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평생을 도시에서 살았고 수영까지 못하는지라 바닷속을 들여다볼 일이 없었습니다. 기껏 안다는 물속은 TV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바닷속 혹은 거실의 유리 수족관이 전부였습니다. 지난달 태어나 처음 스노클링이란 걸 해봤습니다. 바닷속으로 들어가 여러 물고기와 노닐었는데, 서울에 돌아와도 ‘물고기’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침 ‘물고기 마음’을 노래하는 루시드 폴 인터뷰도 준비해야만 해서 더욱 그랬을지 모릅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사는’ 고기가 될 수 없습니다. 물에서 ‘나는’ 고기는 될 수 있겠지요. ‘고기’는 사전적으로 사람의 먹을 수 있는 동물의 살점 말고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러니 물고기는 물‘고기’라 불릴 때부터 이미 사람의 먹을 것, 죽은 존재 취급을 받는 셈입니다. 그것이 살아있을 때부터 왜 고기라 불릴까. 전에 없이 ‘물고기’라는 단어가 슬프게 들렸습니다.
택시에 몸을 싣고 꽉 막힌 경복궁 앞을 지나는데 시인 이상의 ‘건축무한육면각체’ 마지막 구절이 떠오릅니다. “바깥은 우중. 발광어류의 군집이동.” 이상은 도로 위 자동차의 행렬을 그리 빗대었습니다. 다시금 ‘물고기’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박힙니다. 불쌍한 물‘고기’.
다행히 해양생물을 연구하는 사람이 제 지척에 있습니다. 그 김에 전화를 걸어 물고기라는 단어의 슬픈 사연을 전합니다. 가만히 듣던 그는 저의 동정에 동의하지 않고, 조근조근 말을 이어갑니다. “다큐멘터리도 수족관도 없던 아주 옛날엔 지금과 달리 살아있는 어류를 보기 어려웠겠지. 어부에게 잡힌 후 ‘먹을 것으로서’ 시장에 나와 있는 모습만 보았을 테니 자연스럽게 ‘고기’라 불리지 않았을까 싶다.”
뒤통수에서 “대앵” 하고 종이 울립니다. 복잡하지도 감상적이지도 감각적이지도 않고, 그저 단순하고 당연한 말. 그는 물고기를 의인화하여 바라보지 않습니다. 다소 딱딱하고 차가운 태도일 수도 있지만 물고기를 물고기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기에 뜻하지 않은 답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추상적인 존재를 보고 듣고, 그것을 글로 전하는 제게 이런 ‘순리적 단순함’이야말로 물고기가 만난 물과 같습니다.
아, 사실 물고기들도 제각각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물고기는 스스로가 ‘물고기’로, 혹은 각각의 이름으로 불리는지조차 모르고 어여히 삽니다. 제자리에서 순리대로 살기. 루시드 폴의 말을 빌리자면, 불자들은 이를 ‘여여(如如)하다’라 부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여러분은 여여하신가요. 물고기가 만난 물 같은 그곳에서….
편집장 박용완