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블릭의 형성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9월 1일 12:00 오전

퍼블릭의 형성

“우리가 유럽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평론가라는 직업도 생겼지요. 비록 아주 오랫동안 직업이 될 수 없는 슬픔을 겪고 있지만. 유럽 문명이란 결국 16세기 르네상스,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어요. 그 장점은 합리적인 틀, 창조와 비평정신, 그리고 공중(公衆, public)이라는 트라이앵글에서 옵니다. 동방문명이 등한시했던 것이 바로 이 퍼블릭의 형성이지요. 퍼블릭은 스폰서, 즉 공연예술의 재정적 바탕이면서도 동시에 무서운 비평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퍼블릭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어요. ‘객석’도 결국 퍼블릭의 형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나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객석’ 같은 예술 저널리즘의 존재를 귀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박 기자처럼 젊었을 때, 평론이 무엇인지를 두고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겠어요. 그때 도달한 결론은 ‘모든 창작에는 비평정신이 있어야 한다’였습니다. 그것이 시든 슬로건이든 개의치 말아요. 중요한 건 비평정신이니까. 예를 들어볼까요. 고차원적인 시의 핵은 결국 비평정신입니다. 셰익스피어만큼 비평정신이 투철한 사람은 없었어요. 버나드 쇼는 신문사 기자 노릇을 하면서 음악비평ㆍ연극비평을 쓰고, 여기에 극작까지 병행했어요. 그런 버나드 쇼를 두고 누가 이류 비평가라고 합니까. 최근 신문에서, 웬 감투 쓴 젊은 녀석이 “창작이 중요하지, 비평이 앞서는 나라는 망한다”라고 한 걸 봤어요. 이런 인사가 감투를 쓰고 문화계를 이끈다고 하니, 그런 걸 보면 한국은 아직 ‘어린 나라’입니다.”
– 2009년 10월호 ‘객석, 평론가를 만나다’ 첫 회에서 발췌

2013년 8월 8일. 1914년 음력 7월 2일 태어나신 음악평론가 박용구 선생님의 100세 생신이었습니다. 그 하루 전날 서울 삼청동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100세 축하연이 열렸습니다. 새하얀 옷을 새하얗게 차려 입은 100세의 평론가. 그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크고 강건한 목소리로 이 자리에 닿은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 소감이란, 바로 옆에 앉아계셨던 당신의 아내에게 바치는 시 한 편이었습니다.
저는 2009년 딱 이맘때 박용구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아흔 중반 노 평론가와 서른 초반 기자의 첫 만남, 첫 대화는 ‘처음’이란 수식이 무색할 만큼 깊고 길게 이어져 네 시간을 훌쩍 넘겼습니다. 그때 나눈 이야기가 저의 지난 4년을 건강히 지켜주었다고, 확신합니다. 박용구 선생님의 100세 생신을 축하드리며, 제게 들려주신 이야기를 다시금 세상에 전합니다.
‘퍼블릭의 형성’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선생님과의 약속을 잊지 않겠습니다.

박용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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