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크 엘링턴(1)

그의 이면(裏面)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5월 1일 12:00 오전

재즈는 20세기의 음악, 미국의 음악, 흑인의 음악이다. 오늘날 새로운 클래식, 예술음악의 입장으로 평가되는 재즈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최고의 공로자를 찾는다면 그는 조지 거슈윈도, 루이 암스트롱도, 마일즈 데이비스도 아닌,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1899년 4월 29일~1974년 5월 24일)일 것이다. 듀크 엘링턴이 남긴 수천여 곡의 작곡, 연주를 통해 재즈는 미국의 음악, 흑인의 음악이라는 제한에서 벗어나 서양 고전음악에 버금갈 만한 고유한 양식미를 구축하게 되었고, 그의 음악은 20세기 이후의 음악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력으로 살아있다.

Sir Duke
소울, R&B의 거장 스티비 원더는 1977년 자신의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듀크 엘링턴에게 바치는 싱글 곡 ‘Sir Duke’를 발표했다. 그해 빌보드 넘버원과 영국 팝 차트의 정상을 일시에 석권한 이 곡에는 다음과 같은 노랫말이 있다. “But here are some of Music’s pioneers. That time will not allow us to forget. For there’s Basie, Miller, Satchmo. And The king of all Sir Duke…” 카운트 베이시·글렌 밀러·루이 암스트롱 등의 음악적 선구자들이 있지만, 진정한 제왕은 듀크 엘링턴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1999년은 듀크 엘링턴의 탄생 100주년으로, 전 세계 음악계는 그를 위한 헌정·추모·공로·연구에 열중했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시카고 심포니를 이끌고, 피아니스트로 듀크 엘링턴의 음악을 연주했다(‘Tribute To Ellington’). 바렌보임은 앨범의 내지에 “내가 그려오던 듀크 엘링턴의 연주법은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바렌보임에 필적하는 마에스트로 사이먼 래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음악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던 버밍엄 시향과 재즈 연주자 조슈아 레드먼·클락 테리 등을 대동한 채, 듀크 엘링턴의 음악을 고전음악, 클래시컬 심포니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Classic Ellington’). 1999년, 비재즈의 영역에서 듀크 엘링턴을 위한 음악적 헌정 대열에 참가했던 대표적인 이들로는 조앤 팔레타 지휘하의 버팔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장 이브 티보데·캐나디언 브라스·바르셀로나 색소폰 쿼텟 등이 있다. 물론 듀크 엘링턴의 본거지인 재즈 영역에서의 헌정·추모의 작업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방대했다.
1967년, 영국 런던의 어느 공연장에서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듀크 엘링턴과의 협연을 펼쳤다. 이 공연에서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듀크 엘링턴의 음악적 힘, 그리고 ‘스윙은 조화의 최종 결과물’이라고 역설한 관객이 있었다. 그는 영국 왕실음악원을 졸업한 플루트 주자로 프로그레시브 록그룹 제스로 툴(Jethro Tull)을 이끌었던 이언 앤더슨이었다. 이언 앤더슨은 1984년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으로 클래식과 록 음악의 음악적 조화의 결과물을 찾은 ‘Classical Case’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1994년 흑인 소프라노 바버라 헨드릭스는 스위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서 듀크 엘링턴을 위한 헌정 공연을 했다. 재즈 피아니스트 몬티 알렉산더의 트리오와 함께 한 이날의 실황 공연은 1996년 ‘A Tribute To Duke Ellington’이라는 제명으로 발매되었다. 바버라 헨드릭스는 어린 시절부터 듀크 엘링턴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고, 그의 고결한 음악성에 동경과 존경의 마음을 지녔다고 했다.
듀크 엘링턴의 전기를 저술했던 음악평론가 제임스 링컨 콜리어는 듀크 엘링턴을 (미국 현대음악의 아버지 찰스 아이브스와 함께) 미국 음악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했다. 편곡자 클리프 칼넛은 “듀크 엘링턴은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위대하게 만들어준 음악성을 동시에 지녔다”라고 평했다.
듀크 엘링턴은 1999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65년, 퓰리처상을 위한 음악위원회는 만장일치로 그를 평생공로상으로 추대했지만, 이사회가 이를 기각, 그해 음악 부문의 수상자가 없었던 적도 있었다. 1969년, 그의 70회 생일 파티는 백악관에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 자리에서 대통령 훈장이 수여되었다. 듀크 엘링턴은 1970년, 미국 국립 문학·예술협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1971년에는 재즈 아티스트로는 최초로 스톡홀름 왕립음악원의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듀크 엘링턴의 작곡 방식
듀크 엘링턴을 수식하는 가장 흔한 표현은 ‘재즈의 바흐’다. 서양 고전음악의 아버지로 평해지는 바흐의 명성에 빗대어, 재즈의 음악적 양식을 구체화·양식화시킨 듀크 엘링턴의 공로를 찬양하는 표현이다. 이런 비유는 일생 동안 1,500여 곡 혹은 2,000여 곡(어떤 자료에서는 6,000여 곡의 작곡을 남겼다는 언급도 있다)의 작곡을 남긴 위대한 작곡가라는 평가를 위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듀크 엘링턴은 확실히 다작(多作)의 작곡가였다. 그의 작품 군들은 간단하게 블루스의 코드 진행을 즉흥연주하며 이를 작곡의 개념으로 발전시킨 곡에서부터, 대규모 편성의 빅 밴드 작곡, 모음곡 형식의 작곡집, 뮤지컬, 영화음악, 재즈와 클래식을 접목시킨 교향시, 아시아, 유럽의 민속음악 개념을 흡수한 퓨전 앙상블, 오페라, 오라토리오, 종교음악 등 그 수용 범위는 실로 다채롭고 광범위했다. ‘In a Sentimental Mood’ ‘Sophisticated Lady’ ‘Solitude’ ‘Prelude to Kiss’ ‘I’m Beginning to See the Light’ ‘It Don’t Mean A Thing’ 같은 작품들은 아름답고 우아한 선율미로 그려진, 20세기 미국 음악의 서정시였으며, 장중하고 엄격한 기품이 서린 곡들도 많았다. 그는 특정한 주제 하에 통일성을 지닌 곡들을 배열하는 조곡 형식의 작품들도 많이 남겼다. 흑인의 인권과 자유, 미국과 세계의 역사, 인간의 존엄성 등 그가 음악에 새긴 철학과 세계관도 다양했다.
듀크 엘링턴은 바흐나 베토벤, 모차르트와는 사뭇 다른 개념의, ‘현대의’, 그리고 ‘재즈의’ 작곡가였다. 그는 작품을 만드는 아버지와 같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작곡가는 아니었다. 그는 악기별로 세세한 음악적 표기를 했던 친절한 작곡가, 완벽주의자 유형의 작곡가도 아니었다. 듀크 엘링턴이 남긴 수천여의 작곡들의 대부분은 악곡에 대한 스케치, 혹은 밑그림에 가까운 곡들이었다. 그는 레코딩 스튜디오나 공연 리허설에 간단하게 표기된 악보만을 들고 작곡을 설명하곤 했다. 짧은 멜로디, 혹은 코드만 달랑 적혀 있거나 특정 악기의 화음만이 표시된 악보도 있었다. 어떤 곡에서는 악보에 트럼펫 파트, 혹은 오케스트라 구성원의 이름을 적고서는 쿠티 윌리엄스 파트, 자니 하지스 파트라는 메모만이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는 간단한 악곡 스케치를 잡고, 오케스트라의 멤버들 앞에서 대여섯 마디의 짧은 주제부의 멜로디를 피아노 연주를 통해 시연했다. 그의 역할은 충분했다. 당대 최고의 솔리스트들이 즐비했던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구성원들은 듀크 엘링턴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하여,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고 이를 통해 듀크 엘링턴은 자신의 작곡을 확장·발전·향상시켰다.
듀크 엘링턴은 그만의 창작, 그만의 작곡 방식·습관·방법론이 있었다. 듀크 엘링턴의 작곡은 공동 창작, 그리고 부분의 조각들을 잇대어 하나의 완결된 악곡으로 완성하는 편집, 짜깁기에 의한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자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에릭 홉스봄은 듀크 엘링턴의 특별한 창작의 습관을 직시했다. “듀크 엘링턴은 자기 작품의 악보를 만들거나 보존하는 데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곡의 형태나 사운드가 마음속에 그려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음악은 그, 엘링턴에게 연주될 때만 의미가 있었다.” 듀크 엘링턴의 악기는 그 자신이 이끄는 밴드였으며, 그의 작곡은 표현되는 밴드의 앙상블·하모니·솔로가 사운드로 발현될 때 비로소 완결될 수 있었다. 그의 작곡가로서의 정확한 지점은 연주와 선행·분리되는 작곡이 아닌 연주와 동일시되는 작곡의 개념에서 성립되었다.

