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의 시작
듀크 엘링턴의 본명은 에드워드 케네디 엘링턴이었다. 1899년 4월 29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의 직업은 백악관의 집사였다. 당시 미국의 흑인 가정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환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익힌 자부심 넘치는 태도로 인해, 어린 귀족 같다고 해서 ‘공작’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7세부터 피아노 가정교사를 통해 피아노를 배웠지만, “나는 어린 시절 피아노 레슨을 받은 횟수보다 빠진 횟수가 더 많았다. 나는 피아노 연주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회고할 만큼 그는 음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음악이 아닌 미술에 재능을 보여 미술학교의 장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화가가 아닌 작곡가ㆍ피아니스트로 운명을 바꾸게 된 필연적 계기는 당시 워싱턴 DC를 방문했던 흑인 스트라이드 피아니스트의 음악에 심취하면서였다. 그중 한 명이 듀크 엘링턴의 피아노 스타일에 절대적 세례를 안긴 할렘 스트라이드 피아노의 아버지 제임스 P. 존슨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3개월 앞두고 자퇴를 결정한 듀크 엘링턴은 5인조 밴드를 조직하여 고향의 카페와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1918년에는 고교 시절의 애인 에드나 톰프슨과 결혼, 다음 해에는 외아들 머서 엘링턴이 태어났다. 1923년에는 뉴욕으로 입성, 밴드 이름을 ‘Washingtonians’로 정하고, 자신의 이름에는 ‘듀크’라는 애칭을 사용하며 활동의 폭을 넓혀 나갔다. 1924년 첫 번째 레코딩을 가지는 등 그의 음악은 뉴욕에서도 나날이 사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1927년 12월, 드디어 듀크 엘링턴은 뉴욕 재즈 신의 주인공으로서 도약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할렘에 위치한 라이브 클럽 ‘코튼 클럽’의 개막과 함께 이곳에서의 연주가 확보된 것. 백인 전용 클럽으로 무대에는 흑인들만이 섰던 코튼 클럽에서 듀크 엘링턴은 여느 출연진을 압도했다. 코튼 클럽의 라디오 중계를 통해 그의 명성은 미국, 그리고 유럽으로까지 넓고 빠르게 확산되었다. 서서히 몸집을 불려나갔던 그의 밴드에도 알토 색소폰 주자 자니 하지스ㆍ바리톤 색소폰 주자 해리 카니ㆍ트럼펫 주자 쿠티 윌리엄스ㆍ트롬본 주자 조 트리키 샘 낸튼ㆍ클라리넷 주자 바니 비거드와 같은 동지들이 영입되고 있었다. 1931년까지 4년의 시간을 몸담았던 코튼 클럽에서의 활동은 내적으로는 자신의 고유한 음악적 스타일을 완성하고, 그의 모든 것이었던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기틀을 마련해주는 한편, 그가 뉴욕과 미국의 재즈의 명사로 우뚝 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케 되는 기회였다. 그의 첫 번째 출세작 ‘East St. Louis Tod-dle-Oo’를 시작으로 ‘Black Beauty’(1928) ‘Mood Indigo’(1930), 그리고 ‘Black And Tan Fantsy’(1927)와 같은 혁신적인 작곡과 연주들이 코튼 클럽 시절의 듀크 엘링턴의 명성을 대변하던 곡들이었다. 1931년 듀크 엘링턴은 4년간의 코튼 클럽의 활동을 종료하고 자신의 15인조 오케스트라와 함께 미국과 유럽 전역을 순회하는 투어를 감행했다.
