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우리 시대의 비르투오소
스베틀린 루세브 바이올린 독주회
1월 11일 오후 2시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요제프 요아힘, 파블로 데 사라사테를 잇는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1858~1931)는 요제프 시게티(1892~1972)가 연주하는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에 영감을 받아, 현대 바이올린의 주법을 망라한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전곡(1~6번)을 작곡했다. 작품은 여섯 명의 바이올리니스트(요제프 시게티·자크 티보·제오르제 에네스쿠·프리츠 크라이슬러·마티유 크릭붐·마누엘 키로가)에게 헌정되었는데, 각 연주자 특유의 음색과 주법 등을 녹여낸 여섯 개의 소나타는 고도의 연주력과 음악적 감각을 요구하며 바흐, 파가니니와 더불어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거쳐야 하는 필수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했다. 완벽한 기교와 난도 높은 테크닉을 요구하는 이 작품에 스베틀린 루세브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1월 11일 6시간의 간격을 두고, 오후 2시 공연 이자이와 8시 공연 파가니니(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카프리스 1~24번)의 대작을 선보이는 ‘더블헤더’ 중 낮 공연으로 향했다. 이자이의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전곡 연주를 앞둔 순간이었다.
첫 곡인 1번은 이자이가 소나타 작곡의 계기를 제공한 요제프 시게티에게 헌정한 곡이다. 스베틀린 루세브는 시작부터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의 매력을 한껏 증명하듯, 바이올린 한 대만으로 챔버홀을 가득 채웠다. 특히, 4악장에서 더블스톱을 자유자재로 소화하면서도 유연하게 활을 다루는 노련함이 엿보였다. 2번은 바흐의 파르티타 3번 BWV1006의 전주곡과 ‘진노의 날(Dies Irae)’의 주제가 번갈아 등장하며 시작됐다. 화려한 1악장을 지나 2악장에서 한 템포 쉬어가듯 약음기를 낀 채 느릿하지만, 정교하게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1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3번에서는 아르페지오, 트레몰로, 더블스톱으로 이어지는 고난도의 기교를 소화하면서도, 활 전체를 넓게 사용하며 무반주 바이올린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시각적 카타르시스를 함께 선사했다. 1부가 끝나고, 청중은 끊임없는 박수로 그의 연주에 화답했다.
2부에서 흰 셔츠로 갈아입고 등장한 루세브는 마치 처음 무대에 오른 듯, 새로운 에너지로 4번을 시작했다. 느린 2악장과 활기찬 3악장을 지나 여섯 개의 소나타 중 6번과 더불어 난곡으로 손꼽히는 5번에 다다랐다. 1악장과 2악장 내내 네 개의 현을 넘나드는 거대한 아르페지오를 소화해 내는 그의 연주력은 청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곡인 6번은 그 난도를 증명하듯 높은 음역의 글리산도로 시작해 같은 글리산도로 끝을 맺었다.
1번부터 6번까지 화려하고 정교한 연주를 선보인 루세브에게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무엇보다 여섯 개의 난곡을 흔들림 없이 연주한 그의 스태미나가 돋보인 무대였다. 앙코르는 파가니니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카프리스 1번과 24번으로, 이어질 그의 저녁 공연을 기대하게끔 했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파이플랜즈
어렵지 않은 따뜻함
연극 ‘바닷마을 다이어리’
1.15~3.23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연극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동명의 영화(2015)를 원작으로, 2023년 국내 초연되며 성공을 거뒀다. 영화의 명성으로 확보한 인지도, 한혜진·박하선·임수향 등 매체에서 익숙한 배우의 출연은 매진의 원동력이었다. 올해 재연에서는, 라인업이 더 화려해져 홍은희·유이·신예서 등이 가세했다(개막 공연(1.15) 관람).
연극은 한적한 일본의 한 바닷가 마을에서 펼쳐진다. 오래된 목조 가옥에 놓여있던 소녀의 일기를 발견한 것처럼, 극은 소소한 일상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며 진행된다. 시작은 ‘사치’(한혜진 분) ‘요시노’(서예화 분) ‘치카’(강혜진 분), 세 자매 아버지의 장례다. 아버지는 자매들이 어렸을 때 외도로 가정을 떠났다. 냉소적으로 참여한 장례에서 이들이 만난 것은 ‘스즈’(설가은 분). 교복 차림의 이복 여동생이다. 새어머니와 남겨질 스즈가 마음에 걸린 첫째 사치는, 스즈를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온다.
네 여성의 배려와 섬세함으로, 이들의 연대는 따듯하게 쌓여간다. 상처 입은 어린 시절을 겪은 이들을 품어주는 것은 넓은 바다, 정다운 목조 가옥, 그리고 추억이 곁든 음식들이다. 예를 들면 매년 마당에서 딴 열매로 만든 매실주. 10년 전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가 담근 매실주도 자매는 아직 가지고 있다. “할머니의 맛이네”. 어쩐지 서먹하고 어려웠던 관계들까지, 이 소소한 순간들에 스르륵 녹아내린다. 일본 영화 특유의 감성이 극에도 진하게 자리 잡고 있다.
