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다른 이에게 들려주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아름다운 소리를 리코더로 만들게 된 것은 오래전 어머니가 사주신 프란스 브뤼헌의 음반 덕입니다. 그때 서태지 음반을 사주셨다 하더라도, 저는 왠지 리코더를 연주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리코더 전공이 없는 음대에 이론 전공으로 입학하여 음악을 ‘공부’하는 자세를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무대 위에서는 언제나 음악을 즐기고 싶습니다. 공부하기와 즐기기의 균형은 바로크 음악과도 닮았습니다. 시대악기로 바로크 음악을 연주하는 나는, 어느 날은 홍대 클럽에서 ‘발 냄새’를 리코더로 표현하는 만만찮은 상대와 한판 대결을 벌이기도 합니다.
바흐를 만난다면 혹시나 있을지 모를 리코더 독주곡 악보를 숨겨놓은 장소가 어디인지 묻고 싶고, 베토벤을 만나면 그저 함께 맥주를 마시고 싶습니다. 윤이상 선생님을 만나면 대금과 리코더에 대해 속 깊은 얘기를 나누겠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리코더를 불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리코더는 나를 가르쳤습니다. 리코더에게 배운 사람, 나는 권민석입니다.
안녕하세요, 월간객석 편집장 박용완입니다. 예술가와 기자가 밀실에서 진행해온 인터뷰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시간. 월간객석 오픈인터뷰 ‘홀딱’에 와주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홀딱’ 열 번째 주인공은 리코더리스트 권민석 씨입니다. 박수로 맞이해주십시오.
‘객석’의 도서실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 고개를 돌려 출입구를 바라본다. 그러나 권민석은 천장 어딘가로 연결된 나선형 계단을 내려오며 깜짝 등장한다.
어제 한국에 도착하셨죠.
네. 헤이그에서 프랑크푸르트 기차 타고, 거기서 다시 비행기 타고 왔습니다.
졸리진 않으세요?
아닙니다. 신 납니다.
이 자리에 오신 분들 가운데는 권민석이라는 연주자만큼이나 리코더라는 악기가 궁금해서 오신 경우도 많은 듯합니다. 참여 신청 시 질문을 함께 받았는데 이런 전제가 많이 등장하군요. “리코더라는 악기가 익숙하지만 또 생소하다.” 우선 리코더에 대한 권민석씨만의 ‘개론’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농담으로 리코더는 우리나라에서 가구당 보급률이 가장 높은 악기라고 합니다. 피아노는 한 대씩 있어도, 리코더는 세 대씩 있기도 하니까요. 하나 샀다가 잃어버리고, 둘째 초등학교 들어가면 또 사고. 서양에서는 바로크 이전 르네상스 시대부터 연주된 뼈대 있는 악기입니다.
여기, 악기가 길이 순으로 누워 있네요.
하나씩 설명을 드릴까요. 이걸로 시작을 하지요. 우리가 초등학교 때 배우는 소프라노 리코더입니다. 지금 이 악기는 17세기 네덜란드 장인 엥엘베르트 테르톤이 만든 악기를 오늘날 일본의 장인이 복원한 것입니다. (옆 악기를 들고) 같은 소프라노인데 이것은 일자형이죠. 좀더 초기 악기입니다. 보통 알고 계시는 리코더들은 후기 바로크 악기라서 우아한 곡선이 있습니다. (또 다른 악기를 들고) 이건 알토 리코더입니다. 불어서 소리를 비교해드리겠습니다. …
권민석은 그곳에 놓인 악기들을 하나씩 들어 설명하고, 직접 불어 음색을 비교해주었다. 모든 설명이 끝나자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초등학생 관객이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이상해.”
그러게요. 저는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밤에 피리 불면 뱀 나온다는 얘기를 들어서인지. 해외에 비슷한 설이 있나요?
유럽에서도 가끔 그런 장난을 치긴 하는데, 인도에서 정말 피리 불면 뱀 나온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뱀이 나오나 제가 살펴봤지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악기는 피리라기보다 “빼애애애” 소리가 나는 더블 리드 악기였습니다.