왕조의 전성기, 왕조의 대신들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정글 뮤직’이라 불리는, 기악의 표현을 동물ㆍ사물ㆍ사람의 소리로 형상화시켜, 마치 정글에서 여러 동물의 울음 소리가 뒤섞인 듯한 하모니를 자랑하고 있었다. 여기에 덧댄 활기에 찬 댄스 리듬은 스윙 재즈라는 새로운 유행으로 귀결되는 모티프로 작용했다. 금주법ㆍ대공황의 시대의 침잠된 미국의 분위기에 활기를 되찾아준 스윙 재즈는 NBCㆍCBSㆍABC 미국 3대 라디오 방송국이 뉴욕에 생겨나면서 라디오의 시대(Radio Days)에서 듀크 엘링턴은 다른 경쟁자들과 함께 최고의 스윙 빅 밴드 오케스트라로 위세를 떨쳐나갔다. ‘Echoes Of Harlem’(1936) ‘Dimuniendo In Blue’(1937) ‘Cotton Tail’(1940) ‘Ko-Ko’(1940) ‘Take The ‘A’ Train’(1941) 등은 당시 라디오 전파를 통해 사랑받았던 히트곡이었다.
듀크 엘링턴은 불성실하고 불친절한 작곡가였다. 간단한 메모에 가까웠던 그의 작곡은 듀크 엘링턴이 주재한 회의를 통해 구체적인 악상과 멜로디를 갖추게 되었고, 작곡ㆍ편곡ㆍ솔로ㆍ앙상블의 구성을 이런 독특한 협업 시스템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적인 공간에서 듀크 엘링턴은 단원들에게 땅딸보라고 불릴 만큼 격이 없었고, 오케스트라의 매니저는 “이 밴드에는 두목이 없다”라는 불평을 할 만큼, 민주적인 분위기로 자신의 식구들을 아끼고 독려한 조직가, 리더였다. 가족 이상으로 밴드의 구성원을 사랑했던 듀크 엘링턴과 그의 조직원들이 공동으로 창조한 음악은 실로 이채롭고, 극적이었으며, 구성진 짜임새를 지니고 있었다. 단조와 장조를 결합시켜놓은 듯한 정교한 멜로디 진행, 풍부한 감정 처리와 리듬의 효과, 속도의 조절, 다채로운 악기의 음색과 명암은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만의 특권이었다.
1940년대 이후 듀크 엘링턴의 음악에 품격과 서정을 보다 풍성하게, 섬세하게 선물한 이는 편곡자 빌리 스트레이혼이었다. 1939년 피츠버그에서의 공연을 보고 “대체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입을 짝 벌리고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듀크 엘링턴과의 첫 만남을 술회했던 빌리 스트레이혼은 용기를 내어 무대 뒤편으로 찾아가 즉석 오디션을 본 후, 그 자리에서 듀크 엘링턴의 음악적 동반자로 고용되었다. 5피트의 작은 키, 동성애자, 내성적인 성격의 빌리 스트레이혼은 듀크 엘링턴의 보호와 지지를 탁월한 음악적 세공(細工)으로 갚았다. 빌리 스트레이혼이 가세한 이후 듀크 엘링턴이 구상해놓은 작곡과 오케스트레이션은 이 영민한 천재의 감수와 마감을 빌어 다시 태어났다. 듀크 엘링턴이 구상한 밑그림에 빌리 스트레이혼의 섬세한 스케치와 색칠이 더해져 명작은 쉼 없이 쏟아졌다. 더러는 빌리 스트레이혼이 독립적으로 완성한 작품에 듀크 엘링턴의 안목ㆍ경험ㆍ조언이 더해져 완결을 빚은 작품도 있었다. 그렇게 빛과 그림자는 30년 동안 공존했다. 듀크 엘링턴과 빌리 스트레이혼은 죽음이 두 사람의 관계를 갈라놓았던 1967년까지 29년 동안 ‘소울메이트’로 운명을 함께했다.
빌리 스트레이혼 외에도 그에겐 다수의 오른팔ㆍ왼팔이 있었다. 1927년 18세의 나이에 입단하여 47년의 시간 동안 단 한 순간도 듀크 엘링턴 밴드를 탈하지 않았던 해리 카니도 대표적인 엘링턴주의자(Ellingtonian)였다. 해리 카니만큼은 아니었지만, 1928년에 기입한 이래 5년의 휴식기를 제외하고는 근 50년간 듀크 엘링턴의 곁을 지켰던 알토 색소폰 주자 자니 하지스 역시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거대한 존재였다.
