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소멸될 것만 같았던 탱고가 새로운 부흥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 탱고의 우상, 아스토르 피아솔라의 등장 덕이었다. 그는 기존의 닫힌 음악, 제한된 음계와 화성에 갇혀 있던 탱고음악에 날개를 달아 드넓은 창공을 보여주었다.
아스토르 피아솔라(Astor Pantaleon Piazzolla. 1921.3.11-1992.
7.5)는 오늘날 탱고라는 음악, 혹은 탱고라는 단어와 동일시되는, 탱고라는 음악의 상징적·절대적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탱고의 역사를 일순간에 변환시켰으며, 춤곡으로 가두어진 탱고의 의미를 비로소 감상을 위한 음악으로 돌려놓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뒷골목에서 제한된 탱고의 범위를 전 세계로 확장시켰으며, 오늘날 가장 널리 연주되는 격조 높은 현대의 클래식 음악으로 그 지위를 상승시켰다. 20세기 음악의 체질을 한 순간에 바꿔놓았던 아스토르 피아솔라에 다가가기 위한 사전 단계로 그가 사랑했던 탱고음악의 역사에 대해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탱고의 생성 과정
탱고의 어원은 ‘만지다’라는 뜻의 라틴어 ‘탕게레(Tangere)’에서 비롯되었다. 탱고는 19세기 유럽의 댄스와 댄스 음악이 아르헨티나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리듬이 혼용된 복합적인 음악 산물이었다. 탱고의 문화적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유럽,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유기적인 결합은 19세기 아르헨티나의 복합적 문화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남부 유럽의 고전적인 춤곡과 아프리칸 이주민들의 민속음악이 결합된 탱고 음악은 쿠바 아프리칸 노예들의 음악 ‘하바네라(Habanera)’를 모시고 있었다. 하바네라는 19세기 초 쿠바에서 유행한 4분의 2박자의 춤곡으로, 아바나에서 이 우아한 춤곡을 접한 아르헨티나의 선인들에 의해 19세기 중엽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왔다. 쿠바의 하바네라는 아르헨티나에서 더 강한 템포감과 아르헨티나 목동의 노래 가우초의 멜로디가 차용된 ‘밀롱가(Milonga)’ ? 현재 탱고의 변형된 형식이나 댄스 홀을 지칭한다 ? 라는 고유한 형식으로 발전했다.
1860·870년대에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확산된 밀롱가는 아프리칸 흑인 노예의 주술적 의식을 표방한, 독특한 싱커페이션을 가진 4분의 2박자 카니발 음악 칸돔블레(Candomble)로 진화하고, 이는 탱고의 원형에 가장 근접한 음악이 되었다. 그 밖에 유럽의 폴카와 중남미의 격렬한 축제음악 살사와 볼레로에서도 그 내용을 흡수하게 되었다. 탱고 음악에 함유된 복잡하고 다양한 다문화적 배경은 탱고 음악이 오늘날 인종과 민족에 구애 받지 않고, 월드뮤직으로서 폭넓은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요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탱고의 산지는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항구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 지역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르헨티나의 수도가 된 것은 1880년대이며, 1930년대까지 급속한 팽창이 이루어져, 짧은 시간에 라틴 아메리카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19세기 말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유럽에서 이주해온 수많은 이주민들로 가득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열기가 가득한 이국적인 ‘남미의 파리’ 거주자 중 75퍼센트 이상이 유럽에서 이주해온 이민자들이거나 그들의 자손들이었다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동남쪽에 있는 지저분한 항구인 보카에는 부두와 신생 공업지대가 인접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에서 이주해온 극빈층 이주민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 가난한 서민의 도시에는 유럽의 생활 양식 그대로인 카바레와 음악이 흐르는 선술집과 레스토랑이 보헤미안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고 있었다. 거친 항만 노동자와 도축업자, 밀수꾼과 거리의 여인들이 뒤엉킨 이 도시의 풍경에는 생활에 찌든 노동자의 권태와 고독감이 가득했다.