그런 속담은 왜 생겼을까요. 밤에도 리코더를 많이 불어보신 입장에서 대답을….
밤에 혼자 불고 있으면 좀 무서워요. 음습한 느낌이 들긴 하지요. 층간 소음 문제도 있을 거 같고. 그러니 최대한 장조 곡을 불어주셔야 합니다.
아까 연주하시는 걸 보니 제가 초등학교 때 배운 운지법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특히 반음에서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초등학교에서 익히는 건 보다 쉽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독일식 핑거링입니다. 악기도 교육용으로 조금 계량한 것이고요. 그런데 바로크 핑거링에서는 예를 들어 F음을 이렇게 포크 모양으로 잡습니다. 그래서 포크 핑거링 또는 크로스 핑거링이라 합니다. 리코더는 사실 뒤쪽(아래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인데, 그래서 높은 배음은 아름답게 낼 수 있지만 낮은 음에서는 음을 잘 조절해줘야 합니다. 그 보정을 위해 이런 식의 핑거링이 필요합니다.
저도 이번 인터뷰 앞두고 큰맘 먹고 리코더 하나 장만했는데요. 4천5백 원을 주고요. 오늘 좀 열심히 불어봤는데, 모든 구멍을 다 막은 가온다(C)를 부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살살 하면 음정이 흔들리고, 세게 불면 조금 괜찮고. 어떻게 하면 가온다를 쉽게 불 수 있을까요. 전국의 초등학생들을 위해 조언 부탁드립니다.
마인드컨트롤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이 ‘도’를 꼭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 저도 연습하는 데 어려운 움이 있으면 미리 상상을 합니다. 곧 소리가 날 거다. 그럼 정말 됩니다. 악기를 너무 세게 불면 오버톤이라고 해서 음정이 너무 높아지죠. 파장이 반으로 줄면서 옥타브 위 소리가 날 수 있어요. 너무 살살 불면 음정이 내려갑니다. 그게 리코더의 딜레마 중 하나입니다.
리코더가 생긴 것만 봐서는 정말 단순한 악기인데요. “당근으로 리코더를 만들어보았어요”라는 블로그 글을 본 적이 있을 정도로요. 그런데 리코더 연주에도 분명 ‘비르투오시티’가 있습니다.
리코더 연주에서의 테크닉이라면, 우선 모든 악기가 그렇듯이 빨리 한다는 것이 기본이겠죠. 쇼팽 에튀드를 틀리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치는 것처럼요. 자랑을 하자면… (느릿한 말투의 권민석이 정신없이 빠른 연주를 선보인다) 이 정도의 빠르기? (객석에서 터진 박수!) 리코더는 물론이고 모든 관악기의 연주엔 세 가지 구성 요소가 있습니다. 앞서 보여드린 빠른 속도, 즉 손가락. 숨. 음악의 흐름을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아티큘레이션.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말해지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모여 리코더가 연주됩니다.
인터뷰 초반인데, 악기 종류며 테크닉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리코더를 벌써 꽤 많이 불어주셨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정식으로 연주를 듣고 이야기를 이어갈까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 중 한 분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입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 중 알망드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권민석은 그렇게 바닥에 앉은 채로 바흐를 연주했다.
리코더를 위해 직접 편곡하셨나요?
편곡이라 말하기 민망한 수준이고, 리코더에 맞게 변형했습니다. 바흐의 첼로 모음곡을 아주 좋아하는데, 감히 제가 리코더로 한 이유는 하나의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이 곡을 리코더 연주자가 한다고 했다면 바흐가 허락했을까. 허락했으리라 봅니다. 일례로 바로크 시대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코렐리는 최고의 비르투오소이자 작곡가였는데, 그가 로마에서 낸 바이올린곡집은 대성공을 거둔 후 감바로 편곡됐고, 영국에서는 리코더로도 편곡됐습니다. 바로크 시대에는 같은 곡을 다른 악기로 연주하는 데 좀더 열려 있었다고 할까요.