왕조의 변화, 새로운 전성기
1940~1950년대에도 듀크 엘링턴의 위상은 변함이 없었고, 그의 오케스트라는 한결 두터운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재즈의 대세는 찰리 파커ㆍ마일스 데이비스ㆍ존 콜트레인으로 이양되었던 게 사실이었다. 듀크 엘링턴은 인기보다는 존경의 위치에 있으면서, 새롭고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설명했다. 오케스트라 작품으로는 ‘모음곡’ 형태의 작품과 특별한 의미를 담은 주제곡 형식의 작품들을 많이 생산해나갔다. 1943년 카네기홀에서 초연되었던 ‘Black, Brown & Beige’는 흑인 노예들의 역사를 한 편의 음악적 드라마로 그린, 서사적 교향시였다. 1957년 작 ‘Such Sweet Thunder’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묘사한 작품이었다.
1956년은 과거의 명성에 갇혀 있던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게 새로운 전환, 발전의 계기가 되는 시간이었다. 5년간의 안식년을 마치고 자니 하지스가 복귀했고, 폴 곤잘베스ㆍ샘 우드야드와 같은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 후기의 주역들이 영입되고 있었다. 이런 상승의 분위기와 맞물려 출연한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대대적인 성공으로 인해, ‘타임’ 지의 표지에는 듀크 엘링턴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통상적으로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가장 창조적인 시기를 벤 웹스터ㆍ자니 하지스ㆍ바니 비가드ㆍ지미 블랜턴ㆍ조 트리키 샘 낸튼ㆍ해리 카니ㆍ쿠티 윌리엄스ㆍ렉스 스튜어트가 재직하고 있던 1939~1941년의 시간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자니 하지스의 복귀, 해리 카니ㆍ빌리 스트레이혼의 건재, 폴 곤잘베스ㆍ지미 해밀턴ㆍ클라크 테리 등이 함께 했던 1956~1959년의 시간이 가장 활기에 찬, 진정한 의미의 전성기였다는 게 중론이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듀크 엘링턴은 솔로ㆍ트리오를 비롯한 소규모 편성의 개별적 활동에 열심이었다. 작곡가로서의 위상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듀크 엘링턴이 뛰어난 재즈 피아니스트였음에는 이견을 허용할 수 없다. 제임스 P. 존슨의 할렘 스트라이드 피아노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받은 듀크 엘링턴은 제임스 P. 존슨이나 윌리 ‘더 라이온’ 스미스가 사용하던 경쾌한 스트라이드 주법을 응용하여, 보다 화려하고 개성적인 피아노 연주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역동적인 스윙감을 장착한 다이내믹한 리듬감과 함께 스스로의 작ㆍ편곡에서 중요한 프레이즈가 부각될 수 있도록 ‘반주’의 역할에 충실했던 영민함과 기능성도 장점이었다. 그는 다른 악기의 솔로를 돋보일 수 있도록 수수하고 담담한 톤으로 숨어 있거나 배후에서 이끌어내는 역할을 사용하면서 전체를 관할하는 ‘연출자’의 입장에서 피아노에 앉곤 했다. 그의 오케스트라 밖으로의 외출 중에서도 1962년에 있었던 콜먼 호킨스와의 협연(‘Duke El- lington Meets Coleman Hawkins’), 존 콜트레인과의 협연(‘Duke Ellington & John Coltrane’)은 작곡가, 오케스트라 속에 감추어졌던 그의 또 다른 진실을 만날 수 있는, 유의미한 외출이었다. 