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 바우슈 ‘넬켄’

최고는 아니되 가장 사랑받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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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2월 18일 9:00 오전

이 춤의 운명이라니

“스텝은 언제나 다른 데에서 유래된다. 절대로 발에서 온 적이 없다. 동작을 만들어가는 일은 언제나 중간중간에 한다” – 피나 바우슈-

 

©Jochen viehoff

 

2000년 LG아트센터가 개관했을 때의 일이다. 낯선 공연장에 모여든 관객들이 자리를 잡고 막이 올랐을 때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대 가득 돋아난 핑크색 카네이션들. ‘댄스플로어’가 아닌 곳에서 춤을 추다니, 그것이 번듯한 대형 공연장에서 실현되다니, 그리고 힘들게 꽂은 꽃들을 망설임 없이 뭉개다니. 독일 안무가 피나 바우슈(Pina Bausch, 1940~2009)가 이끄는 탄츠테아터 부퍼탈의 ‘넬켄(Nelken, 1982; 개막 당시 제목은 ‘카네이션’)’이었다. 무대에선 독일 셰퍼드가 정찰하고, 남자가 여자 드레스를 입고 토끼처럼 뛰었으며, 공연자들은 양파를 썰고 서로 싸우고 관객에게 수신호를 가르쳤다. 두 시간의 난장으로 카네이션들이 짓이겨지는 걸 목격하는 것은 하나의 경험이자 가르침이었다.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 ‘저래도 되는구나.’ 예상치 못한 상황들, 거기서 드러나는 예민한 뉘앙스와 자유로움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세계 각지에서 무수히 공연된 ‘넬켄’은 그렇게 컨템퍼러리댄스의 폭을 넓혀나갔다.

 

카네이션! 카네이션!

넬켄(nelken)은 독일어로 카네이션을 뜻한다. 피나 바우슈의 ‘넬켄’은 카네이션이 가득한 들판의 인상에서 출발한다. 1980년 여름, 남아메리카에서 순회공연 중이던 피나 바우슈와 무용수들은 칠레 안데스산맥의 한 계곡에서 카네이션 들판을 마주쳤다. 카네이션이 끝없이 펼쳐진 언덕의 빛과 공기가 그대로 극장으로 녹아들어 선연한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넬켄’은 음각판화(陰刻版畵)를 닮았다. 그림이나 글자 대신 바탕에 잉크를 묻혀 찍어내는 음각의 기법처럼 무용수보다 공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넬켄’뿐 아니라 바우슈 작품의 대부분이 공간을 부각시킨다. 바우슈는 무대 미술가이자 연인이던 롤프 보르칙(Rolf Borzik), 그리고 그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후엔 페터 팝스트(Peter Pabst)와 협업하여 극장 무대에 드라마틱한 공간을 구현하는 데 힘썼다. 일인용 의자가 가득했던 ‘카페 뮐러’(1978), 5톤의 벽이 한순간 무너지는 ‘팔레르모, 팔레르모’(1989), 악어가 어슬렁거리는 ‘순결의 전설’(1979), 그리고 무대 전체에 발목 높이까지 물을 채워 극장의 불문율을 깨뜨린 ‘아리아’(1979)가 그 예이다. 팝스트는 잔디밭·흙·얼음 등의 이질적인 재료로 무대 바닥을 채웠는데, 그중에서도 ‘넬켄’이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이다.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이 작품을 위해 무용단은 매 공연마다 현지에서 철물을 구해 무대 구조물을 세우고 아시아에서 제조된 몇천 송이의 조화 카네이션을 꽂는다.

