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2’

가면의 얼굴, 그 페르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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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0월 7일 9:00 오전

사람들은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작고 소중한 삶의 가치보다 자신이 얻은 가면이라는 페르소나, 그것을 상징하는 지위와 권력이 자신의 얼굴이라고 믿어버린다. 낮에는 성공한 사업가로, 밤에는 어두운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으로 살아가는 배트맨처럼 가면은 진짜 표정은 숨긴 채 가면을 통해 변이된 자아를 드러낸다. 감독 팀 버튼(Tim Burton, 1958~)은 가면 뒤에 숨은 정체성의 혼돈과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표정에 순종하도록 운명 지어진 사회적 얼굴을 들여다본다.

가면, 은신처로서의 분장

분장(扮裝) 혹은 변장(變裝)은 자신이 가진 고유한 정체성, 즉 신분을 숨기기 위한 것이다. 무대 위 배우들은 분장을 통해 새로운 인물을 연기하고, 영화 속 배우는 변장을 통해 자신을 지우고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가 된다.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에 등장하는 악당들은 하나같이 가면으로 분장하고 과거의 자신을 지운다. 그들은 가면의 맹목적 강요, 즉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표정에 순종하도록 운명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초창기 팀 버튼 영화 속 인물들은 주로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혹은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충분히 자라지 못한 미성숙한 어른들)이다. ‘배트맨 2(Batman Returns)’(1992)의 주인공 배트맨은 어린 시절 악당들에게 부모가 살해당해 고아가 되었고, 펭귄맨은 흉측한 모습 때문에 부모에게 버림받는다. 사회적 약자인 캣우먼은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살해당한다. 하지만 소멸하는 대신, 펭귄맨과 캣우먼은 각각 펭귄과 고양이라는 대상을 모체로 두고 그 정체성으로 되살아난다. 대상을 주체화하면서 환생하는 셈이다. 이들은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창조자들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가면을 쓰는 일, 이것은 새로운 삶을 지휘하기 위한 심리적 성형수술에 가깝다. ‘배트맨 2’에서 억울한 죽음 뒤, 고양이의 영혼을 얻어 집으로 돌아온 셀리나가 재봉틀 앞에 앉아 스스로 캣우먼의 복장을 만드는 모습은 그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변화의 상징이며, 이전의 자아를 버리는 신성한 성인식으로 읽힌다. 또한 캣우먼이란 이중성의 가면을 뒤집어쓴 이후 셀리나는 현실에서도 아름답고 도발적인 여성으로 변화하는데, 이는 캣우먼이란 가면이 주는 절대적인 안정감이 가면을 벗은 뒤에도 후광처럼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가면의 고정된 표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숙명과도 같은 비극이다. 팀 버튼은 단순한 악당으로서의 변장이 아니라, 가면을 통해 환생할 수밖에 없는 약자로서의 악당, 악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약자들의 슬픔까지 깊이 들여다보면서 선과 악의 날 선 프레임과 영웅과 악당이라는 이원화된 대립구조를 희석한다. 캣우먼과 펭귄맨은 각각 고양이와 펭귄을 모방하면서 현실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던 자신의 실재를 버린다. 그들은 가면을 뒤집어쓰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가면, 어쩌면 진짜 내면

‘배트맨’ 속 악당들이 생존을 위해 변장을 택한 것과 달리, 배트맨의 가면은 충분히 이기적이고 선택적인 변장이라 할 수 있다. 브루스 웨인은 가면 대신, 성공한 사업가로 평온한 일상을 선택할 수 있다. 즉 그는 배트맨의 가면을 버리기 전까지, 평범한 사람의 안온한 일상을 선택할지 가면을 쓰고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적을 소통하면서 부모의 원수를 갚을지 결정할 수 있는 온전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가면은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업가로 성공한 브루스 웨인이라는 얼굴과 배트맨의 얼굴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다. 어쩌면 그는 사회적 성공이라는 가면 위에 다른 가면을 쓰고 스스로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 같다. 변장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드러내는 배트맨이라는 영웅과 그를 둘러싼 악당들을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을 찾자면, 복수심이다. 아름다움이 절대 선으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추한 펭귄맨은 세상을 파괴하는 것으로 복수를 하고, 배트맨은 사회를 파괴하려는 악당을 박멸하는 것으로 복수한다.

하지만 복수의 끝, 그 결과는 다르다. 펭귄맨은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해당하고 배트맨은 살해당한 어머니를 가슴에 품은 채 영웅 노릇을 한다. 팀 버튼은 배트맨의 인간적 고뇌와 매력을 최소화하고, 다른 악당들에게 동정적인 시선을 주면서 배트맨의 복수 자체에서 카타르시스를 배제한다. 팀 버튼은 절대적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 영웅과 악당의 대립을 통해, 인물들의 정신 분열적 이중성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숨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안온한 얼굴 뒤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배트맨은 백만장자 브루스 웨인이며, 캣우먼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멍청한 여비서 셀리나이고, 지하 하수도에 살고 있는 펭귄맨은 귀족 집안의 버려진 자식 오스왈드다. 그들은 모두 트라우마가 된 자신의 정체성을 가면 뒤에 숨기고 살아간다. 이들을 통해 팀 버튼은 실패한 자신의 과거를 복수로 보상받으려는 기성세대의 일그러진 욕심을 더불어 풍자한다. 보호자 없이 홀로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혹은 덜 자란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현재를 딛고 일어설 줄 아는, 내 정체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팀 버튼은 ‘배트맨 2’를 통해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 나의 기괴함 혹은 독특함이 제거해야 할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토닥인다. 그리고 장롱 속에 숨어 구원을 꿈꾸는 대신, 문을 열고 나와 세상과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해 보면, 노력해 보면, 우리가 그토록 조롱하던 기성세대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거나, 세상의 이치에 맞춰 타협하는 꼰대가 되지 않는 법도 있지 않을까 싶어지는 것이다. 마음이 얕을수록 진심은 어두워지고, 마음이 깊어질수록 진심은 투명해진다는 세상의 이치 속에 팀 버튼이 그려내는 세상은 늘 어둡지만, 그 속에 말갛게 들뜬 희망을 반딧불이처럼 남겨둔다. 그래서 마이클 키튼이라는 가장 영웅 같지 않은 영웅이 주인공인, 슈퍼 히어로물이지만 펭귄맨과 캣우먼이 이야기의 서정과 정서를 고스란히 차지하고 있는 이 기묘한 영화 ‘배트맨 2’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그 그늘에 숨어 있던 소수자들이다. 블록버스터라는 거대한 자본 뒤에 숨겨둔 작가주의는 그렇게 자본에 의해 정체(停滯)된 것이 아니라, 소수자의 정체(正體)를 드러내는 것으로 빛난다.

글 최재훈(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후 각종 매체에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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