첼로를 위해 쓰인 작품을 ‘부는’ 데 어려운 점은 없나요?
어떤 음악이든 숨을 쉬지 않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항상 프레이징을 하고 아티큘레이션을 하기에, 음악적으로 숨 쉬는 부분은 늘 있습니다. 가끔 순환호흡을 요하는 현대곡이 있지만요. 저는 어떤 곡이든, 쉼표가 없어도 숨 쉴 곳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저의 사랑스런 악기, 대한민국에서 리코더 하면 떠오르는 악기를 꺼내보겠습니다. (숨겨두었던 핑크색 플라스틱 리코더를 꺼내 보이며)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구입한 리코더인데요. 저는 늘 이런 궁금증을 품고 있었습니다. 흔히 보는 이 플라스틱 리코더를 프로 연주자가 불면 어떤 소리가 날까….
앗, 제가요? (권민석의 얼굴엔 당황과 화색이 묘하게 공존했다) 어디 한번..
소중하게 다뤄주세요.
이름도 있네요. ‘엘리제’라고 쓰여 있습니다. (권민석은 ‘Ellise’를 독일식으로 읽었는데, 우리말 상표명은 ‘엘리스’이다) 그럼 한번 불어보겠습니다.
핑크 플라스틱 리코더 엘리제로 간단히 한 곡 불어보는 권민석
엘리제 영광의 날이네요.
상당히 좋은 악기입니다. 4천5백 원이란 가격이 잘 정해진 것 같네요. 제 시대엔 5백 원, 천 원에 샀거든요.
실제로 연주해보면 플라스틱 리코더와 목제 리코더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그냥 들어선 못 느끼시겠죠? 바로 앞에서 들을수록 느끼기 어렵습니다. 목제 리코더는 울림이 커서 멀리까지 퍼집니다. 음량의 폭이 넓으니 표현 범위도 훨씬 넓죠. 또 부는 사람 입장에서는 나무의 향도 느낄 수 있고요. 삭막한 도시에서 나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죠.
주로 어떤 나무로 만들어지나요?
바로크 시대에는 여기 이 노란색의 회향목으로 만들었습니다. 반면 (다른 악기를 들어 보이며) 이건 올리브 나무로 만들었고요. 이렇게 나뭇결도 보이고, 또 가볍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악기입니다. 오래 연주해도 팔이 피로하지 않지요.
바이올린의 경우 수백 년 된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기도 하는데, 리코더는 어떤가요? 복원된 악기 말고, 오리지널 악기도 연주가 되나요? ‘숨’이라는 습기와 열기을 직접 받아내니 악기의 수명이 그리 길 것 같지 않은데요.
오리지널 악기가 아직은 남아있어요. 앞서 제가 ‘복원’한 걸 보여드린 악기의 오리지널은 헤이그 박물관에 있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나무로 돼 있다 보니 습기가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래서 한 시간 이상 불기가 힘듭니다. 습기가 들어가고 빠지고 하면서 악기가 성장하는데, 잘 관리하면 평생 쓴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다 100년 이상 되면 서서히 죽어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리지널 악기를 연주하는 분들도 있나요?
정말 유명한 분들이 녹음을 위해 연주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주로 도큐멘테이션을 목적으로 하는 작업이지요. 1960~1970년대, 고음악 연주에 대한 아이디어가 확립되기 전에는 리코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박물관의 오리지널 악기들을 빌려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집에 가서 오리지널 악기를 막 불어보고, 음정이 안 맞는 것 같으니까 여기저기 고쳐보고… 그래서 손상이 된 악기들이 많습니다. 그런 악기를 가지고도 훌륭한 녹음을 남긴 연주자들이 있고요.