엘링턴주의자
듀크 엘링턴의 음악적 가치에 대해 가장 많은 비중을 할애하는 것이 작곡가로서의 면모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듀크 엘링턴의 음악적 본질은 밴드 리더로서의 면모였음은 몇 번이고 강조되어야 할 만한 핵심적 내용이다. 듀크 엘링턴이 이끄는 오케스트라는 그의 악기였으며, 동시에 그의 작곡·편곡의 시작과 끝이었다.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는 1923년 처음 밴드가 결성된 이래 그가 세상을 떠났던 1974년까지 단 한 번의 해산 없이 50여 년의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최고의 수장이 이끄는 재즈 오케스트라답게 동시대에 가장 출중한 솔리스트들이 즐비했다. 강력한 보스 기질과 인화와 통솔력을 겸비한 듀크 엘링턴의 리더십 덕분에 많은 멤버들이 20~30년 이상의 장기근속으로 충성과 의리를 바쳤다. 1927년 17세의 나이로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 가입했던 바리톤 색소폰 연주자 해리 카니는 듀크 엘링턴이 사망했던 1974년까지 47년간 몸담았다. 그는 듀크 엘링턴의 사후 5개월 뒤 스승의 죽음을 뒤따랐다. 클라리넷 바니 비가드·지미 해밀턴, 트럼펫 주자 바버 밀레이·쿠티 윌리엄스·렉스 스튜어트·캣 앤더슨·클락 테리, 바이올린 주자 겸 코넷 주자 레이 난스, 색소폰 파트의 자니 하지스·벤 웹스터·해리 카니·폴 곤잘베스, 트롬본 주자 조 트리키 샘 낸튼·로런스 브라운, 베이스 주자 지미 블랜턴, 그리고 편곡자 빌리 스트레이혼 등은 듀크 엘링턴의 음악을 빛내주었던 최고의 솔리스트이자 오케스트라의 공동주주였다.
듀크 엘링턴은 각 플레이어의 개성적인 사운드를 훌륭하게 끌어내는 남다른 편곡자로서의 능력을 지녔다. 그는 올스타 밴드의 라인업을 곧게 유지하기 위해 오케스트라를 효율적으로 관리, 경영하는 탁월한 관리자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스윙 빅 밴드가 하나 둘 사라질 즈음에도, 듀크 엘링턴은 사비를 털어 연주자들에게 보조금을 주면서 오케스트라를 유지했다. 자신의 음악적 연인이자 분신이었던 빌리 스트레이혼이 동성애자였음을 밝혔을 때, 듀크 엘링턴은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케스트르라 단원들에게 빌리 스트레이혼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불문율로 할 것을 명령했다. 흑인 동성애자가 감내해야 할 부당한 편견과 공격으로부터 듀크 엘링턴은 친구를 보호해주었다. 빌리 스트레이혼은 듀크 엘링턴의 음악적 핵심은 ‘통솔력’이었다고 언급하며, 그를 밀실에서 오선지를 그리는 작곡가가 아닌 연주를 통해 작품을 완성한 작곡가였다고 증언했다.
듀크 엘링텅은 자신의 음악 생활에 대해 “노래하며 춤추는 유랑자”로 살아온 삶이라 평했다. 여색을 밝히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기면서 정작 자신의 가족, 부인과 자식들에게는 무관심했던 듀크 엘링턴은 오케스트라의 구성원들에게는 지극한 정성과 사랑을 바쳤다. 그렇게 수십 년, 혹은 음악 인생의 경력 전체를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와 함께 했던 사이드 맨을 일컬어 엘링턴주의자(Ellingtonian)라고 칭한다.

