게 된 공연이었다”라며 “차이콥스키와 쇼팽은 잘 알지만 바체비치는 이번 공연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어 소설을 들고 있던 아요브는 한국문화원도 자주 찾는다고 한다. 또 다른 관객 브라쇠르는 나이가 지긋한 여성이었다. “브뤼셀 라 모네 왕립극장에서 오페라 공연을 즐겨본다”는 그녀는 작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우승자 김태환(바리톤)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국 성악가들의 공연은 종종 보는데 기악 연주자들의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라며 “발트앙상블의 이름을 꼭 기억하겠다”고 했다.
음악과 예술의 도시 빈으로
1월 14일 빈 무지크페어아인 공연을 앞둔 발트앙상블 단원들이 리허설을 위해 13일에 오스트리아 한국문화원으로 모였다. 한국문화원은 빈 슈타츠오퍼에서 도보로 3~4분 거리에 있었다. 토요일 오후였는데, 다른 층에서 열리는 한국문화 강좌를 위해 현지인들이 부지런히 건물을 드나들었다. 발트앙상블이 모인 홀에는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빈 무지크페어아인은 브뤼셀 플라제와 음향의 결이 달랐다. 통로를 가운데 두고 메인홀(황금홀)과 바로 맞붙은 브람스홀은 600석 규모의 홀이었다. 황금색으로 채색된 내벽, 화려한 샹들리에, 한눈에 봐도 오랜 시간을 머금은 의자들, 삐거덕 거리는 바닥은 이 홀이 머금은 역사와 시간을 대변하는 듯 했다. 발트 앙상블은 브뤼셀 플라제와 같은 레퍼토리로 무대에 올랐다.
브뤼셀에서나 빈에서든 이지혜 음악감독의 역량은 대단했다. 지휘자가 없는 21명의 현악 앙상블은 그녀의 몸짓에 따라 소리의 결구를 맞춰나갔다. 그를 보좌하는 이경은(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단원)의 눈빛, 설민경(밤베르크 심포니 부악장)의 호흡도 바이올린 파트 전체에 힘을 실어주었다. 공연 전에 이지혜는 “오늘(1월 14일)은 제가 재직한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 마리슨 얀손스의 생일이었어요. 그는 생전에 교향악단과 무지크페어라인을 자주 찾았는데, 그런 그와의 추억이 오늘따라 더욱 값지게 느껴집니다”라고 했다.
한국 연주자들이 선사한 유럽음악의 ‘정통성’
빈은 음악사에 ‘혁명’을 일으킨 쇤베르크의 도시이기도 했지만, ‘전통’과 ‘정통’의 도시이기도 했다. 브뤼셀에서 ‘다양성’에 방점을 찍었던 발트앙상블은 연주에 ‘정통성’과 ‘무게’를 담았다. 관객은 바체비치의 작품보다 유서 깊은 쇼팽과 차이콥스키 음악에 더욱 반응했다. 특히 관악·타악기가 없는 쇼팽 피아노 협주곡 편곡 버전은 교향악단의 여러 악기에 가려져있던 피아노 소리를 오히려 도드라지게 했다. 피아노 협주곡이기보다, 피아노와 현악 앙상블이 함께 하는 실내악의 느낌으로 쇼팽이 다가왔으니, 단연 문지영의 연주가 빛났고, 많은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독일어로 ‘숲’을 뜻하는 ‘발트’라는 이름에서 친근함이 느껴져 공연을 찾았다”는 파트흐릭 욘트는 “작년 한국문화원에서 공연한 발트첼로앙상블에 이어 이번 공연도 찾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진 그의 말에는 재치가 녹아 있었다. “한국과 유럽연합 6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인데, 작년에 발트앙상블을 만났으니 제게는 한국의 클래식 음악을 알게 된지 1주년이 되는 시간이었다”라고. 일요일 5시에 시작한 공연이 끝나자 빈의 밤이 깊어졌다. 뼈가 시리도록 추웠으나, 현지 관객이 공연에 보여준 관심으로 마음이 따듯하게 녹았다.
임진홍 주오스트리아 한국문화원장은 현지에도 잘 알려진 클래식 마니아였다. 그는 “오스트리아에 근무하고 있지만, 예술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같은 독일어권에 있다”며, “독일에 중심을 둔 발트 앙상블이 앞으로도 오스트리아를 찾아 한국의 클래식을 알리는 기회를 많이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소회를 남겼다.
노래와 유적의 도시 로마로
14일 빈 공연부터 17일 부다페스트 공연까지, 한마디로 강행군이었다. 14일 발트앙상블의 공연이 끝나고, 이지혜와 문지영의 듀오 공연이 15일과 16일에, 문지영의 단독 공연이 17일로 이어졌다. 기상악화로 비행기 운항에 문제가 생긴다면 큰일 날 일정이었다.