한편 현대의 작곡가들은 리코더 같은 단순한 논리의 악기에 일종의 도전의식을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작곡된 리코더 작품들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현대의 곡은 작곡가의 아이디어 자체로 규정되는 게 많습니다. 리코더 곡을 예로 들면, 제가 가끔씩 연주하는 베리오의 곡은 앞서 설명드렸던 리코더의 연주 구성(핑거링ㆍ숨ㆍ아티큘레이션) 세 가지가 결국 하나로 합쳐집니다. ‘제스티’라는 곡인데요. 제스처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제스토의 복수형이죠. 윤이상 선생님은 어려서 들은 대금ㆍ피리 소리에서 영감을 얻어 그걸 리코더에 담아낸 경우입니다. 작곡가마다 아주 다르고, 제가 재미있게 느끼는 점입니다.
“재미없어.”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좀전의 그 초등학생 관객이 엄마에게만 소감을 전한다는 것이 바로 앞에 앉아있던 권민석과 기자의 귀에도 전해졌다. 어색하게 웃으며 쳐다보자, 부끄러운지 온몸을 비트는 꼬마 관객.
뭔가 한 곡 들어야 저 친구가 기뻐할 것 같은데요. 자극적인 음악으로 부탁드립니다.
제가 약간 재미난 거 보여드릴게요.
권민석이 몸을 일으켜 옆에 준비된 전자음향 장치 가운데로 이동한다.
지금 보시는 게 소리를 반복시켜주는 악기(장치)들입니다. 소리를 잡아주는 악기도 있고, 변형시키는 악기도 있습니다. 소리의 집합체로 일종의 음색을 만들고 그걸 가지고 재미있게 노는… 장난감 같은 거라고 생각해주세요.
권민석이 전자음향 장치를 발과 손으로 만져가며 꽤 긴 즉흥연주를 선보였다.
감상평 한번 듣고 갈까요? (아까 꼬마 관객에게) 어땠어요?
“신기했어요.”
저도요. 지금부터 권민석 씨의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좀 많이 알려진 내용이지만 여쭤보고 싶어요. 어머니께서 프란스 브뤼헌의 음반을 선물해주셨고, 그 음반을 듣고 리코더에 빠졌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얘기해주세요.
초등학생 때 친구와 리코더 이중주를 하면서 그냥 재미있게 놀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리코더 음반을 사오셨어요. 보통의 싱얼롱 CD나 테이프가 아닌 컴필레이션 앨범이었습니다. 리코더에 브뤼헌, 하프시코드에 레온하르트, 첼로에 빌스마와 아르농쿠르…. 나중에 알고 보니 오늘날 최고의 대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합주한 음반이었습니다. 그걸 들었을 때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듣자마자 “아, 뭔가 있구나” 싶더군요.
그때 브뤼헌의 음반을 듣지 않았다면 리코더를 안 할 수도 있었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했다 하더라도 다른 연주자가 됐을 것 같아요. 어떤 인상이나 기억들, 그 연주자들에 대한 동경이 저를 발전적으로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음반을 사주시고는, 리코드를 하겠다고 했을 때는 또 반대를 하셨다고요.
그때 저도 너무 섭섭했거든요, 어머님~ (객석에 권민석의 어머니가 앉아계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리코더를 한다고 하면 누구나 반대했을 것 같아요.
공부를 잘했나요? 운동을 잘했다거나.
운동은 좋아했고 공부는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잘하고 말고를 떠나서, 리코더를 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거였죠.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전공을 할 수 있었나요?
제가 진심으로 말씀드렸을 때 이해해주시고 어느 정도 가능성을 열어주셨습니다. 결국 가장 힘들었던 건 저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이었습니다. 하고 싶다고 다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열심히 했는데, 만약 스물다섯쯤 돼서 ‘역시 내 길이 아니었어’라는 생각이 들면 어쩌나, 그런 불안감이 있었어요.
예중ㆍ예고에서 전공했나요?
그냥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따로 공부했습니다.
남자 고등학교였나요?
네. 휘문고였습니다.
휘문고 친구들이 민석 씨가 리코더를 들고 다닐 때, (핑크 엘리제 리코더를 들어 보이며) 이거냐며 놀리진 않았나요? 그때는 어리니까요.