핑크색 카네이션이 고르게 피어난 들판은 고전회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상적인 낙원이다. 한 여성이 하이힐에 흰 팬티만 입고 반도네온을 멘 채 꽃 사이를 유유히 걸어 다니는 이미지는 마치 풀을 뜯는 한 마리의 사슴처럼 목가적인 풍경이다. 이 낙원에 어울리는 존재는 무엇일까? 바우슈는 여성들, 그리고 여자 드레스를 입고 토끼처럼 깡충거리는 남성들을 데려다 놓았다. 천진난만하고 우스꽝스럽지만 공격적이지 않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낙원의 평화는 금세 깨진다. 검정 양복을 입은 경호원 네 명이 독일 셰퍼드 두 마리를 끌고 등장하여 수시로 순찰하고 무대 가장자리에서 날카롭게 지켜본다. 아기에게 다정하게 음식을 먹이는 제스처를 행하던 남자가 여자에게 강제로 오렌지를 먹인다. 빨간불엔 멈추고 파란불엔 움직이는 놀이를 하던 남녀 중 한 명이 다른 이들을 지나치게 감시하고 명령하면서 싸움이 벌어진다. 남자들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의자에 앉아있는 여성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간다. 스턴트맨이 등장해서 탑 구조물에서 상자더미로 떨어진다. 이 와중에 단정했던 카네이션 들판은 쑥대밭이 되고 드레스와 정장 차림으로 등장했던 무용수들은 숙취에 시달리는 파티 피플처럼 만신창이가 된다.

 

뒷맛 씁쓸한 유머

바우슈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넬켄’은 뚜렷한 줄거리가 없다. ‘춤다운 춤’을 추지도 않는다. 각 장면은 논리적이지 않고 뜬금없이 다음 장면으로 이어진다. 각 부분이 완벽하게 짜여 있기보다는 전체 속에서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이러한 방식은 전통적인 안무법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기에 미술의 ‘콜라주’나 영화의 ‘몽타주’ 기법에 비유되곤 한다.

‘넬켄’의 각 장면은 블랙 유머와 비논리로 가득하지만 이들을 중첩해보면 개인을 억압하는 권력이 드러난다. 그러고 보니 이 낙원은 그리 좋은 곳이 아니다. 알게 모르게 감시받고 강요당하는 곳이고, 바닥까지 드러내야 하는 모멸감을 맛보는 곳이다. 검은 양복의 사내가 종종 등장하여 무용수들에게 여권을 요구한다. “Passport, please.” 공항의 입국장이나 이국땅에서 들으면 가슴이 쪼그라드는 그 말. 토끼처럼 깡충거리기 위해서 허가가 필요하다. 게다가 개처럼 짖으라거나 개구리처럼 뛰어오르라거나 테이블 밑을 기어 다니라는 모멸적인 명령을 하더라도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보이지 않는 억압 앞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무너진다. 카네이션 언덕이 있던 칠레는 피노체트의 군사독재정부가 장악했고, 그녀의 조국엔 베를린 장벽이 굳건하던 때였다. 바우슈는 구체적인 역사를 묘사하지 않는 데다 이제는 독재정권도 베를린 장벽도 무너졌지만, 그녀가 묘사하는 감시사회는 여전히 파장력을 지닌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가학성은 공연자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과도 중첩된다. 나이 지긋한 남자 무용수가 구부정한 늙은 몸에 여자 드레스의 어깨끈을 반대 어깨에 걸쳐 입은 채 툴툴거리며 발레 테크닉을 선보인다. “자, 뭐 좀 볼래요? 마네쥬 볼래요? 자, 마네쥬! 마네쥬! 뭐 딴 것 보고 싶어요? 앙트르샤 시스! 뭐든 할 수 있어요!” 마네쥬(manège)는 마치 자전하며 공전하는 지구의 움직임처럼 점프와 회전을 동시에 하면서 무대 전체를 도는 동작이고, 앙트르샤 시스(entrechat six)는 공중에서 두 발을 여섯 번 부딪치고 착지하는 동작이다. 모두 남성 주역무용수의 기량을 과시하는 동작들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슬아슬하게 테크닉을 소화해내는 그를 보며 관객들은 웃고 환호성을 보낸다. 하지만 늙은 몸과 까다로운 기량의 부조화가 바로 환호의 이유라는 점에서, 묘기 부리는 물개에 쏟아지는 환호만큼이나 가볍고 씁쓸하다. 바우슈의 작품이 춤이 별로 없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을 생각하면 이는 자기지시적 농담이자 관객에 대한 비아냥에 가깝다.