피아노 트리오의 작업 중에서도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ㆍ드러머 맥스 로치와 함께 구성한 피아노 트리오 앨범 ‘Money Jungle’(1962)은 명작 중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작곡의 기법,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면모에 있어서 듀크 엘링턴을 계승, 발전시킨 혁신주의자 찰스 밍거스, 이 두 거인의 거대한 하모니를 엮어낼 수 있는 또 다른 거인 맥스 로치의 압박감 넘치는 해후, 한편으로는 여유와 편안함이 함께 담겨 있다. 듀크 엘링턴은 그 밖에도 일생 동안 비교와 경쟁의 관계에 있었던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의 협연, 경쟁을 선연하게 담은 ‘First Time! The Count Meets The Duke’(1961)를 비롯하여 루이 암스트롱ㆍ엘라 피츠제럴드와 같은 거물급 솔리스트를 자신의 밴드로 초대하고, 자니 하지스ㆍ빌리 스트레이혼과의 개별적 작업 등을 펼치며 그의 음악은 새로운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왕조의 폐막
듀크 엘링턴은 1974년 5월 24일, 75세의 뜨겁고 화려했던 삶의 여정을 마감했다. 1960년대 중, 후반과 1970년대의 활동은 그의 음악이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음악의 뿌리로 회귀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확장의 범위에는 교향악 작품 군들이 포함된다. 일찍이 재즈와 클래식의 이음을 자신의 중요한 음악적 목표로 설정했던 듀크 엘링턴은 다수의 클래시컬한 기법의 작품들을 발표하며, 찬반의 여론을 함께 얻은 바 있었다. 그는 1963년과 1966년에는 전격적인 교향악, 관현악 작품집을 의욕적으로 발표하고, 1965년ㆍ1968년ㆍ1973년 세 차례에 걸쳐 ‘종교 음악회(Sacred Concert)’라는 제명의 작곡을 통해 빅 밴드ㆍ합창단ㆍ보컬 솔리스트를 위한 대규모 작품을 실현시켰다. 자신의 삶을 “행복한 유랑자의 삶”으로 정의했던 듀크 엘링턴은 1970년대를 즈음한 시간에서 세계 각지를 콘서트 투어하면서 수집하고, 공감했던 세계의 다양한 음악을 위한 모음곡의 작(‘The Duke Ellington’s Far East Suite’(1967) ‘Latin American Suite’(1970) ‘New Orleans Suite’(1970) ‘Liberian Suite’(1970) ‘The Afro-Eurasian Eclipse’(1971)를 잇따라 발표했다. 듀크 엘링턴은 말년의 작업에서 자신의 기존 음악에 교향악, 종교음악, 세계의 민속음악, 월드뮤직으로의 접근, 퓨전재즈의 부분적인 도입 등 모험적인 시도를 감행하면서, 본디 넓었던 음악의 폭과 깊이를 더욱 확장시켜냈다.
평생 동안 2천여 곡의 작곡을 남겼지만, 완벽주의 작곡가로서의 면모에 어울리지 않았던 듀크 엘링턴, 연주를 통해서 비로소 작곡의 완성을 꿈꾸며 연주와 유랑의 운명을 즐겼던 듀크 엘링턴이었기에, 작곡가 듀크 엘링턴을 굳건하게 지켜주었던 오랜 벗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듀크 엘링턴의 음악도 서서히 마무리, 종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1967년, 음악적 연인 빌리 스트레이혼이 앞서 세상을 떠났고, 1970년에는 자니 하지스와도 죽음으로 이별했다. 폴 곤잘베스는 듀크 엘링턴이 죽기 열흘 전 세상을 떠났고, 47년의 최장기간 근속자였던 해리 카니는 듀크 엘링턴의 사후 5개월 뒤, 두목의 죽음을 따라갔다. 가족과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듀크 엘링턴이었지만, 1965년에 아들 머서 엘링턴을 로드 매니저로 입단시키고, 트럼펫 주자와 편곡자로 위치를 격상시키는 뒤늦은 관심과 배려를 허용했다. 결국 듀크 엘링턴이 사망한 후, 이 오케스트라를 함께 운영했던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의 의견을 모아 머서 엘링턴은 듀크 엘링턴 사후 오케스트라의 리더로 위촉되었다. 1996년 머서 엘링턴의 사망 이후에는 듀크 엘링턴의 손자 폴 엘링턴이 위대한 왕조의 영원성을 계승하고 있다.
글 하종욱(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