처음에는 쟤가 웃기는 애구나 싶었을 텐데, 나중에 친구들을 리코더 앙상블 공연에 초대하자 다들 좋아해줬어요. 제가 리코더 한다니까 “아이고, 네가 리코더 전공하면 나는 탬버린을 전공하겠다” 이런 식으로 말하던 친구들이요. 사실 타악기 전공들은 진짜 탬버린ㆍ캐스터네츠를 자주 연주하잖아요. 여튼 그때의 반응은 그랬습니다.
가장 최근에 본 민석 씨 공연은 홍대의 살롱 바다비에서 열린 ‘피리 부는 사나이’였습니다. 그때 요정신발 신고, 광대 옷 입고 나와서 하메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연기하고, 또 연주했죠. 전자음향과 함께요. 독특한 무대였습니다. 비슷한 프로젝트로, 같은 장소에서 ‘피리 배틀’이라는 것도 하셨다면서요.
피아노 배틀이나 댄스 배틀은 많이들 아시죠. 음악이 나오면 비보이가 한 명씩 나와서 추고, 또 다른 한 명이 나와서 도발하고, 다시 춤추고.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뒤에서 드럼을 쳐주면 제가 리코더를 불고, 상대가 다시 받아서 부는 그런 무대였습니다. 마지막엔 스피드 퀴즈도 했습니다. 카드에 적힌 단어를 리코더로 표현하는 거예요. 그게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때 단어 중에 하나가 ‘발 냄새’였는데, 저랑 대결구도에 계셨던 분이 발을 막 코에 갖다 대며 리코더를 부시고… 아주 즐거웠습니다. 결국엔 무승부가 되어서 훗날 2차전을 하기로 약속했죠.
그분은 누구세요.
홍샤인 님이라고, 제다이 프로젝트에서 보컬과 리코더를 맡고 계세요. 겸업으로 지금 인천 만수동에서 뿅커피를 운영하시죠. 만수 하이웨이 주유소 인근입니다.
스피드 퀴즈를 지금 하면… 될까요?
재미있겠는데요.
실은 바로크 악기사에서 협찬한 훌륭한 목제 리코더를 준비해놓은 상태인데요. 이걸 어떻게 전해드릴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관객들이 술렁인다.
그럼 단어를 하나 정하면 되나요? 선택의 폭이 너무 넓으면 맞추기 힘드니까, 이건 정말 즉흥인데, 이 까만 무대 위에 보이는 물건들, 쿠션ㆍ아이폰ㆍ엘리제ㆍ물ㆍ악보ㆍ마이크ㆍ안경… 무대 위 물건 중 하나를 하죠.
기자는 인터뷰 질문지 위에 좁쌀만 한 글씨로 뭔가를 적었다. 권민석이 ‘결혼 행진곡’을 연주한다. 객석 여기저기서 “저요, 저요”를 외친다. 누군가가 “반지!”라고 정답을 외쳤다.
네, 하지만 이건 연습문제입니다. 저분은 이번 민석 씨 공연의 주최사인 금호아트홀 관계자 분이시거든요.
객석에서 안도와 웃음이 요동친다. 이때 누군가가 외친다. “구호를 정해요!”
그럼 구호는, 민석 씨가 정해주세요.
…삘릴리?
외치기 무안하게 “삘릴리 개굴개굴 삘릴릴리”로 하겠습니다.
요절복통 스피드 퀴즈는 그렇게 한참 이어졌다.
이제 관객들이 보내주신 질문을 여쭤보겠습니다. 진창규 씨의 질문입니다. 많은 유학처 중 네덜란드를, 헤이그 음악원을 택한 이유는?
프란스 브뤼헌이 가르쳤던 학교가 헤이그 왕립음악원이었습니다. 이분이 연주하는 걸 좋아하셔서 학교에 그리 오래 계시지 않았는데, 그 짧은 기간 동안 헤이그 왕립음악원은 브뤼헌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결국 거기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요. 브뤼헌은 아직 살아계시고, 저는 전통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또한 네덜란드라는 나라 자체가 고음악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연주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최연희 씨 질문입니다. 리코더리스트라는 직업은 어떤가요?