또 다른 무용수는 관객에게 소리친다. “이건 완전 시간 낭비야. 당신들은 벌써 하품하고 난 발 아파 죽겠어!” 그러고는 젊은 무용수를 데리고 나와 빌리 할리데이의 나른한 재즈 음악에 맞춰 감자 껍질을 까게 한다. “당신네들에게도, 나에게도 이게 낫지.” 다른 장면에선 아예 스턴트맨 네 명이 나와 탑 구조물에서 떨어지는 묘기를 선사한다. 자극적인 볼거리를 끝없이 요구하는 관객은 무대 위 공연자의 존엄에 상처를 준다. 그리고 그 상황을 관객에게 친절히 일깨워줌으로써 ‘넬켄’은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이 아름다운 낙원에서 사랑은커녕 소통조차 어렵다. 한참 웃고 난 후 뒷맛이 씁쓸하다.

 

엄친딸의 스캔들

피나 바우슈는 처음부터 특출한 존재였다. 1955년 15세에 에센 폴크방 무용학교의 무용과에 입학했는데 졸업 때에는 그녀를 위해 특별공로상이 제정될 정도로 주목받았다. 독일학술교류처(DAAD)의 장학금으로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유학했고, 독일로 돌아와서는 폴크방 발레의 수석무용수가 되었다. 곧 발레단의 안무가이자 폴크방 무용과의 학과장이 되었으며 폴크방 탄츠스튜디오의 운영권마저 넘겨받았다. 심지어 1971년 여름에는 오직 바우슈를 부퍼탈 발레로 모셔오기 위해 여러 극장이 신진 안무가에게 새로운 발레 작품의 창작을 위촉하는 축제까지 열었다.

시작부터 천재로 각광받으며 특별대우를 받고, 엘리트 코스를 거치며 모든 주요자리를 꿰찬 바우슈. 그러나 최고점에 쉽게 올라선 그녀가 내놓은 작품은 불편하고 어려운 작품들이었다. 바우슈는 고전발레에서 시작해 미국과 독일의 현대무용을 섭렵했지만, 막상 그녀의 작품들은 그 어떤 카테고리에도 속하지 않았다. 바우슈의 작품엔 ‘춤’이라 할 만한 게 없었고 불편한 장면으로 가득했다. 고전발레에 익숙했던 부퍼탈 극장의 단골 관객들은 노골적으로 바우슈의 작품을 혐오하고 공격했다. 객석에서 작품을 지켜보는 바우슈에게 침을 뱉거나 머리채를 뜯고 집으로 협박 전화를 걸기도 했다. 바우슈가 부퍼탈 시의 상징이 된 오늘날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지역 관객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도 한참 후였다.

바우슈에 대한 지역 관객의 거부감이 컸던 것은 이해할 만하다. 1920년대 현대무용은 미국과 독일에서 동시에 발전했다. 독일에선 루돌프 폰 라반, 마리 비그만 등 대가들이 등장해 크게 발전시켰으나 나치에 협력했다는 오점을 남겼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 독일에선 현대무용은 껄끄럽고 위험한 것이었기에 고전발레에 집중하는 경향을 띠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부퍼탈 발레에 부임한 바우슈는 발레단의 명칭을 ‘탄츠테아터 부퍼탈’로 바꾸었다. 그녀의 스승인 쿠르트 요스가 발레에서 드라마를 강조하는 ‘테아터탄츠’를 주장했다면 바우슈는 연극과 춤을 구별할 수 없는 ‘탄츠테아터’ 개념을 내세웠다. 바우슈의 작품은 당시 어떤 안무가와도 달랐다.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창조함으로써, 관객의 거부와 저항을 감내하면서, 바우슈는 다시 독일 땅에서 현대무용을 부활시켰다.