Black, Brown & Beige
듀크 엘링턴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흑인 중 한 명으로 평가되어왔다. 백악관 집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19세기에 태어난 미국의 흑인으로서는 경제적·교육적으로 윤택한 환경에서 성장한 듀크 엘링턴은 백인 주류 문화의 외양처럼 말끔한 정장, 유창한 연설과 친절한 미소로 쇼 비즈니스, 사교계에도 발이 넓었던, 야심찬 사업가였다. 1933년, 처음 영국을 방문할 당시, 라벨, 델리우스와 같은 클래식 작곡가로 평가받고자 했으며, 자신을 ‘재즈 작곡가’로 칭하는 것을 반갑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을 가장 훌륭하게 소화했던 재즈 보컬리스트 엘라 피츠제럴드를 ‘Beyond Category’ 즉 카테고리를 넘어선 인물로 칭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즈가 미국 흑인들의 위대한 문화적 산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런 평소의 신념을 작품으로 실천했다. 그는 스스로 의식 있는 흑인이자 미국 흑인들을 위한 대변인이 되고자 했다. 1941년의 연설에서 “흑인이야말로 미국의 창조적인 목소리”라고 주장했다. 데뷔 초기였던 1928년에 ‘Black Beauty’라는 자긍심 어린 작곡을 발표했던 듀크 엘링턴은 1935년에는 뮤지컬 레뷔 ‘Symphony In Black’에서 엉클 톰의 역사가 아닌 자각하는 흑인들의 모습과 그들의 음악적·종교적 구원을 담고자 했다. 1943년 카네기 홀에서 초연된 이래 수차례 개작되었던 교향시 ‘Black, Brown & Beige’는 듀크 엘링턴의 음악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자, 그의 흑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예술적으로 풍부하게 발현된 작품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미국의 흑인 노예의 역사를 서사적으로 담고 있는 이 작품에 수록된 ‘Come Sunday’는 흑인들의 가장 경건한 성가로 자리매김되었다.
그 밖에도 듀크 엘링턴은 아프리카 중서부에 위치한 라이베리아 공화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위촉된 ‘Liberian Suite’를 작곡했다. 재즈의 산지인 뉴올리언즈 재즈에 대한 탐구심이 발휘된 ‘New Orleans Suite’와 같은 작품들이 뒤따랐다. 그는 흑백의 인종을 모두 포용하는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했으며, 덕분에 그는 미국 흑인 사회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음악인의 표상이 되었다. 말년에 듀크 엘링턴은 라틴아메리카·아시아·중동·유럽의 민속음악적 향기를 재즈와 결합시키는 실험들을 지속시키며, 재즈, 더 나아가 음악의 ‘경계 없는 공존’을 꿈꾸기도 했다.

글 하종욱(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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