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언제부터 턱시도를 입지 않았나요?” 출연자 대기실로 들어가 쭈뼛쭈뼛 던진 질문에 미샤 마이스키는 껄껄 웃었다. 그러면서 입고 있던 검은 재킷을 척 펼쳐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는 이태원 해밀톤 셔츠의 라벨을 보여줬다.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난 패셔니스타가 아니에요!” 마이스키에게 멋스런 셔츠는 움직임이 많고 땀을 많이 흘리는 그의 연주 스타일을 돕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내가 입는 옷은 흥미롭고도 실용적이지요. 옷은 음악을 잘하는 데 그저 도움을 줄 뿐이에요. 그렇지만 연주자가 드레시한 것은 ‘오케이’입니다. 사실 멋진 셔츠는 섹시하죠. 내가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젊은 시절 그는 정치적 이유로 14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더욱 그런 것도 같은데, 저는 획일성(uniformity)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군인도, 경찰도, 의사도 아닌데 왜 솔리스트가 시커먼 옷을 입어야 하죠? 여성 솔리스트는 저마다 개성을 발휘하는데 남성들만 턱 밑까지 보타이에 옥죄일 필요는 없어요.” 1988년 이후 내한 공연을 가진 지 벌써 25년째. 무려 18번이나 공연을 한 마이스키는 ‘한국통’이다. 그는 김치, 불고기 정도는 흡사 네이티브처럼 완벽한 발음을 구사한다. 25년 전 턱시도를 과감히 던져버리고 자신만을 위한 셔츠를 구상할 즈음 마이스키의 실험소가 되어준 곳도 이태원이었다. 동대문에 옷을 사러 가서는 다른 가게와 비교하며 싼 가격에 가방 하나 건져오기도 할 정도다. 그러다 마이스키는 일본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를 만났다. 폴리에스테르 저지를 소재로 만들어진 이 옷은 대여섯 벌씩 트렁크에 쑤셔넣어도 구겨지지 않는 활동성을 자랑한다.
그 후 몇 년간 지속된 마이스키의 미야케 사랑은 그의 무대와 앨범 재킷 사진들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 부인과 아이들이 옛날에 입던 이태원 해밀톤 셔츠의 옷을 보더니 좋다고 난리가 났다. 그래서 마이스키는 다시 이태원을 찾기 시작했다. 한국이 가장 좋은 이유는 “빨리빨리”가 가능한 유일한 나라라는 것이다. 옷을 맞춘 지 이틀 만에 척 튀어나오는 곳은 서울밖에 없다고. 공연 이틀 전 입국한 마이스키가 양복점에 가서 치수를 다시 재니 다음 날 가봉이 나오고, 이튿날 리허설 룸에 대령되었다 한다. 마이스키는 세 개의 셔츠를 정리하며 오늘 밤 연주엔 이 옷들을 입을 거라 설명했다. 흥미롭고, 실용적이며, 무엇보다 자신만을 위한 핸드메이드라고. 몸통에 버튼이 있으면 움직임에 제약이 있어 일반적인 셔츠 디자인을 연주용으로 개조했다고 한다. 개성이 존중되는 현대와 달리 20~30년 전만 해도 격식을 갖추지 않는다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끔찍한 비주얼로 클래식 음악을 지루하게 만들어버리는 게 아니라면 아무렴 어떠냐는 모습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싶진 않아요. 호불호가 분명한 게 차라리 낫지, ‘그래 뭐 그냥 그런 연주자’ 하고 흘러가버리는 게 제일 끔찍하죠.” 세 벌을 각 곡마다 갈아입을 거라 말했던 마이스키는 땀이 덜 났는지 1부에는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브루흐 ‘콜 니드라이’에 이어 생상스 첼로 협주곡 1번으로 좌중을 휘어잡은 마이스키는 2부에 연주된 드보르자크 협주곡에서는 대곡이라 그런지 힘에 부치는 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기류를 자신의 것으로 압도해버린 마이스키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인터뷰 중 짬짬이 아홉 살, 네 살, 그리고 9개월 된 늦둥이 3남매를 아이패드로 보여주며 자랑하던 마이스키는 무대 위에서도 펄펄 날아다녔다. 마이스키의 사진이 가운데, 주변에 작곡가들의 캐리커처가 가득한 티셔츠 위에 번쩍번쩍 빛나는 금 목걸이를 걸친 ‘호랑이 기운’의 그는 시종 즐거웠다. “한국에 오면 만나는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 마이스키는 평생 연주 여행을 다니다 보니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를 만드는 게 구조적으로 어렵다 말하며 다소 어두운 얼굴빛을 내비쳤다. 하지만 마이스키는 처음 보는 사람을 친구처럼 대하고, 동대문과 이태원을 제집처럼 편하게 이용하는 남자가 아니던가! 그는 울산과 대구로 이어지는 스케줄도 아랑곳 않고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관객들을 일일이 만나 인사했다. 글 김여항 기자(@yeoh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