 

클리셰를 걷어낸 잔해들

‘넬켄’은 어렵사리 만들어졌다. 한 번에 완성되지 않았을뿐더러 공연 직전까지 리허설을 하며 작품을 바꾸었다. 초연 후에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품이 된 후에도 바우슈는 이 작품을 이리저리 바꾸고 줄여나갔다.

무엇을 그리 줄이고 바꾼 것일까. 무용작품은 대개 안무가의 시그니처 동작들을 나열하거나 안정적인 줄거리를 따라간다. 하지만 바우슈는 클리셰나 필러를 못 견디는 사람이다. 그녀는 동작이나 대본에서 시작하는 대신 무용수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거기서 작은 단서들을 모아 엮어나갔다. 직선적인 질문과 그럴싸한 대답은 폐기처분했다. 오히려 대답에서 스쳐가는 부차적이고 소소한 것들이 작품의 주요 모티브로 떠올랐다. 초연 날짜의 압박 속에서도, 실패의 두려움 속에서도 그녀는 계속하여 질문 던지고 수정했다. 그 결과 작품은 시작에서 끝으로 선형적으로 진행되기보다는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여러 겹 허물을 벗으며 자라났다.

‘넬켄’은 통속 드라마에서 클리셰를 모두 걷어낸 후의 잔해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 두려움과 외로움, 남녀 간의 폭력, 인간에 대한 억압, 소통의 어려움 등은 바우슈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로서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을 건드린다. 바우슈는 무용수가 아니라 인간을, 동작이 아니라 삶을 보여주었다. ‘넬켄’의 마지막 장면에서 무용수들은 무대 앞으로 나와 한 줄로 서서 자신이 왜 무용수가 되었는지 말한다. “나는 말하는 것보다 춤추는 게 쉬웠기 때문에 무용수가 되었다” “우연히” “무용수랑 사랑에 빠져서” “군인이 되기 싫어서.” 공연하는 국가마다 현지 언어로 더듬더듬 건네는 말에서 관객들은 캐릭터가 아닌 인간을 바라보게 된다.

 

골수 바우슈 vs. 관광상품 바우슈

바우슈의 커리어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그녀는 1974년에 부퍼탈의 안무가가 되어 7년간 ‘봄의 제전’ ‘카페 뮐러’ ‘매음굴’ 등 8편의 작품을 창작했다. 소규모인 데다 개인적이고 어두운 주제를 다루었기에 ‘순수한 바우슈 풍’이라 여겨졌다. 한편 1980년대에 그녀는 연인의 죽음과 출산을 겪고 몇 년간의 단절 후 다시금 활동하면서 이른바 ‘세계도시 연작’을 시작했다. 로마·팔레르모·마드리드·이스탄불·홍콩·서울 등 세계 각국의 도시에 몇 주간 머무르며 탐색한 후 이를 테마로 한 작품을 발표했다. 보다 밝고 상냥하며 예의 바른 이 작품들은 국제적인 스폰서십과 관광산업과 맞물려 각국의 기념품이 되었다.

물론 평론가들이 선호하는 것은 ‘골수 바우슈’이다. ‘골수 바우슈’는 단편적 장면들을 나열하고 반복하며 텍스트와 대사,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많이 활용하는 스타일이다. 무용·연극·음악·언어·무대미술이 혼합된 특유의 양식으로 작품의 형식보다는 내용을 부각한다. “나는 어떻게 인간이 움직이는가보다는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더 흥미를 느낀다”라는 바우슈의 유명한 말처럼, 바우슈 스타일은 인간에 대한 탐색보고서라 할 수 있다. ‘넬켄’은 소위 ‘골수 바우슈’의 후기 작품이다. 화려한 카네이션 들판으로 인해 해외 극장에 자주 초청받는다. 그러나 ‘골수 바우슈’의 정수로 꼽히진 않는다. 바우슈의 어린 시절 자전적인 경험을 담은 ‘카페 뮐러’, 인간 집단이 가진 잔혹함과 남녀의 권력차를 드러낸 ‘봄의 제전’, 남녀의 성적 끌림과 불평등을 다룬 ‘매음굴’ 등에 비해 늘 뒤처진다. 아무래도 핑크빛 카네이션이 불러일으키는 낭만성과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다른 작품에 비해 강렬한 한 방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기라성 같은 스타들의 그늘에 가리던 2등은 뜻밖에도 바우슈의 사후에 모두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넬켄-라인에 참여하세요!