이렇게 하층민의 가난한 삶과 체념적인 인생관은 라틴음악의 격정과 융화되어 탱고음악의 정서와 내용이 되었다. 흥청대는 밤거리와 어둡고 습기 가득한 보카의 일상은 4분의 2박자의 강렬한 리듬감과 악센트를 자아내며, 강한 호소력으로 그들의 삶과 영혼을 지배했다. 보카의 빈민굴에서 발생한 탱고는 처음에는 항구에서 기생하는 도박사, 밀수꾼 등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했으므로 ‘포르테냐 음악(Musica Portena)’이라고도 불렸다. 아르헨티나의 생선 비린내 가득한 선창과 홍등가의 흐린 불빛 아래에서 태어난 탱고는 가난한 민초들의 삶에 스며 있는 애환과 영욕, 기쁨과 눈물, 집착과 한이 어우러진 고단한 삶의 기록이며, 그들이 살아가고자 하는 희망이자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초기 탱고음악의 발전, 카를로스 가르델의 등장
최초의 탱고 곡은 1880년대에 발표된 ‘Bartolo’로 기록되고 있으며, ‘El Choclo’의 작곡자인 앙헬 비욜도가 기타와 하모니카를 동시에 연주하며 장난스럽게 불렀던 노래가 탱고음악의 원형이었다. 초창기의 탱고는 플루트·클라리넷·기타·바이올린으로 연주되었지만 1910년 무렵 ‘El Amancer’의 작곡자인 로베르토 피르포가 처음으로 독일에서 수입해온 반도네온이라는 악기를 사용하면서, 반도네온은 탱고를 특성화하는 상징이 되었다. 어둡고 무거운 음색의 반도네온은 강력한 스타카토, 레가토 주법으로 아르헨티나 탱고의 독특한 리듬감을 재현하는 데 더없이 유용한 도구였다. 1910년대 오스발도 푸글리에세에 의해 제안된 탱고의 기본적인 편성은 ‘오르케스타 티피카’라는 고유한 명칭의 반도네온 2대·바이올린 2대·피아노 1대·베이스 1대로 구성된 6중주 편성으로 확립되었다. 때로 오르케스타 티피카를 축소한 반도네온 1~2대·바이올린 1~2대·피아노 1대·베이스 1대의 편성인 ‘콘훈토’는 보다 밀도 높은 연주에 사용되기도 했다.
카를로스 가르델은 탱고음악의 첫 번째 거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수려한 외모와 아름다운 음색, 뛰어난 작곡 능력을 보유한 그는 여러 방면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탱고 스타, 작곡가, 보컬리스트였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19세기 말 아르헨티나로 이주해서 유럽과 남미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결합하며 탱고음악의 특성을 대중들에게 설파했다. 그는 자신이 제작, 주연으로 참가했던 영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에 13세 소년, 아스토르 피아솔라를 출연시키기도 했다. 가르델은 1937년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수백 곡의 히트곡을 남겼다. 초기에는 주로 왈츠나 쿠에카, 가우초 등의 아르헨티나 민속음악을 연주하다가, 1917년 최초의 탱고 히트곡 ‘Mi Noche Triste’를 발표하면서 아르헨티나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Mi Buenos Aires Querido’는 그의 이름을 오늘에까지 지속시켜주었던 초기 탱고음악의 명곡들이었다. 무엇보다 카를로스 가르델이 남긴 탱고음악에 대한 최고의 공로, 감사는 훗날 아스토르 피아솔라의 탱고의 개혁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안겨주었다는 것이었다. 가르델의 음악적 열정과 재능은 고스란히 피아솔라의 음악으로 이전되어, 그의 음악을 형성하는 위대한 그림자로 살아남았다.
가르델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그가 뿌린 씨앗들은 하나 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가르델과 함께 ‘현대 탱고의 시조’라 불렸던 훌리오 데 카로를 비롯해서 로베르토 피르포·프란시스코 카나로·오스발도 프레세도·후안 필리베르토 등이 포스트 카를로스 가르델 시대의 주역으로 초기 탱고의 발전을 진두지휘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음악은 단순한 감상의 차원이 아니라 탱고의 또 다른 의미인 무용을 위한 목적을 특화시켰다. 이때부터 탱고음악은 춤곡의 성격을 전면적으로 띠기 시작했으며, 탱고음악을 위한 대규모 밴드가 조직되었다. 후안 데 아리엔조와 아니발 트로일로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라 쿰파르시타’와 같은 정식 오케스트라 버전의 곡을 생산했다.
탱고의 황금기라 일컬어지는 1930년대는 탱고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혼란의 시간이었다. 1930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군부가 아르헨티나를 점령하면서 탱고음악은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3인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문화를 향유할 수 없었던 폭정 시대에 탱고음악은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탱고가 연주되고, 탱고 춤이 함께 흐르던 클럽과 댄스 홀은 폐쇄되었고, 수많은 탱고 작곡가와 뮤지션들이 블랙 리스트에 오르며 창작의 날개를 꺾어야만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면서 탱고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고, 탱고음악은 ‘아르헨티나 서민들의 자유를 위한 찬가’라는 의미가 보태졌다. 가난한 빈민층의 음악이었던 탱고는 지식인과 상류층으로까지 확산되었으며, 더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이미지로 변모되어갔다. 1946년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표방하며, 기층 민중의 지지를 얻었던 정치 군인 후안 페론이 집권하고, 아르헨티나 국민의 연인이자 성녀였던 영부인 에비타가 정열적인 탱고를 선보임으로써, 탱고는 다시 한 번 최고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1952년 에비타가 사망하기 전까지 아르헨티나의 전역에는 수백 개의 탱고 오케스트라가 번성하였고, 크고 작은 댄스 홀에는 수만 명의 댄서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론주의가 선택한 정치적·외교적 고립, 그리고 1955년 로나르디 군부의 집권과 경제적 공황을 겪으면서 탱고는 20여 년 동안 암울한 어둠 속에 버려져야만 했다.