개인적으로는 정말 행복한 직업입니다. 리코더를 원 없이 불고 그걸 들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여기 애호가 분들도 계시는데, 아까 첫 질문 주신 진창규 씨의 카페명이 ‘후루꾸’입니다. ‘후루꾸’로 부신다 해서요. 그런데 정말 리코더를 잘 부세요. 열정도 대단하시고요. 전에 말씀을 나누다가 리코더를 밤에도 소리 안 내고 부는 법을 배웠습니다. 근데 그건 비밀이니까….
악기를 분리하고 그 안에 휴지나 솜을 가득 넣으면 소리가 안 날 것 같은데요.
그래도 소리가 날 것 같습니다.
어쩔 줄 몰라하는 권민석. 이때 객석에 있던 진창규 씨가 “얼마 전 동호회 카페에 공개했습니다!”라고 호기롭게 외친다.
아, 그렇다면! 여기 윈드웨이(리코더의 동그란 머리 부분) 아래 라비움(리코더 전면 상단에 보이는 작은 창)은 아주 미세하고 섬세한 곳이죠. 악기 하는 분들은 여기에 절대로 손가락을 넣으면 안 됩니다. 여기를 따뜻하게 할 때도 손 모양을 볼록하게 해서 손이 안 닿게 합니다. 근데 이 라비움에 스카치테이프를 살짝 붙이면 바람이 나오긴 하는데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부는 느낌만 나고요. 급하게 연습을 해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저도 이 방법을 잘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황정선 씨 질문입니다. 리코더 불면서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항상 행복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가장 행복할 때는 리코더 불고 나서 10분 후입니다. 엔도르핀 수치가 가장 높게 올라가는 순간이거든요. 처음 악기를 잡으면 저도 손이 굳어있고 악기도 곧바로 반응을 안 하는데, 10분쯤 지나면 단순히 몸이 풀리는 게 아니라 소리가 아주 아름다워지는 게 느껴집니다.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추가로 현장에서 질문을 받아볼까요. 네, 거기 체크무늬 잘생긴 남자분.
어려서부터 운동도 좋아하셔서 대학 축구부 활동도 했다고 들었는데, 운동을 한 것이 리코더를 부는 데 도움이 되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운동을 열심히 했어요. 대단히 잘했다는 게 아니라, 운동을 좋아해서 동생이랑도 많이 했는데, 비발디 협주곡 중 가장 어려운 곡 중 하나가 C단조 곡입니다. 그 곡 독부 부분에 32분음표가 아주 오랫동안 안 끝날 것처럼 이어집니다. 어렸을 때 이걸 연습하는 데 끝에 두 마디는 숨이 안 돼서 못하겠더군요. 그때부터 조깅 등을 조금씩 했는데 심폐기능이 좋아져서 결국엔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홀딱’의 마지막 순서인 ‘다시 쓰는 바이오그래피’를 진행하겠습니다. 숨가쁘게 답해주셔야 해요. 권민석은 198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신 왜 태어났다.
아, 제가 말씀 안 드렸나 보다. 저는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건 그렇고요. 왜라… 아…. 저는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서 다른 분들께 들려드리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권민석은 ‘과학적’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대신, 학창 시절 권민석의 과학 점수는 몇 점이었다.
100점 만점에 100점이었습니다.
권민석은 어머니가 사주신 브뤼헌 음반을 듣고 리코더에 빠졌다. 대신, 그때 어머니께서 그 음반 대신 “새겨 들어~”라면서 서태지 음반을 사주셨으면 내 인생은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실제로 저는 서태지를 꽤 열심히 들었어요. 그런데 새겨 들으라며 주셨으면, 청개구리여서 리코더를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요.
권민석은 리코더 전공이 없는 서울대 음대에 작곡과 이론 전공으로 입학했다. 대신, 권민석은 작곡과 이론 전공에서 무엇을 배웠다.
