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브루크너

끝없는 탐구로 빚어낸 독자적인 음악세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8월 1일 12:00 오전

1824 오스트리아 안스펠덴 출생
1848 성 플로리안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임명
1849 레퀴엠 D단조 작곡
1855~1861 사이먼 제히터 사사
1868 빈 음악원 교사 부임
1877 교향곡 3번 초연
1883 교향곡 7번 작곡
1884 교향곡 7번 초연
1891 빈 음악원 퇴직
1896 72세 나이로 사망


▲ 헤르만 폰 카울바흐 ‘브루크너의 초상화’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이들에게 ‘BMW’란 말은 조금 특별한 의미로 통용된다. ‘브루크너(Bruckner)·말러(Mahler)·바그너(Wagner)’의 머리글자를 딴 BMW는 소위 고수들이 듣는다는 음악이다. 세 작곡가의 음악은 우선 연주 시간이 긴 데다 형식과 내용이 독특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와 말러의 작품은 국내 공연계의 인기 레퍼토리로 손꼽히며 브루크너의 인기도 꾸준히 상승세를 타고 있다. 최근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 등 국내 대표적인 교향악단들이 브루크너 교향곡을 자주 무대에 올리고 있으며, 임헌정과 코리안심포니는 올해 11월부터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시리즈를 시작한다.

물론 브루크너의 음악은 결코 쉽지 않다. 음악 애호가들 중 많은 이가 BMW 중에서도 브루크너의 음악이 가장 귀에 안 들어온다고 말한다. 아마도 바그너와 말러의 음악은 비록 연주 시간이 길어도 우리 귀를 사로잡는 매혹적인 소리와 흥미로운 요소가 많지만 브루크너 교향곡이나 미사곡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엄습해오는 듯 압도적인 힘이 있기에 콘서트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을 들었을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마치 이 세상을 초월한 듯 신비로운 울림은 우리의 영혼과 공명하며 우주의 무한함을 느끼게 한다.

성 플로리안 교회의 오르간에서 받은 영감

브루크너가 그토록 독특한 음악세계를 이루기까지 그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1824년 9월 4일, 오스트리아 린츠 근처의 안스펠덴에서 교사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난 안톤 브루크너는 교회 성가대에서 어머니가 노래하는 미사곡을 들으며 음악에 눈떴고, 열 살 때 이미 교회에서 오르간을 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당시 브루크너의 부모는 종종 성 플로리안 교회에 아들을 데리고 갔는데, 아마도 그곳의 웅장한 오르간 소리와 장엄한 미사 의식은 소년 브루크너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높이 솟은 탑, 수백 개의 창문,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바로크 건축양식의 성당, 그리고 그 무엇보다 훌륭한 오르간! 1771년에 크리스만이 제작한 이 명품 오르간은 지금은 ‘브루크너 오르간’으로 불리지만 당시의 소년 브루크너는 이 오르간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1837년에 열세 살의 브루크너는 마침내 성 플로리안 교회 소년합창단의 성가대원이 되었고 그곳에서 3년간 수도원 생활을 하며 영성과 음악성을 키웠다. 그리고 1845년 성 플로리안 교회의 보조교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음악 공부에 몰두했다. 1848년부터 성 플로리안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어 교사 겸 연주자로서 본격적인 직업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브루크너는 작곡가로서 몇 곡의 훌륭한 작품을 작곡했는데, 그중 레퀴엠 D단조는 그의 친구이자 동생의 대부이기도 한 프란츠 자일러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작곡됐다. 명품 뵈젠도르퍼 그랜드 피아노를 갖고 있던 자일러는 브루크너에게 종종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도록 허락했을 뿐 아니라, 1848년 사망 당시 그 피아노를 브루크너에게 물려주었다. 브루크너는 평생 자일러가 물려준 뵈젠도르퍼 피아노로 작곡을 할 정도로 이 피아노를 아꼈다고 한다. 자일러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이 담긴 브루크너의 레퀴엠은 자일러가 타계한 그 이듬해 성 플로리안의 추모 미사에서 연주됐다.

