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 사랑의 계절
글 이정화(자유기고가)
가을이 오고 있다. 가을은 사랑하기 좋은 계절인 것 같다. 청명한 하늘과 따스한 빛, 서서히 물드는 잎들과 선선한 바람. 걷고, 만지고, 말하고 싶어진다. 가을의 사랑은 은근하고 농밀하여 속까지 익을 듯하다. 잘 숙성한 사과처럼. 사랑의 처음은 시선과 말 건넴이다. 먼저 건네는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주는 순간 받고 싶어진다. 어쩌면 준 것보다 더 많이.
플라톤의 ‘향연’에서 사랑의 첫 단계는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그것을 줄 수 있는 이에게 다가가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가 가진 어떤 것 때문에 사랑에 빠진다. 그것이 무엇일까.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라캉은 사랑받는 이의 앙상한 존재. 결핍으로 풀이한다. 에로스가 좋은 것과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있기에 그것을 욕망하듯,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면 할수록 상대의 전부를 원한다. 그녀가 말한다. “너도 나의 자리에서 나처럼 사랑해줘.” 그가 그녀의 자리로 다가가면, 사랑이 완성된다.
알렉상드르 타로의 슈베르트 즉흥곡을 듣는다. 타로는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 ‘아무르(Amour)’에서 주인공 안의 애제자로 나온다. 노부부는 타로의 연주회에 참석하여 이 곡을 감상한 뒤, 버스에서 다정하게 음악 얘기를 나누며, 집으로 온다. 안의 외투를 벗겨주고 조르주가 말한다. “당신 오늘 유난히 예쁘다고 내가 말했던가?” 선물이다. “당신은 가끔 고약하긴 한데 정말 착해.” 안이 화답한다. 다음 날부터 모든 것은 변한다. 안이 아프다. 서로의 결핍을 나누는 데 익숙한 둘이기에, 조르주는 안의 쇠락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르주는 절뚝거리다 결국 안의 결핍이 되어 문 밖을 나선다. 둘은 같은 자리에서 천천히, 아름답게 소멸한다.
사랑의 계절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