탱고가 처음 유럽에 소개된 것은 20세기 초였으며, 1910년대에는 유럽의 상류층 사회를 중심으로 탱고 붐이 일기도 했다. 이 무렵 유럽을 사로잡은 탱고의 열풍은 미국에도 상륙하는데, 이탈리아 출신의 무용가이자 영화배우였던 루돌프 발렌티노에 의해 확산된 ‘발렌티노 탱고’의 공로가 컸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탱고음악은 유럽에서 새로운 작풍으로 작곡·연주되었고, 탱고는 전통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와 유럽의 우아한 댄스 음악이 접목된 유럽의 새로운 탱고 양식 ‘콘티넨털 탱고’로 분화되었다.
아르헨티나 탱고가 빈민굴과 선술집 등 서민들의 삶의 터전에서 비롯되었던 것에 반해, 콘티넨털 탱고는 유럽 상류사회의 무도회에서 시작되었다는 정서와 계급적 측면에서의 뚜렷한 차이가 있다. 콘티넨털 탱고는 정박자의 리듬을 기초로 한 아르헨티나 탱고에 비해 더 가벼운 리듬감과 우아한 선율미를 강조함으로써 유럽의 고전음악에 근접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탱고가 반도네온·바이올린·피아노·베이스에 의해 연주되었던 데 반해, 콘티넨털 탱고의 오케스트라 편성 방식은 유동적이기는 했지만 더욱 다채로운 현악기가 채용되어 실내악적인 감수성이 부가되었다. 또한 어둡고 무거운 음색의 반도네온 대신에 아코디언이 널리 채택됨으로써, 밝고 매끄러운 멜로디 중심의 음악이 되었다. 콘티넨털 탱고가 댄스음악의 목적에 치중하고 있는 데 반해, 아르헨티나 탱고는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그리움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가사 중심의 노래 언어라는 특성에서도 뚜렷한 차별성을 지닌다.
누에보 탱고의 점화, 아스토르 피아솔라의 시대
에비타의 사망, 그리고 기층 민중의 힘을 두려워했던 군부 독재가 탱고를 억압하면서, 탱고는 2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침묵해야만 했다. 탱고가 연주되던 클럽이나 살롱은 문을 닫았고 자연스레 탱고 오케스트라는 하나 둘 해체되었다. 탱고를 연주하던 뮤지션들도 생계를 위해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만 했으며, 수많은 초기 탱고음악의 선구자들이 세상을 떠났다. 오르케스타 티피카의 편성은 축소되고, 레코드 녹음이나 해외 공연 등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탱고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탱고음악이 겪은 모진 풍파와 함께 대중들의 기호도 변모했다. 변화의 요구에 발맞추어 탱고음악 역시 새로운 체질 개선을 시도하게 된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였다. 영원히 소멸될 것만 같았던 탱고가 새로운 부흥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 탱고의 우상, 아스토르 피아솔라의 등장 때문이었다. 그는 기존의 닫힌 음악, 제한된 음계와 화성에 갇혀 있던 탱고음악에 날개를 달아 드넓은 창공을 보여주었다. 그는 독창적인 화음 개념을 부착시켜 1959년 ‘Adios Nonino’를 발표한 이후 ‘Berretin’ ‘Verano Porteno’ ‘Melancolico Buenos Aires’ 등의 현대 탱고의 걸작을 쏟아내면서 탱고의 새로운 차원과 부흥을 꾀했다.
피아솔라는 “탱고도 재즈처럼 변화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치며, 탱고음악이 시대와 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양식으로 진화·발전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탱고가 지니지 못했던 ‘즉흥연주’의 자유를 탱고에 흡입하였으며, 다양 한 방식의 편성을 제안함으로써 탱고의 정형성을 해체시켰다. 또한 클래식의 화성을 탱고에 이식시킴으로써 누에보 탱고의 음악적 위상을 현대 클래식 음악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으로 격상시켜주었다. 그가 내디딘 ‘새로운 탱고’ 즉, ‘누에보 탱고(El Nuevo Tango)’를 향한 선언 아래 깨어 있는 탱고 작곡가와 연주자가 몰려왔으며, 이 변화의 흐름 속에 탱고는 오늘까지 닫힌 음악 형식이 아닌 열린 음악으로 진화하고 있다. 피아솔라의 고군분투 속에 탱고는 재즈와 클래식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음악가의 귀와 가슴을 유혹했으며, 더 이상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음악으로만 구속되지 않았다.
1977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카를로스 가르델과 훌리오 데 카로의 탄생일인 12월 11일을 ‘탱고의 날’로 제정했으며, 1980년에는 탱고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고 부흥의 리듬은 고조되었다. 1987년 탱고의 명곡에 당시의 스텝을 가미한 ‘탱고 아르헨티노’의 공연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세계의 모든 음악가들은 자신의 창작에 탱고라는 라틴 아메리카의 격정과 비감 어린 음악을 넣기 위해 탱고를 향해 몰려들고 있다.
글 하종욱(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