 


▲ 1771년에 크리스만이 제작한 성 플로리안 교회의 오르간
지금은 ‘브루크너 오르간’이라 불리고 있다

평생 공부에 몰두한 학구파

브루크너는 성 플로리안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서 일찍부터 경력을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작곡가로 활동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실 그는 음악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대기만성형 작곡가로 꼽힌다. 그와 동시대에 활동한 작곡가 브람스도 교향곡 작곡엔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으나, 첫 주요 작품들은 이미 20대에 나왔다. 반면 브루크너의 주요 작품들은 모두 40대 이후에 작곡한 것이다. 평생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던 브루크너에게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855년 7월, 서른한 살이 된 브루크너는 작곡가로서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해야 할 이 시기에 다시금 작곡법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당시 이름난 선생인 사이먼 제히터를 찾아갔다. 빈 음악원의 교수인 제히터는 화성학과 대위법을 엄격하게 지도하기로 유명했다. 제히터를 찾아간 브루크너가 그의 ‘장엄 미사’를 보이자 제히터는 브루크너의 재능에 큰 감명을 받고 당장 제자로 받아들였다.

1861년까지 계속된 제히터와의 수업 기간은 ‘혹독한 맹훈련’ 그 자체였다. 브루크너는 성 플로리안 오르가니스트직을 그만두라는 제히터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해 12월에는 린츠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게 됐고, 수업 기간 중 작곡을 자제하라는 스승의 조언에 따라 오로지 화성법과 대위법의 공부에만 몰두했다. 브루크너는 본래 근면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특히 제히터와 수업하던 시대의 하루 일과는 거의 놀라움이다. 린츠 대성당 오르가니스트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 외에도 피아노 레슨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했으며, 합창음악의 애호가로서 린츠의 합창협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런 중에도 브루크너는 하루 일곱 시간씩 화성법과 대위법을 열심히 공부했으니 그의 학구열은 놀랄 만하다. 일벌레로 유명한 제히터마저도 화성법의 어려운 문제와 해결책에 관해 빼곡하게 적어놓은 브루크너의 원고를 보고 깜짝 놀라서 브루크너에게 너무 자신을 몰아치지 말고 건강을 생각하라고 충고하기까지 했다.

1861년에 제히터와의 수업을 마친 브루크너는 빈 음악원에서 화성법과 대위법의 교사가 될 수 있는 자격시험에 응시했다. 당시 요한 폰 헤르베크를 비롯한 빈 음악계의 내로라하는 교수들이 심사를 했는데, 브루크너의 뛰어난 실력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특히 주어진 주제로 즉흥 푸가 연주를 선보인 브루크너의 오르간 연주는 감탄을 자아내 헤르베크는 “우리가 그에게 시험을 치러야 한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는 만족하지 못하고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오토 키츨러를 찾아가 베를리오즈와 리스트 등 당대의 혁신적인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공부하며 새로운 음악세계에 눈을 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접한 바그너의 음악은 그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1863년 2월 13일, 린츠에서 바그너 ‘탄호이저’ 공연을 보고 그 악보를 접한 브루크너는 놀라움에 휩싸였고, 1865년 6월 뮌헨에서 이루어진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을 지켜보던 브루크너는 완전히 바그너 신도가 됐다.