가장 입체적인 인물은 사치와 스즈다. 사치는 가정을 저버린 아버지를 우유부단하다며 미워하고, 철부지 어머니를 적대시한다. 그러나 정작 유부남과의 관계를 끊지 못한 것은 사치 자신. 그런 사치에게, 둘째 요시노가 일침을 가한다. “스즈를 데려온 건, 엄마에게 과시하기 위한 거잖아. 우리, 이 집에서, 잘 살고 있다고 보여주려고”. 아무 답도 하지 못하는 사치.
세 언니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스즈 역시 마음 한편에는 죄책감을 품고 있다. “미안해”라며, 자신의 존재를 사과하는 아이. 사치는 그런 스즈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발견했을까. 둘은 아버지와 함께 갔던 언덕에 오른다. 사치가 “아빠, 멍청이-!”라며 속에 있던 말을 후련히 뱉자, 스즈도 언니를 따라 “엄마, 바보-!”를 외치다 어린아이처럼 울음이 터진다. 그런 스즈를 안아주는 사치. 끈끈해진 두 사람의 모습에, 객석에서는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초연에 출연한 배우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개막 공연이 주는 묘한 긴장감이 공연 내내 맴돌았다. 극적이지 않은 이야기라는 특성상, 배우의 연기가 남기는 여운이 중요했는데 이에 몰입하긴 어려워 보였다. 삐걱거리는 대화 속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대사까지, 작품이 가지고 있는 섬세함이 표현되지 못했다. 이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화려한 캐스팅이 아니라 스토리가 가진 힘을 믿고 이를 충실히 재현해 낼 진정한 배우들에게 달린 듯하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라이브러리컴퍼니
잠시, 달콤함 속에 빠지다
뮤지컬 ‘고스트 베이커리’
2024.12.19~2.23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국내 뮤지컬계에서 ‘윌휴 콤비’로 불리는 작곡가 윌 애런슨과 극작가 박천휴의 신작이 공개됐다. 두 사람의 찰떡 호흡은 ‘어쩌면 해피엔딩’(2016) ‘일 테노레’(2023) 등을 통해 잘 알려진바, 이번에는 극작과 작곡은 물론 공동 연출까지 맡아 더욱 기대를 모았다(1월 10일 관람).
‘고스트 베이커리’의 주인공 순희는 최고의 제과점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는 서툴러 일하는 제과점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이참에 자신의 제과점을 차리겠다며 전 재산을 털어 허름한 가게를 계약했는데, 알고 보니 가게에는 지박령인 ‘유령’이 살고 있었던 것. 유령은 순희를 내쫓으려 다양한 수를 쓰지만, 순희 역시 물러서지 않는다. 신경전 끝에 둘은 동업을 시작하며 우당탕탕 제과점을 열게 되는데, 그 가게 이름이 바로 ‘고스트 베이커리’다.
‘고스트 베이커리’는 1969년 서울을 배경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펼쳐지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흐름을 따르면서도 무대 연출과 효과음, 넘버 등으로 신선함을 더했다. 그중에서도 순희와 유령이 부르는 넘버의 분위기 차이가 흥미로웠다. 순희는 발랄한 넘버로 극을 명랑하게 이끌고, 유령은 단조와 반음계가 사용된 넘버로 자신의 괴팍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할수록 유령이 부르던 음울한 선율에 점차 경쾌한 리듬이 깃들기 시작해, 넘버를 통해 인물 심리 변화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윌휴 콤비’의 전작에 출연했던 박지연(‘일 테노레’의 서진연 역)은 당찬 순희로, 전성우(‘어쩌면 해피엔딩’의 올리버 역)는 고독한 유령으로 변신하며 탄탄한 캐릭터 해석력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도 두 사람이 제과를 향한 진심을 담아 부르는 넘버 ‘어서 오세요’가 인상적이었다. 공연이 끝난 뒤 관객 몇몇이 로비에서 “어서 오세요, 잠시 달콤함 속에 빠져보세요”라며 가사를 작게 흥얼거리기도 했다.
장면 전환을 위해 커튼을 내리는 것과 달리, ‘고스트 베이커리’는 바퀴를 활용해 세트장이 굴러가게 했다. 덕분에 극이 끊기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장면이 전환됐는데, 이 방식도 관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간 요소였다. 순희와 유령이 가게 안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낭만적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순희가 혼자 남아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커튼콜이 끝난 후, 무대에 홀로 남은 순희가 관객에게 한 번 더 인사를 전했다. 눈물을 보였던 마지막 장면과 달리 커튼콜에서는 환한 미소로 관객과 인사를 나누는 박지연의 모습이, 마치 씩씩하게 고스트 베이커리를 이끌어 갈 미래의 순희를 표현하는 듯해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글 김강민 기자 사진 라이브러리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