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교향악단

음악과 함께라면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0월 1일 12:00 오전

얼마 전, 방을 정리하다 대학생 시절 주고받은 편지 뭉치를 발견했다. 빛바랜 봉투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띈 것은 군대 간 친구가 보내온 편지였다. 깨알 같은 글자로 종이를 빽빽하게 채운 소소한 이야기들도 재밌었지만, 눈과 마음에 오랫동안 남은 대목은 편지 말미였다. 오래전 무심히 지나쳤던 그 말이, 괜스레 마음을 잡아끌었다. “군대에서 음악을 계속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야.”

무더위가 한풀 꺾인 9월 초, 국립서울현충원에 자리 잡은 국군교향악단 연습실을 찾았다. 연습실 앞 복도에 줄 맞춰 세워진 첼로 케이스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각을 잡고 열 맞춰 서 있는 케이스들의 모양새가 마치 연습실을 지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들어선 연습실 안에는 70여 명의 병사들과 다섯 명의 여성 군무원들이 함께 번스타인 ‘캔디드 서곡’을 연주하며 공간을 그득하게 채우고 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오전 9시에서 조금 넘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연습실 안은 이미 정오의 태양이 떠오른 것마냥 활활 타올랐다. 에어컨 바람이 무색할 만큼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이들도 곳곳에 있었다.
연습실을 둘러보다 벽 거울 한 편에 붙은 하반기 연습 일정이 눈에 띄었다. 그 옆으로 9월 국립서울현충원 정기 음악회며, 곧 이어질 한미동맹 60주년 기념 음악회 레퍼토리가 나란히 붙어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하반기에만 한 달에 적게는 3회, 많게는 5~6회 정도의 연주가 잡혀 있다. 민간 프로페셔널 오케스트라도 소화하기 어려운 일정을 보고 있으니 입이 절로 벌어진다. 연주회 성격에 따라 새로운 주제가 대부분이기에, 일부 몇몇 곡을 제외하면 국군교향악단 소속 병사들은 전역 전까지 방대한 양의 레퍼토리를 소화하게 되는 셈이다.
국내 여러 군부대에 배치되어 있는 다른 군악대와 달리 육·해·공군이 모두 속한 국군교향악단은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이다. 현재 국방부 군악대대에는 교향악대·팡파르대·관악대·전통악대가 속해 있다. 이 가운데 국군교향악단은 장병들의 정서순화 및 사기 진작을 위한 연주회뿐 아니라 국가 주요 기념행사를 지원하는 동시에 민·군 간의 음악적 교류를 담당하고 있다. 군부대 순회연주, 격오지 부대 및 산간 도서 지역의 학교·병원·교도소 등지에서 이뤄지는 찾아가는 음악회, 국립서울현충원 정기 음악회, 국군교향악단 기획 연주 등 크고 작은 음악회를 모두 합하면 연간 70여 회의 연주를 담당한다. 여기에 2011년 미국 순회공연·2012년 베트남 국가 초청 연주회 등 해외 초청 순회 연주를 통해 문화외교 사절로서의 역할까지도 해내고 있다. 올해 국군교향악단은 10월 중 한·중 수교 20주년 초청 연주회를 위해 베이징을 방문할 예정이다.
국군교향악단은 1950년대 정훈음악대 성격의 해군교향악단과 육군 군악학교 내 연주 하사관과 본관 2기생을 주축으로 창설된 육군교향악단을 중심으로 한 120여 명 병사들의 연주활동이 그 태동이 됐다. 이후 1956년 군악학교가 해체되면서 이들의 활동도 잠시 중단됐지만 같은 해 12월 육군교향악단을 중심으로 단원을 확보하면서 연주 활동이 재개됐고, 방송국 전속단체 성격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훗날 시대적 흐름과 변화 속에 자취를 감췄던 국군교향악단은 2010년 1월 13일 재창단되었다. 이후 2011년 12월 제2대 교향악대장 정연재 소령이 취임하고, 2013년 2월 지휘자 김홍식이 음악감독으로 위촉되면서 국군교향악단은 교향곡뿐 아니라 다채로우면서도 심도 있는 레퍼토리를 선보이고 있다.
9월 현충원 정기 음악회 연습곡 중에는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5악장과 다비드의 트롬본 콘체르티노 4번도 있었다. “협연자 앞으로…” 각 곡을 시작할 때마다 음악감독 김홍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리 중에서 수줍은 표정의 병사들이 나온다. 협연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인원인데, 알고 보니 바이올린과 트롬본 모두 공교롭게 10월 전역을 앞둔 이들이다. 사회에서 학생 신분에 오케스트라 협연자로 설 기회가 흔치 않은 것을 생각하면, 군 전역을 앞두고 협연자로 나서는 것은 음악적으로도 특별한 경험이자, 평생에 남을 추억이다.

