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을 그어야 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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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6월 1일 12:00 오전

금을 그어야 하는 순간
글 유윤종(동아일보 문화기획팀장) 사진 김영일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조상 이야기’에서 ‘불연속적 정신의 독재’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칼로 끊어내듯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보다 그렇게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세상에는 훨씬 많다는 얘기다.
인간은 침팬지와 다른 종이다. 수백만 년 전 하루아침에 침팬지와 인간이 갑자기 나뉜 것은 아니다. 긴 시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차이가 축적됐을 뿐이다. 그런데도 둘이 나뉘는 ‘순간’의 화석을 내놓으라는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10만 명 당 400명이 독감에 걸리는 순간 ‘전염병’으로 공식화된다. 왜 꼭 400명이어야 하는지 뚜렷한 근거는 없다. 그래도 무엇인가는 기준이 있어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올해 들어 수많은 콩쿠르 자리를 지켰다. 단계별 통과자를 경연장 로비에 게시하는 순간 수많은 표정이 엇갈린다.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주변의 축하를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침울한 얼굴로 자리를 뜨는 사람도 있다. 때론 그 자리에 주저앉는 사람도 보게 된다.
탈락한 사람이 모든 면에서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심사위원들의 집계표를 합산한 결과로 다음 단계 진출자와 탈락자를 가리는 것이고, 탈락자 중에서는 어느 심사위원으로부터 1위 성적을 받은 사람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게 콩쿠르다. 미래의 유망주를 가려내 기회를 주고 격려하는 자리지만 각각의 장단점이 있는 장래의 예술명인들 중에서 몇몇을 집어내 ‘불연속적’ 결과를 발표해야만 한다. 그 결과 아쉬움의 표정을 지어야 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저기 망연한 얼굴로 먼 산을 쳐다보는 젊은 예술가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고 싶다. “잘 된 것일지도 몰라. 더 발전해서 다음 번 준비됐을 때 제대로 기회를 잡으라는 뜻일 거야. 이번에 우승한 친구는 의기양양하겠지만 자네보다 못한 점, 미처 준비되지 못한 점도 분명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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