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폭넓은 음악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은 독창성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1월 1일 12:00 오전

1882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에서 출생

1901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함

1902 부친 사망.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작곡 레슨을 받음

1906 카테린 노센코와 결혼

1913 발레곡 ‘봄의 제전’ 완성

1924 피아노 협주곡 초연으로 피아니스트로 데뷔

1934 프랑스 시민권 취득

1935 자서전 출판. 미국 종단 연주 여행을 떠남

1945 미국 시민권 취득

1959 세계 각지를 돌며 연주 여행을 떠남

1971 뉴욕에서 사망. 베네치아에 안장됨

“음악은 리듬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 마치 심장박동이 계속되어야만 삶이 있는 것처럼…”

그 누구보다도 리듬을 중요시했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그의 음악을 들으면 현대적이고 대담하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그 속에 담긴 정연한 질서에 매료되곤 한다. 이는 그의 음악 속에 담긴 근원적인 ‘리듬의 힘’ 덕분인 듯하다. 그 때문인지 오늘날 국내외 여러 오케스트라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즐겨 연주하고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가운데서도 그의 초기 출세작 ‘불새’는 여러 오케스트라의 단골 레퍼토리이며 리듬이 복잡한 ‘봄의 제전’도 종종 연주된다. 오케스트라의 뛰어난 기량이 요구되는 ‘페트루슈카’도 올해 런던 심포니와 KBS교향악단이 연달아 연주해 음악 애호가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디아길레프의 눈에 띈 청년 음악가

당대 최고의 베이스 가수 페도르 스트라빈스키의 아들로 태어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어린 시절부터 극장과 친숙했다. 아버지의 무대 리허설을 지켜보곤 했던 오페라극장은 그에게 가장 친근한 장소였고 피아노 즉흥연주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피아노로 즉흥연주를 하다가 악상을 떠올리는 일이 그에겐 이미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일상의 습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가 음악가가 되기 위해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한 것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23세 때부터였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먼저 법학 공부를 마친 스트라빈스키는 1902년부터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을 배웠다. 러시아 민족음악을 중요시한 ‘러시아 5인조’ 작곡가 중 한 명인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특히 관현악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관현악법은 스트라빈스키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하다. 스트라빈스키의 초기 관현악곡들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관현악곡을 연상케 하는 현란한 색채감으로 가득하며 여기에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역동적인 리듬감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에 강한 개성을 부여하고 있다.

1909년, 스트라빈스키의 초기작 ‘환상적 스케르초’와 ‘불꽃놀이’가 연주되었을 때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다재다능한 공연 기획자 디아길레프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파리에서도 능력을 인정받던 인물로, 그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에는 미하일 포킨 같은 실력 있는 안무가와 알렉상드르 브누아 같은 디자이너 등 훌륭한 예술가가 동참하고 있었다. 발레음악 작곡가를 찾고 있던 디아길레프에게 스트라빈스키의 출현은 반가운 일이었으나 신중했던 디아길레프는 경험이 부족한 27세의 청년 음악가에게 우선 편곡부터 의뢰하기로 했다. 발레 ‘코볼트’의 관현악 편곡에 만족한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쇼팽 피아노곡의 관현악 편곡도 맡겼다. 스트라빈스키는 그때까지만 해도 러시아 발레단에 고용된 편곡자 정도의 신분이었지만 1910년 ‘불새’ 초연 이후 단숨에 스타 작곡가로 떠올랐다.

본래 디아길레프는 체레프닌이나 리아도프에게 ‘불새’의 작곡을 맡기려 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제안을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 스트라빈스키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스트라빈스키는 혼신의 힘을 다해 ‘불새’의 음악을 완성했고 1910년 6월 25일에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이루어진 ‘불새’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음악평론가들은 스트라빈스키의 뛰어난 관현악법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오늘날 ‘불새’의 모음곡 버전은 세계 여러 오케스트라가 즐겨 연주하는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디아길레프와의 첫 작품의 성공에 힘입은 스트라빈스키는 이듬해인 1911년에 다시 디아길레프와 함께 발레 ‘페트루슈카’의 음악을 완성했다. 피아노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 작품은 관현악 색채감에 있어 한층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처럼 감정을 느끼는 인형들이 주인공이라는 설정도 흥미롭다. 이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인 ‘페트루슈카’는 1830년경 제정 러시아 시대의 농민에게 흔한 이름인 ‘페터’의 애칭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발레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주인공의 적절한 이름을 찾아내곤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


▲ 러시아 발레의 대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사진 왼쪽)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Getty Images