2009년 피나 바우슈가 사망했다. 폐암 진단을 받은 후 닷새만이다. 바우슈가 아직 보존보다는 창작에 초점을 두고 활발하게 활동하던 터라 모두에게 당황스러운 소식이었다. 같은 해 사망한 미국 안무가 머스 커닝험의 경우 90세까지 장수했기에 작품과 무용단의 거취에 대해 오랜 기간에 걸쳐 대비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한동안의 혼란과 애도 후 바우슈의 아들인 롤프 살로몬이 피나 바우슈 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은 바우슈 작품의 유지와 보호라는 주 업무 외에도 바우슈를 기리는 프로젝트인 ‘넬켄-라인(Nelken-Line)’을 시작했다.

‘넬켄-라인’은 ‘넬켄’의 마지막에 나오는 ‘사계행진(seasons march)’을 모티브로 한다. 루이 암스트롱의 재즈 음악 ‘웨스트 엔드 블루스’에 맞춰 무용수들이 봄·여름·가을·겨울을 각각 상징하는 제스처를 행하며 한 줄로 걷는다. 무용수들이 한 줄로 걷는 것은 바우슈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대형이지만 그중에서도 사계행진이 가장 유명하다. 제스처는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봄은 잔디가 낮게 돋아나고, 여름은 잔디가 높이 자라 해가 반짝이며, 가을은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고, 겨울은 추위에 떤다. 모두 일곱 개의 제스처다. 각 계절이 두 걸음에 표현되니 총 여덟 걸음이면 한 프레이즈가 완성된다. 프레이즈가 쌓이고 쌓이면서 계절의 순환, 인생무상이 스며 나온다. 바우슈를 숭상했던 빔 벤더스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피나(Pina, 2011)’는 사계행진으로 시작한다.

‘넬켄-라인’ 프로젝트는 모든 이를 행진에 초대한다. 제스처를 자세하게 설명한 동영상이 재단 홈페이지에 링크되어 있고, 이를 보고 스스로 만든 동영상을 보내면 재단의 비메오 사이트(https://vimeo.com/channels/nelkenline)에 공개된다. 현재 300여 개의 영상이 올라와 있다. 어린 학생들, 일반인들, 나이든 무용수들이 들판에서, 수영장에서, 박물관에서, 결혼식장에서 춤춘다. 우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들은 모두 다른 상황에서 모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그 삶은 ‘넬켄-라인’처럼 그리 단순하고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어가는 행진은 어쨌든 견디어내는 삶에 대한 긍정과 지지를 담고 있다.

‘넬켄’은 ‘봄의 제전’이나 ‘카페 뮐러’처럼 걸작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한 작품이다. 그러나 피나 바우슈의 작품 중에서 가장 친근하고 사랑받는 작품이다. 바우슈 작품에 담긴 날 선 풍자와 냉소, 폭력적이고 불편한 상황은 ‘넬켄-라인’에서 따뜻하고 아련한 제스처로 승화되었다. 거장에게 압도되지 않고 누구나 춤에 합류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바우슈를 애도하는 방식이다.

 

정옥희(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강의·연구·번역과 집필을 통해 춤이 사회에 존재하는 방식에 대하여 사유한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로 무용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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