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무대
글 신예슬(제15회 객석예술평론상 수상자) 사진 김현우
얼마 전 디즈니 사의 만화영화 ‘신데렐라’(1950)를 오랜만에 보았다. 디즈니의 공주들이 으레 그러하듯 신데렐라도 기쁠 때, 슬플 때, 산책할 때, 청소할 때 등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즉 시도 때도 없이- 노래한다. 신데렐라가 노래할 때면 주변의 동물들은 신데렐라의 노래에 화음을 맞춰 가며 즐거이 합창한다. 신데렐라의 세상이 신데렐라의 노래에 기꺼이 화답해주는데 어떻게 자유롭게 노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신데렐라라는 인물, 동화 속 나라의 2D 공주님에게 이 상황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디즈니의 공주님이 노래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디즈니 사에서 제작한 영화 ‘마법에 걸린 사랑’(2007)에서는 동화 속 나라의 2D 공주가 3D의 인간으로 바뀌어 뉴욕 한복판에 나타난다. 동화에서 공주가 언제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곤 하는 옆 나라 왕자와 결혼하는 날, 이들의 사랑을 탐탁지 않아 하는 마녀의 계략에 넘어가 우물에 빠지게 되었고, 그 우물은 알고 보니 21세기 뉴욕 타임스퀘어 앞의 맨홀 뚜껑과 연결되어 있더라, 식의 이야기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자도 당연히 한번 봤지만 나의 아내가 될 공주를 구하러 뉴욕 행 우물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다이빙한다. 공주는 뉴욕에서도 동물들과 함께 즐겁게 노래하고, 공원을 산책하다가도 꽃이 너무 아름다워 갑자기 노래하기도 한다. 왕자와 공주가 뉴욕에서 재회하던 순간, 왕자가 갑자기 기쁨에 겨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려 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는 왕자 너는 공주, 나는 너를 사랑하며 우리는 다시 만났다, 고로 나는 노래한다! 그러나 이들의 노래는 언제나 주변인들에 의해 중단된다. 당연히, 부적절하니까. 왜 지금의 우리는 아무 때나 노래할 수 없는 것일까? 단지 판타지와 현실의 차이일 뿐일까?
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노래방 18번’ 정도는 가지고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오는 수많은 가수들, 시내에 즐비한 노래방들. 언제쯤 엘리베이터에서 열창하다가 이웃을 마주쳐도 민망해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시공간의 제약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물며 이런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나조차 집에서 옆방의 형제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열창할 때면 (원치 않지만) 약간 키득거리며 웃게 된다. 애석하게도 나는 21세기의 도시 생활에서 어디서 노래하는 것이 적절한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상황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시대 노래하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대이다. “무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다고 말하는 많은 음악가들처럼 우리는 노래하기 위해 무대로 간다. 큰 무대건 작은 무대건, 혹은 나만의 무대이건, 무대에 서는 기쁨은 곧 음악하는 기쁨이자 노래하는 기쁨이다. 새삼스럽지만, 노래하고 싶은 인간에게 노래할 수 있는 장소는 얼마나 소중하고 또 필요한 것인지. 기꺼이 우리의 열창을 용인해주는 세상의 수많은 크고 작은 무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