‘봄의 제전’의 초연 스캔들

‘불새’와 ‘페트루슈카’의 연이은 성공으로 승승장구하던 스트라빈스키에게 한차례의 위기가 찾아왔다. 1913년 ‘봄의 제전’ 초연 스캔들로 몸살을 앓게 된 것이다. 그해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이루어진 발레 ‘봄의 제전’의 초연 ‘대소동’은 음악사를 들썩이게 한 큰 사건이었다. 당시 ‘봄의 제전’이 공연되고 있던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은 운동경기장을 방불케 할 정도의 소음으로 가득했다. 이 기괴한 발레와 낯선 음악에 야유를 보내는 청중과 지지를 보내는 청중으로 패가 나뉘어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스트라빈스키는 그날의 악몽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연주가 시작되자 음악에 대한 조용한 불만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러나 그건 약과였다. 커튼이 열리고 안짱다리에 머리를 길게 땋은 무희들이 등장해서 점프를 하기 시작하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객석 뒤쪽에서는 ‘당장 그만두지 못해!’라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으며, 플로랑 슈미트는 ‘점잖은 숙녀분들, 그만 조용히 하시오’라고 외쳤다. 소란은 계속되었다. 몇 분 뒤, 나는 참을 수 없어서 홀을 빠져나갔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무대 뒤로 달려갔는데, 거기서 디아길레프는 홀의 소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전등을 깜박이고 있었으며, 니진스키는 날개를 단 의상을 입은 채 그의 꼬리를 붙들고, 마치 키잡이처럼 의자 위에 서서 무용수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첫 장면을 보면 ‘봄의 제전’의 유명한 초연 대소동 장면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초연에 앞서 잔뜩 긴장한 스트라빈스키의 모습, 바순 주자가 무리한 고음을 연주하며 발레의 막이 오르면 차츰 술렁이기 시작하는 객석의 표정, 불만을 터뜨리며 야유를 퍼붓는 관객들….

사실 ‘봄의 제전’의 초연 대소동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만 그 원인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니진스키의 안무가 매우 파격적이었고 무대의상도 독특한 데다 역동적 리듬이 강조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까지 가세해 그 시대 청중에겐 더욱 기괴하게 보였을 것이다. 아무튼 ‘봄의 제전’은 오늘날 발레공연 보다는 관현악곡으로 종종 연주되고 있으며 1914년 4월 지휘자 피에르 몽퇴가 관현악곡으로 선보인 무대에서는 청중이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스트라빈스키는 발레 무대가 아닌 연주회장에서 초연 당시의 패배를 멋지게 설욕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신고전주의 발레의 대표적인 안무가 조지 발란신(사진 왼쪽)과 함께 한 스트라빈스키 ⓒThe New York Public Library

신고전주의 음악으로 전환한 이유

‘봄의 제전’의 초연 대소동 후 전쟁이 터지자 스트라빈스키는 가족을 이끌고 스위스로 이주해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고 그의 음악 역시 새로워졌다. 전쟁으로 인해 ‘봄의 제전’과 같은 대편성 관현악곡을 작곡하기 어려워진 스트라빈스키는 몇 대의 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소규모 실내악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그의 음악 스타일도 좀 더 고전적이고 간결하게 변모했다. 이른바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런 유형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풀치넬라’(1920)가 유명하며, ‘병사의 이야기’(1918)도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병사의 이야기’는 내레이터의 낭독과 배우의 연기, 그리고 무용수의 춤이 나오는 무대를 위한 작품으로 마치 ‘음악적인 동화’와 같으며 악기 편성이 매우 독특하다. 현악기로는 바이올린과 콘트라베이스, 관악기로는 클라리넷·바순·코넷·트롬본, 그리고 여러 타악기가 함께 연주해 그 음색이나 분위기가 매우 현대적이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프랑스로 이주한 스트라빈스키는 ‘관악기를 위한 8중주’를 비롯한 실내악곡을 완성했고 1927년에는 ‘오페라-오라토리오’라는 독특한 유형의 ‘오이디푸스 왕’을 작곡해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선보였다. ‘오이디푸스 왕’은 디아길레프의 파리 데뷔 20주년 기념으로 시인 장 콕토가 비극적 전설을 라틴어로 번안한 대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등장인물들이 마치 신화 속의 인물처럼 최소한의 동작만을 보여주며 노래하는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연극 의상을 입고 가면을 쓴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개성을 나타내지 않은 채 마치 석상처럼 연기해야 한다. 아마도 이 작품을 오페라-오라토리오라 부르는 것도 이토록 독특한 특징 때문이리라.

제2차세계대전, 그리고 또 한 번의 변신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로 스트라빈스키는 일생일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이 시기 큰딸과 아내를 잃고 어머니의 죽음까지 지켜봐야 했던 그는 이미 프랑스 국적을 얻었음에도 프랑스를 떠나 미국행을 결심했다. 미국 할리우드에 자리 잡은 스트라빈스키는 뉴욕 서커스단을 위한 ‘서커스 폴카’(1942)나 재즈 밴드를 위한 ‘에보니 협주곡’(1945) 등 미국에 어울리는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내놓았다.

그리고 1948년 이후 새로운 음악 스타일로 전환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동안 주로 옛 음악 기법을 새롭게 수용한 신고전주의 작품들을 내놓았던 스트라빈스키는 마침내 쇤베르크의 ‘12음 기법’, 즉 한 옥타브를 이루는 12반음에 동등한 중요성을 부여한 현대 기법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당시 쇤베르크의 추종자인 로버트 크래프트를 만난 스트라빈스키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새롭게 수용한 ‘칸타타’(1952)나 ‘아곤’(1957) 등을 내놓으며 새로운 작품 시기를 열었다.

원시주의 발레음악으로부터 신고전주의와 재즈, 그리고 12음 기법에 이르기까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실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그 때문에 무엇이 스트라빈스키의 스타일인지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그의 카멜레온 같은 변신과 상업적 성향은 종종 비난을 받기도 했다. 스트라빈스키를 역사의식이 결여된 인물이라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스트라빈스키의 독창성만큼은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옛 음악을 수용하든, 현대 기법을 수용하든, 스트라빈스키는 항상 자신만의 독창적 방식으로 재창조해냈으며 그가 완성한 작품들은 결코 현학적이거나 불친절하지 않다.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현대성과 독창성이 담긴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이 오늘날 그토록 자주 연주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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