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미국인들이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자신들을 대표하는 노래로 생각하듯, 우리를 대표하는 노래는 단연 ‘아리랑’이다. 서울올림픽과 한일월드컵을 비롯한 국가 규모의 행사에서는 꼭 아리랑이 사용되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아리랑을 주제로 창작곡을 만드는 일은 여러 모로 모험에 가깝다. 5월 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글 김상헌(2013 객석예술평론상 수상자) 사진 국립합창단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아리랑을 ‘새롭게’ 들리도록 만들기란 쉽지 않다. 자칫 잘못하면 진부해지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너무 창작성과 새로움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아리랑이 아니게 될 것이다. 게다가 아마도 한국 작곡가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아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을 갖고 있을 것이다(그것이 비록 습작일지라도). 그만큼 무수히 많은 ‘창작 아리랑’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러한 창작 아리랑을 오케스트라·성악가·판소리 명창은 물론 국악 앙상블과 여러 합창단이 함께 모인 ‘국민합창단’을 위한 편성으로 작곡하고 연주하기란 여간한 각오와 기획·행정력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서로 이질적인 음색을 지닌 국악과 서양음악 사이의 앙상블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 전체적인 구성의 균형도 고려해야 한다.
아리랑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기념해 국립합창단의 정기연주회에서 선보인 ‘송 오브 아리랑(Song of Arirang)’은 그 기획과 시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작곡가 임준희와 대본가 탁계석은 약 10여 가지의 각 지방마다 다른 다양한 아리랑을 여러 형태로 버무려 거대한 아리랑 칸타타를 만들어냈다. 우리에게 친숙한 여러 지방의 아리랑이 새롭게 만들어진 선율·가사와 함께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며 전개된다. 1부와 2부에서는 오케스트라와 성악가, 그리고 대규모의 ‘국민합창단’을 중심으로 다양한 아리랑을 풀어냈다면, 3부와 4부에서는 국악 앙상블이 등장해 보다 밀도 있는 ‘이야기의 전달’에 비중을 둔다. 특히 이때 오케스트라는 관악기를 모두 배재한 채 현악기만으로 마치 배경을 제시하듯 엷은 짜임새를 이루어 국악 앙상블과 조화를 이룬다. 이어 5부에서는 주로 무반주 합창이나 레퀴엠풍의 음악을 통해 차분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이는 ‘못다 부른 아리랑, 동포의 아리랑’이라는 애잔한 내용을 노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지막으로 등장할 화려한 다음 장을 예비하는 역할을 겸하기도 한다. 이후 마지막 6부는 경기아리랑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합창으로 화려하게 끝맺는다.
이러한 대규모의 곡을, 적은 리허설 기회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연주로 선보인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국립합창단, 그리고 케이아츠(K-Arts) 국악 앙상블을 비롯한 여러 연주자들의 연주도 돋보였다. 약간의 실수를 비롯해 매끄럽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촉박한 연습기간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며, 전반적으로 탄탄한 흐름을 시종일관 유지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다. “세계인이여 아리랑을 노래하자”라는 주제 때문인지 마지막 6부는 청중과 함께 할 수 있는 매우 ‘쉬운 음악’으로 채워졌다. 이는 앙코르에서 관객과 함께 노래하는 것을 계산에 넣은 구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6부에 이르기까지 쌓아놓았던 분위기를 일순간 무너뜨린 다소 진부한 결말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물론 어렵게만 끝내는 것이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보다 균형을 맞추면 어떨까 싶다.
‘송 오브 아리랑’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보다 작은 편성으로도 연주할 수 있는 편곡본이나 일부분만을 독립적으로 연주할 수 있게끔 배려하는 것도 ‘송 오브 아리랑’의 앞날을 위해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인이여 아리랑을 노래하자”라는 주제에 걸맞게 앞으로도 후속의 많은 공연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