 


▲ 1894년 성 플로리안 교회에서 브루크너

이해 받지 못한 바그네리안

그러나 1868년부터 빈에서 활동하게 된 브루크너에게 ‘바그네리안’이라는 꼬리표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음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한슬리크가 브람스의 음악을 옹호하고 바그너를 공격하던 당시 상황에서 공공연히 바그너를 지지하는 것은, 빈에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브루크너에겐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 1868년부터 빈에서 생활하게 된 브루크너는 스승인 제히터의 후임으로 빈 음악원에서 화성법·대위법·오르간을 가르치며 교향곡 작곡에 매진했으나 그가 발표하는 교향곡마다 음악 평론가들의 비난과 혹평이 쏟아졌다. 빈 필하모닉은 브루크너 교향곡 2번의 연주를 거부했고, 바그너에게 헌정된 교향곡 3번의 연주회는 그야말로 ‘대재앙’이었다. 1877년 12월 16일에 빈 악우협회에서 초연된 교향곡 3번의 초연 무대에 참석한 관객들은 한 악장이 끝날 때마다 하나둘씩 연주회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연주가 다 끝날 무렵에 객석에는 고작 25명의 청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교향곡 7번이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한결같이 참패를 거듭했는데, 이는 브루크너의 작품이 좋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반(反)바그네리안들의 신랄한 공격 때문이었다.

사실 오늘날에도 브루크너의 음악은 음악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의 교향곡은 베토벤으로부터 멘델스존, 슈만 등으로 이어진 독일의 교향곡 전통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밀고 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광대한 우주를 연상시키는 장대한 악상과 숭고한 아다지오 악장의 아름다움, 압도적인 피날레 악장의 독특함은 이 시대 음악 애호가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아마도 오늘날 브루크너의 교향곡이 점차 여러 무대를 통해 소개되고 있는 것도 브루크너 음악 특유의 대담한 화성과 장대한 표현 양식, 독특한 사운드 덕분이리라.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한 브루크너는 가장 전통적인 교향곡과 미사곡 형식을 통해 가장 독창적인 음악을 구현해낸 음악가라 할 만하다.

브루크너와 아바도의 마지막 작품, 브루크너 교향곡 9번

클라우디오 아바도(지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최근 국내 공연계에 브루크너의 작품이 자주 무대에 오르는 가운데 아바도의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음반이 출시되면서 브루크너 음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올해 1월에 타계한 아바도가 2013년 8월에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한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음반은 거장 아바도의 마지막 음반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지만 브루크너 교향곡을 천상의 음악처럼 다듬어낸 뛰어난 연주로도 단연 돋보인다. 아바도는 이 연주가 일생의 마지막이 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가 택한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은 브루크너에게도 마지막 작품이며 생애 마지막 날까지 작곡한 교향곡이다. 4악장이 미처 완성되지 않아 3악장 아다지오 악장으로 끝나는 이 교향곡에 대해 브루크너는 ‘모든 것의 왕이신 하느님께’ 바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바도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재현된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역시 마치 하느님께 바치는 노래인 양 지극히 아름답고 숭고하다. 사실 악보에 적혀 있는 음량 기호 등은 그다지 충실히 지켜지지 않는다. 악보에서 자유로워진 거장의 분방한 터치에 브루크너 음악에는 생기가 감돌고, 명연주자들로 구성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뛰어난 개인기는 놀랄 만하다. 해가 떠오르는 듯한 1악장 도입부에 이어 63마디에서 본격적으로 터져 나온 제1주제군의 폭발은 막강한 파워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잘 공명된 아름다움을 동시에 뿜어내 감탄을 자아낸다. 물론 풍성하면서도 감동적으로 표현된 제2주제 또한 벅찬 감동을 전해주며 으뜸화음이 광대하게 확산되어가는 브루크너 특유의 종결부는 더욱 압도적으로 표현됐다. 브루크너 교향곡 악장 중 가장 기괴하다고 평가되는 2악장에선 강렬하면서도 잘 다듬어진 음색이 일품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3악장의 조형미가 돋보인다. 잘 훈련된 음악가들도 그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운 3악장은 연주하기도 듣기도 어려운 악장으로 꼽히지만, 각 섹션을 무리 없이 연결시키는 자연스러운 흐름과 세 번의 강한 팡파르에 무게중심을 실은 구조적인 해석 덕분에 브루크너의 음악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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