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3년 만에 내한 공연을 갖는다. 앤드루 데이비스의 지휘 아래 ‘가장 영국적인’ 음악과 마주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10월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9일 대전 문화예술의전당 아트홀.
영국 BBC는 세계 공영방송의 모델이자 방송교향악단의 모범적인 사례다. BBC의 기자나 프로듀서 가운데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등 명문대 출신들이 즐비하다. BBC에 대한 영국인들의 신망이 얼마나 두터운지는 BBC 출신이 문화예술계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에딘버러 페스티벌 총감독을 지낸 존 드러몬드(1934~2006)는 BBC 출신이고 1995~2007년 런던 바비컨센터의 CEO를 지낸 존 터사도 BBC 앵커를 지냈다.
BBC 산하에는 다섯 개 교향악단이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다. 모두가 월급제로 운영되는 공립 오케스트라다. 런던에 있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1930)와 BBC 콘서트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카디프의 웨일스 BBC 내셔널 오케스트라 오브 웨일스(1935), 맨체스터의 BBC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33), 글래스고의 BBC 스코티시 심포니 오케스트라(1935)이다.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BBC 콘서트 오케스트라의 차이점은 뭘까. 보스턴에 보스턴 심포니와 보스턴 팝스가 있듯이 BBC 심포니는 ‘본격’ 클래식을 연주하고 BBC 콘서트 오케스트라는 영화음악과 크로스오버 등 ‘가벼운’ 클래식을 연주한다.
영국에서 매달 정해진 급료를 지급하는 오케스트라가 방송교향악단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본머스 심포니 오케스트라·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맨체스터 할레 오케스트라·세이지 게이츠헤드의 로열 노던 신포니아·로열 리버풀 필하모닉·글래스고 로열 스코티시 국립교향악단·벨파스트 얼스터 교향악단 등 ‘시립’ 교향악단도 월급제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해외 투어가 일상처럼 되어버린 까닭에 우리에게도 낯익은 이름인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은 모두 연주력으로 평가받는 민간 교향악단이다. 거의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단원들이지만 사실상은 연주 횟수에 따라 연주료를 받는 프리랜서 연주자들의 모임이나 다를 바 없다. 연주자 입장에서는 매월 고정적인 급료를 받는 BBC 계열이나 시립 교향악단이 안정적이지만 연주력 면에서는 런던 심포니를 더 높게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료화’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청중의 인기나 매표 상황, 스폰서에 눈치를 보지 않고 현대음악 등 과감한 프로그램에 도전해볼 수 있는 것은 방송교향악단만의 매력이다.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10월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9일 대전 문화예술의전당 아트홀에서 내한 공연을 한다. 3년 만의 한국 방문이다. 2010년 5월 서울 올림픽공원 88잔디마당 무대에서는 당시 수석지휘자 이르지 벨로흘라베크의 지휘로 스메나타·그리그·드보르자크를 연주했지만 이번에는 계관지휘자 앤드루 데이비스의 지휘로 영국 음악 일색의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멜버른 심포니 수석지휘자·시카고 리릭 오페라 음악감독 겸 수석지휘자·토론토 심포니 계관지휘자도 맡고 있는 앤드루 데이비스는 1989년부터 2000년까지 BBC 심포니의 수석지휘자를 지냈으며, 토머스 비첨·에이드리언 볼트·맬컴 사전트·콜린 데이비스 등 영국 지휘자의 계보를 잇는 영국 음악계의 간판스타다.
‘세계의 오케스트라’의 저자 헤르베르트 하프너는 앤드루 데이비스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의 지휘는 온화하고 자연스러우면서 표현력이 풍부하다. 지나친 제스처를 삼가고 되도록 작은 몸짓으로 최대의 효과를 끌어낸다.”
데이비스는 ‘가장 영국적인 음악회’로 손꼽히는 BBC 프롬스의 ‘마지막 밤’ 공연과도 인연이 깊다. BBC 심포니 수석지휘자로 있을 당시 데이비스는 선배 지휘자 맬컴 사전트 경이 시작한 BBC 프롬스의 ‘마지막 밤’ 무대의 전통을 복원했고, 1988년·1990~1992년·1994~2001년 무대에 섰다. 영국인들은 밀짚모자에 풍선, 유니언 잭을 휘날리며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클래식 음악 축제’의 마지막 밤을 즐긴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 강’ 왈츠에 이어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 등 언제나 같은 앙코르곡으로 막을 내리듯이 BBC 프롬스 축제는 엘가 ‘위풍당당 행진곡’ 1번, 토머스 안의 ‘통치하라 브리타니아여!’, 허버트 패리의 ‘예루살렘’, 브리튼이 편곡한 영국 국가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엘가는 국왕 에드워드 7세의 권유를 받아들여 ‘위풍당당 행진곡’ 중간부의 서정적인 선율에 아서 크리스토퍼 벤슨의 가사를 붙여 ‘희망과 영광의 나라’라는 가사를 붙였는데 이 노래는 영국에서 제2의 국가처럼 애창되고 있다.
이번 내한 공연은 프롬스 축제 마지막 밤의 재현 무대는 아니다. 하지만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1번과 ‘수수께끼 변주곡’을 비롯해 브리튼의 ‘피터 그라임스’ 중 ‘네 개의 바다 간주곡’, 윌리엄 월턴의 비올라 협주곡(리처드 용재 오닐 협연) 등 대표적인 영국 작품을 들을 수 있는 기회다.
사실 영국은 19세기에 “음악이 없는 나라(Das Land Ohne Musik)”라는 오명에 시달렸다. 1904년 독일의 평론가 오스카 아돌프 헤르만 슈미츠가 같은 제목의 책에서 내뱉은 독설이다. 유럽 본토의 많은 작곡가들이 넓은 음악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영국 진출을 꿈꾼데 반해 정작 영국 출신 작곡가들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서양음악사에 등장하는 헨리 퍼셀·존 던스태플을 비롯해 19세기의 본윌리엄스·에드워드 엘가·구스타브 홀스트·20세기의 벤저민 브리튼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나마 나름대로 영국을 대표하는 엘가의 음악은 바그너의 음악적 세례를 받았다. 영국 왕실의 대관식 음악을 작곡한 헨델은 나중에 영국으로 귀화하긴 했지만 원래 독일 태생이다.
영국이 음악 창작의 불모지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멘델스존·바그너 등 유럽 본토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수입해서 연주한 것뿐이고 연주 단체나 청중은 유럽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다. 연주와 감상 면에서 본다면 “음악이 없는 나라”는 틀린 말이다. 최초의 유료 공개 연주회가 시작된 곳도 런던이다. 지금도 많은 연주자들이 런던 데뷔 무대를 꿈꾼다. 영국 음악의 저력은 여기에서 나온다.
글 이장직 객원전문기자(lully@) 사진 크레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