군대에서 더해진 음악가의 사명감
오전 연습이 끝난 뒤 몇몇 병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바이올린 파트의 상병 임성은 씨와 첼로의 이병 고대선 씨는 해외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중 국군교향악단에 지원했다. 두 사람 모두 계급 상으론 최고참이 아니지만, 교향악단 내에서 계급과 관계없이 오디션을 통해 수석주자를 정하기 때문에 이들이 각 자리를 맡게 됐다. 외부에서는 ‘계급이 뒤집어지면 문제가 생기지 않느냐’는 우려의 시선도 있지만, 실력으로 자리가 결정되고, 합주를 통해 음악으로 하나가 되는 시간들은 오히려 선·후임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국가 행사를 제외한 국군교향악단 연주 대부분은 저녁 시간에 이뤄진다. 다른 병사들의 쉬는 시간이 이들에겐 활동 시간인 셈이다. 군악병 역시 일반 병사와 동일하게 기본적인 군사 훈련들을 모두 받는다. 다만 보직 특성상 주특기 훈련 시간에는 악기 연습을 한다. 훈련 있는 날이 아니면 오후 4시까지의 일과 시간 동안 합주 및 파트 연습 시간을 갖고 때에 따라 외부 강사진으로부터 파트 앙상블 교습과 개인 연습 지도를 받는다. 일과가 끝난 이후에는 자유 시간이 주어지는데 말 그대로 ‘자유’ 시간이지만, 그 시간마저도 각자 개인 연습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에서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연습을 게을리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다 같이 생활하고, 또 서로 자극을 주고받다 보니 오히려 경쟁적으로 연습을 하게 됐습니다. 일과 중에는 합주가 주로 이뤄지고 밤 10시부터 한 시간 정도씩 개인별로 야간 연습을 자주 합니다.” (이병 고대선)
국군교향악단을 찾기 전에는 오케스트라일지라도 군대에 속해 있기에 경직된 음악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이들은 엄격한 규율 안에서도 음악에서만큼은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며 국군교향악단만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24시간을 동고동락하는 ‘생활형 오케스트라’이기에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더 많은 변화와 발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군 생활을 하면서 성격이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개인적인 성향이 강했고, 음악을 할 때도 저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컸는데, 국군교향악단에 들어오고 또 수석 자리를 맡으면서 뒤에서 힘들어하는 선·후임들의 이야기도 자주 듣고, 음악적인 면에서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면서 실력이 향상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젠 서로가 가족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상병 임성은)
음악과 함께하는 군 생활은 병사들에게 새로운 가족뿐 아니라 사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음악가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을 더해주었다. 무엇보다 군대에서 음악적 재능을 그대로 이어나가고 발전시킬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며칠 후 국립서울현충원 9월 정기 음악회를 찾았다. 이날 음악회에는 사전에 인터넷을 통해 신청한 관객 300여 명이 참석했다. 객석에는 초등생 자녀를 대동한 가족 단위 관객부터 백발의 어르신까지 성별로 연령도 다양한 이들이 앉아있었고, 군복을 입은 병사들도 눈에 띄었다.
정갈한 연주복 차림의 국군교향악단이 오른 무대에는 가장 먼저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애국가와 연이어 연주되는 ‘겨레여 영원하라’는 현충원 정기 음악회의 고정 레퍼토리다. 음악감독 김홍식은 매 곡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 작품 배경과 중요 부분을 친절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설명하며 관객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였다. 협연자로 나선 병사들은 턱시도 차림으로 무대 위에 올라 여느 프로페셔널 연주자 못지않은 실력을 선보이며 관객으로부터 큰 박수를 이끌어냈다. 이날 객석 반응이 가장 뜨거웠던 작품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와 강준일의 사물놀이를 위한 협주곡 ‘마당’이었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흥겨운 재즈 리듬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추는 동안 공연장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여기에 한가위를 앞두고 특별히 선보인 사물놀이를 위한 협주곡 ‘마당’은 국군교향악단과 전통악대의 사물·태평소 연주자들이 무대에 함께 올라 역동적인 리듬 속에 프로그램의 대미를 장식했다. 정기 음악회를 마무리 짓는 순서인 관객과 함께 하는 노래 시간. 이미 여러 차례 방문 경험이 있는 몇몇 관객은 어떤 곡을 하게 될지 기대하는 환호를 보냈다. 이윽고 음악감독의 소개와 함께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의 서주가 울려 퍼졌다.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모두가 한마음으로 부르는 노래가 끝나갈 무렵, 밖에는 가을을 알리는 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었다.
연주가 끝난 뒤, 감상 소감을 묻는 질문에 중년의 한 남성 관객은 “몇 년째 현충원 정기 음악회를 보러 일산에서 오고 있다”라며 “젊은 장병들이 음악적 재능을 살려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힘이 솟지 않느냐”라고 되물었다. 더불어 “좋은 음향 시설을 갖춘 홀에서 국군교향악단의 연주를 자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라는 말과 함께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곁으로 연주를 마친 병사들이 공연에 대해 자평도 하고, 서로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가을비 속으로 걸어갔다. 부대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피곤할 법도 한데, 누구하나 지친 기색 없이 밝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음악이 있기에, 그 음악 안에서 마음과 마음이 만났기에 모두가 기꺼이 웃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음악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의 친구, 그리고 누군가의 아들이자 형제인 병사들의 말이 마음에 계속 맴돌았다.
“무엇보다 음악을 계속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글 김선영 기자(sykim@) 사진 박진호(studio B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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