열심히 학교를 안 다녀서 거의 배우질 못했습니다. 그게 너무 아쉬워요. 하지만 과 분위기란 것이 있지요. 그곳은 음악을 연주는 게 아닌 ‘공부’하는 과입니다. 음악을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분들이 있구나, 그게 도움이 된 거 같아요. 공부도 하면서 연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심어주었으니까요.
어째 이어지는 질문 같은데요. 권민석은 2003년 겨울 조르디 사발의 내한 공연을 보고, 음악을 ‘공부’하는 연주자가 되자고 마음먹었다. 대신 권민석이 음악을 ‘공부’가 아닌 ‘낙’ 혹은 ‘느낌’으로 대할 때는 언제다.
연주하는 순간에는 저도 최대한 즐기려고 합니다. ‘연습은 연주처럼, 연주는 연습처럼’이 아니라 연습할 때는 최대한 공부해서 의미를 찾아내려 하고, 연주 때는 그 의미가 살아있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런 균형이 중요한 것 같아요. 바로크 자체가 수사학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여러 표현들의 인과관계로 곡이 구성되는 거죠. 그래서 구성도 알아야 되고 분석도 해야 하지만, 연주하는 순간에는 살아있는 예술이어야 하기에, 저도 즐기려 노력합니다.
권민석은 2009년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대신 경쟁심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권민석은 당시 어떤 고민 끝에 콩쿠르에 나갔다.
사실 콩쿠르를 아주 열심히 나가고 싶었어요. 불안함이 있었거든요. 우리는 지금 21세기 서울에 사는데 제가 하는 음악은 17ㆍ18세기 이탈리아ㆍ독일ㆍ프랑스 음악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자신감을 얻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연습하고 연주하더라도 불안감이 항상 있었습니다. 내가 잘하고 있나, 확인 같은 게 필요했어요. 그런 이유로 콩쿠르에 나갔습니다.
권민석은 바흐ㆍ베토벤ㆍ쇤베르크ㆍ윤이상을 존경한다. 대신, 권민석이 이들을 만나면 각각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바흐에게는 왜 리코더 곡을 더 안 쓰셨는지 묻겠습니다. 칸타타 열 곡 정도에 리코더가 들어가고, 리코더 협주곡이 두 곡 있는데, 왠지 더 있을 것 같아요. 소실된 곡이 많으니까요. 무반주 곡이 있지 않을까도 싶고. 어디 숨겨두지 않았냐고 묻고 싶습니다. 베토벤은 제 말을 들을 수 있을까요? 베토벤과는 그냥 같이 맥주를 마시고 싶어요. 왠지 호탕하실 거 같아요. 맥주 마시면서 더 재미있어지는 분들이 있잖아요. 쇤베르크는 아유… 모르겠습니다.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저 존경의 인사를 드리고요. 윤이상 선생생님께서 리코더 곡을 하나 쓰셨거든요. 1995년에 돌아가셨는데 1993년에 쓰셨습니다. 본인이 리코더를 대금 소리에 가장 가까운 악기라고 하셨다는데, 저도 그게 확실치 않아서 진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권민석은 리코더리스트다. 대신…
리코더에게 배우는 사람입니다. 악기에게 많이 배웁니다. 늘 악기가 인도하는 길이 있었습니다. 무슨 신앙 고백 같은데요, 허허. 악기가 보여준 길, 가르쳐준 길, 만들어준 길, 기회들, 즐거웠던 수많은 공연들, 곡들. 악기에게 배운 사람이란 표현이 맞는 거 같아요.
즐거운 대화, 감사드립니다. 이제 마지막 인사를 나눌까요.
제가 리코더를 전공하기로 마음먹은 후부터 ‘객석’을 보며 자랐는데, 리코더에 대한 기사는 아주 가끔씩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객석’ 안에 초대되어 여러분께 제 이야기와 연주를 들려드리다니, 감개무량합니다.
우리 모두가 감개무량한 밤이었다. 권민석의 리코더가 들려준 마랭 마레의 ‘에스파냐 풍의 폴리아’가 그 밤의 마지막 축주로 울려퍼졌다.
글 박용완기자(spirate@)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