아무 일 없이 15일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했다. 빈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빈에서는 자동차 경적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빈의 택시 기사에게 나는 “그러면 빈에서는 음악 소리만 내야겠군요”라며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로마의 택시기사는 좀처럼 틈을 주지 않는다. 노래의 나라답게 라디오에서는 연신 노래가 흘러나왔고, 기사는 그 노래를 연신 따라 불렀다. 겨울바람이 파고들었던 빈과 달리 이탈리아는 봄 같았다. 반팔을 입고 외투를 손에 든 이도 보였다. 빈과 달리 가게마다 음식점마다 음악이 흘러나왔고, 서빙 종업원들은 그것을 따라 흥얼거리기도 했다.
로마에 도착힌 이지혜와 문지영은 오후 8시 30분에 시작하는 공연을 앞두고 곧바로 공연장 리허설에 임했다. 바스첼로 극장은 300석 규모의 다목적홀로 연극과 무용이 더 적합해 보이는 곳이었다. 심지어 브뤼셀이나 빈과 달리 극장의 위치도 주택가여서 관객이 올지 의문스럽기까지 했다.
이탈리아의 ‘노래’와 만난 슈만의 선율
하지만 공연 시간이 임박하자 거짓말처럼 관객이 몰려들었다. 역시 순식간에 타오르고 열을 올릴 줄 아는 이탈리아인들. 공연이 끝난 뒤, 조민경 주이탈리아한국문화원 실무관은 “공연이 시작되고도 관객이 몰려왔지만, 좌석이 부족해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지혜와 문지영 듀오의 선곡과 화력은 탁월했다. 슈만의 ‘세 개의 로망스’ Op.94와 클라라 슈만의 ‘세 개의 로망스’ Op.22, 그리고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이지혜는 꼿꼿이 세운 상체에서 나오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보잉으로 긴 프레이즈를 보여주었고, 문지영은 건반으로 수놓는 점과 아르페지오로 슈만 부부의 노래를 완성해나갔다. 노래의 나라, 성악의 나라에서 관객들은 작품의 화성적 구조보다는 노래처럼 흐르는 멜로디에 심취했다. 이지혜의 역동적인 움직임도 그들의 흥에 불을 지폈다. 로마의 관객들은 솔직하고 기분에 충실했다. 뜨거운 연주자와 뜨거운 관객이 만난 순간. 악장 사이의 침묵을 지키기보다 흥이 오르는 대로 박수를 보냈다.
옆 좌석에 앉은 관객이 프로그램북을 떨어뜨려 주워주자 “감사합니다”라는 한국어 인사를 건넸다. 건축 전공생인 다니엘레 알리체는 “며칠 전 로마에 방문한 정명훈과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았다”라며, “함께 갔던 친구가 이 공연을 간다고 하여 한국 연주자들을 보러 왔다”고 한다. “오래된 유물이 조형물처럼 널려 있고, 잿빛색의 건물이 많은 로마와 달리 서울은 고층 건물이 많은 모던도시이다”라며, “인터넷으로 접한 서울의 도시문화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로마에서 문지영의 존재와 의미는 더욱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2015년에 우승한 이탈리아 부소니 콩쿠르의 페루초 부소니(1866~1924)의 서거 100주년이 바로 올해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올해는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이어서 이를 기념하고자 양국의 문화교류가 증대될 예정이다.
‘그들의 예술’로 한국을 알린 시간
한국과 유럽연합은 기본협정, FTA, 위기관리활동참여 기본 협정 등 3대 주요 협정을 모두 체결했으며, 2010년 이래 양자 관계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된 바 있다. 이번 순회공연은 이러한 외교 노선에서 꽃핀 문화의 현장을 몸소 체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국적 색이 강한 전통공연예술이 아닌, 클래식 음악은 한국에도 있고 유럽의 여러 국가에도 존재하는 보편적인 국제 예술장르다. 그래서 한국과 유럽이 공통으로 다루는 예술이지만, 과거에는 유럽이 클래식 음악의 종주국이었고 한국은 변방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전통음악’을 연마하고 체화하여, 오히려 종주국에 새로운 감각과 느낌을 제공하는 ‘한국의 클래식’의 현주소와 힘을 이번 순회공연에서 느낄 수 있었다. 발트앙상블의 빈 공연에서 관객으로 만난 베링거는 빈 대학교에서 정치 커뮤니케이션학을 연구하고 있는 학생이다. 그는 “이러한 공연들이 스마트폰의 검색 창에 ‘한국’을 검색하게 하는 움직임의 시작이자, 한국의 매력을 찾아가는 시작점이 된다”고 했다.
글 송현민 편집장 사진 재외한국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